[인물사전]쿠퍼(Kate E. Cooper, 1886. 6. 25~1978)

인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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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06-07-0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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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감리회 여선교사. 한국명 거포계(巨布計)

미국 조지아 주 더글라스빌 근교에서 토마스 쿠퍼(Thomas Cooper)의 3남 4녀 중 차녀로 출생했다. 아버지는 침례교인이었고 어머니 도로시 쿠퍼는 감리교인이었다. 쿠퍼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감화와 교훈을 받아 자랐으며, 날마다 성경을 읽으며 기도 드리는 법도 어머니에게 배웠다. 아버지를 따라 침례교회로 가는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어머니를 따라 더글라스빌에 하나밖에 없는 감리교회로 갔다.

1901년 6월 초급대학을 마친 뒤 1903년 6월 웨슬리안대학을 졸업하고 그 해 가을 컬로덴소학교에 교사로 임명되었다. 1905년 애쉬번소학교에서 3개월 가량 교사를 하던 중 스카릿(Scorritt)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스카릿신학교는 대개 외국이나 국내 선교사 되기를 지원하는 이들이 다녔으며 교회사와 선교사업에 관한 과목을 주로 배웠다.

1908년 6월 뉴올리안즈에서 모인 남감리회 해외여선교회에서 한국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쿠퍼가 뉴올리안즈로 가기 전에 이미 한국 원산 선교사로 나온 마이어스(M.D. Myers)에게서 한국 교회 사정을 소개받았고, 1905년 원산에 있던 감리회 선교사들과 캐나다 선교사들이 연합하여 부흥회를 한 결과 큰 부흥이 일어났었음을 전해들은 쿠퍼는 한국 교회와 한국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고 한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간절히 품게 되었다. 1908년 6월 25일 한국 선교사로 파송받고, 9월 17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으로 출발하였다. 열흘 후 일본 고베항에 도착하여 2주일간 머물다가 나가사키를 경유하여 10월 22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다시 배편으로 원산으로 향하였고 원산 선교부로 부임하여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줄곧 원산 보혜여자관 사업을 맡아 여성을 위한 선교, 교육, 계몽사업에 헌신했다.

부임 후 보혜여자관 사업을 본 궤도에 올려놓았고 두 채의 집을 신축하고 성경학원을 설립했는데 경제적 지원을 한 콥의 이름을 따서 앨리스ㆍ콥여자성경학원(Alice Cobb Bible School)이라고 하였다. 이에 교육활동을 본격화시켰고 이를 통해 많은 여전도인들이 양성되었다. 1926년에는 다시 큰 건물을 지은 후 그 명칭을 보혜여자관으로 확정했으며, 1929년 4월 정규과정을 마친 제1회 성경학원 졸업생을 배출했다.

1921년 여름 제2차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 춘천 여선교대회를 마치고 오던 중 장티푸스를 앓아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했고, 제3차 안식년 기간이었던 1929년 5월 내슈빌에 있는 스카릿신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1929년 한국에 돌아온 후 보혜여자관 사업을 계속 맡았으며, 부녀자들에게 영어, 재봉, 요리 등을 가르쳤고 어린이 휴양부(탁아소)까지 설치하여 아동사업도 함께 하였다.

1930년 한국 남.북감리교회가 합동했고, 1931년 6월에는 남.북감리교회에 소속하였던 여자 선교회가 합하여 하나로 되었다. 또한 1931년에는 여성 중에서 자격을 갖춘 교역자에게 목사 안수를 베풀었는데, 그 해 6월 14일 제1회 조선감리회 연합연회가 열렸을 때 한국에서 오랫동안 선교하고 또 자격을 갖춘 14명에게 목사 안수례를 했다. 이때 쿠퍼도 양주삼 총리사에게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32년에는 만주 간도의 용정여자성경학원에서도 성경을 가르쳐 여자교역자 양성에 헌신하였다. 1937년에는 강릉지방 감리사로 취임했다. 1938년 9월 24일 쿠퍼의 한국 선교 30주년 기념식이 원산중앙교회에서 열렸고 6백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이를 축하했다.

1940년대에 들어서 일제의 탄압이 심해졌고 선교사들은 연금을 당하거나 함구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쿠퍼 역시 일본 형사의 감시를 받으며 지내야 했다. 미일감정이 악화돼 갔고 이에 따라 미국무성에서는 한국에 주재하고 있는 영사관을 통해 모든 선교사에게 귀국을 명하였고 1940년 11월 하와이에서 한국을 향하는 배를 보내어 여자 선교사를 먼저 귀국토록 했다. 쿠퍼는 그 배를 타지 않았지만 며칠 후인 11월 23일 다른 배를 통해 한국을 떠나야만 했다.

한국을 떠난 쿠퍼는 1940년 12월 9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고, 1941년 가을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하트포드신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쿠퍼의 나이가 55세였으나 기회만 있으면 공부를 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1942년 9월부터는 선교부의 부탁으로 뉴멕스코 알부컬크에 있는 감리교계 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소식을 들은 쿠퍼는 다시 한국으로 오기를 원했으나 한국의 치안이 확보되기까지 여선교사를 한국에 보낼 수 없다는 미 국방성의 방침으로 한국에 있는 사람들과 편지만 주고받을 수 있었다.

1947년 다시 내한하여 선교활동에 임했고, 그 해 10월 5일 공산정치를 피해 남한으로 피난 온 사람들을 모아 부인들 간의 구국 기도단을 만들기도 했다. 1948년 6월 25일 서울 충정로에 있는 감리교신학교 대강당에서 한국 선교 40주년 기념식과 회갑연을 가졌다. 1949년 젠센 목사와 함께 이천읍에 있는 양정여학교의 이사로 선출되어 학교 발전을 위해 활동하였다. 1949년 양정학교가 문교부에서 초급 중학교로 인가를 받을 때 설립자로 되어 있었고 학교 설비와 비품, 학생들의 학용품을 제공해 주었고 학생과 교사에게 설교하며 성경을 가르쳤다. 6.25 당시 교사가 대파되었을 때 쿠퍼는 미군과 연락을 취해서 교사 신축에 필요한 물자를 얻게 하기도 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에는 일본 히로시마에서 머물면서 한인교회에서 설교하고 가르쳤다. 1953년 다시 내한하여 감리교신학교 내의 전수과 설립을 위해 힘쓰는 한편 교수로 있었다. 대전신학원이 설립되면서 감신 전수과 폐지로 대전신학원 교수로 역임했다. 쿠퍼는 신학 교수를 하면서도 이천ㆍ수원지방 전도사업을 도왔고 《가정성경공부》와 《매일예배》를 출판하여 가정신앙생활에 큰 도움을 주었다. 1957년 은퇴 귀국하였고, 1978년 별세하였다.

-참고문헌:이호운, 《주께 바친 생애 쿠퍼 목사전》, 감리교총리원 교육국,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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