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사전]케이블(Elmer M. Cable, 1874~1945.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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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06-07-0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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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감리회 선교사. 한국명 기이부(奇怡富)

미국 아이오와 주 블도라의 믿음이 독실한 가정에서 출생. 성장 과정에서 지성적이고 영적인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미국의 명문 사학인 코넬대학교를 1899년 6월에 졸업하였고, 1917년에는 모교 코넬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899년 봄 미감리회 서북 아이오와연회에서 집사목사 안수를 받고 곧 한국 선교사로 파송받아 그 해 9월에 내한하였다. 1899년부터 1901년까지 배재학당 대학부 교수로 재직했고, 1902년 5월에 평양에서 회집된 선교연회에서 무어(D.H. Moore) 감독에게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어 곧 한국서지방 감리사로 임명되어 제물포교회 담임자가 되었고 해주, 연안, 강화, 시흥, 부평, 남양구역 등을 총괄하였다. 뿐만 아니라 감리교 교역자 양성기구였던 신학회에서 강의를 했으며 1905년 6월에는 경기 서부 및 충청도지방 감리사, 1907년 제물포지방 감리사, 1908년 공주지방 감리사, 1909년 6월 충청도지방 감리사를 각각 역임하였다.

특히 케이블은 한국의 일제에 의한 국권상실에 비분하였고 한국인을 이해하고 동조하는 입장을 취했다. 한국인의 교육을 통한 실력배양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1908년 3월 공주지방 감리사로 재직할 때에는 친일 감독인 해리스(M.C. Harris)에게 항의한 적도 있고, 독립운동에 가담했다가 총살당하는 현장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한국인 생존자의 증언을 기록하여 선교회 보고서에 첨부하기도 했다.

케이블은 문서선교에도 큰 관심을 가져 1905년부터 〈대한그리스도인회보〉(The Korean Christian Advocate)의 주필로 활약했다. 1910년 6월 협성신학교 교수로 파송받아 역사신학 교수로 4년 동안 강의했다. 케이블은 교감으로서 초창기 신학교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신학교 경영원칙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신학교 성공 여부는 전적으로 어떤 정신으로 경영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선 신학교는 토착교회와 우호적인 협력관계를 맺어야만 한다. 학생들에게 최상의 수업을 받도록 할 것이며 어떤 경우에도 학생들을 편애해서는 안 된다. 최대한의 인내심과 형제애를 가지고 학교의 설립 목적을 달성할 것이다. 우리는 학생들에게 최고 수준의 인간성을 보여주어야 하며 믿음을 갖고 학생들을 훈련시켜야 한다. 우리 형제처럼 학생들을 신뢰해야 한다\"(\"The Methodist Theological Seminary\", The Korea Mission Field, Apr. 1913). 케이블은 한국 토착교회, 한국인 학생들과 우호적인 관계, 신뢰를 강조했다. 일부 선교사들의 인종적 우월감, 민족 차별주의를 경고했던 것이다.

케이블은 협성신학교 기관지 〈신학세계〉를 통해 여러 논문을 발표했는데, \"감리교의 간략한 역사\"(1918. 5), \"메도디스트교회의 약사\"(1919. 1), \"요한 웨슬레전\"(1920. 7~1921. 5), \"연대적 기독교사\"(1926. 2), \"감리교 선교의 초기\"(1934. 7) 등의 글은 감리교회사 및 한국 교회사 연구의 기초가 되었다. 그는 일반사 연구에도 조예가 깊어 1938년 〈왕립 아시아학회지〉에 \"United States-Korean Relations 1866~1871\"라는 방대한 논문을 발표했는데 한미 관계사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의 효시가 되었다.

케이블은 1915년 감리교와 장로교 연합 경영으로 연희전문학교가 신촌에 설립될 때 미감리회를 대표하여 창설 작업에 참여했고, 이후 10년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1926년 6월 협성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협성신학교 부임 즉시 신학교 체제와 교과과정을 정비하여 고등보통학교 졸업생이라야 응시할 수 있는 4년제 전문학교 수준으로 격상시켰다. 케이블은 최고 수준의 신학교육기관을 만들려는 의지로 협성신학교를 연희전문학교와 통합하여 종합대학으로 발전시키려는 계획을 수립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그 대신 고등 교육기관에서 한국 최초로 남녀 통합교육을 실현하였다. 1929년 4월부터 충정로에 있던 협성여자신학교와 합방 교육을 강행하였고, 3년의 실험 기간 끝에 두 학교가 통합하여 감리교신학교가 되었다.

1932년 4월 다시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파송받아 활동했다. 이후 1940년 12월 일제에 의해 강제 귀국당하기까지 연희전문학교에서 강의하였고 귀국 후에는 부인과 함께 샌리안드로에 머물다가 1949년 12월 2일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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