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사전]캠벨(Josephine P. Campbell, 1852. 4~1920. 11. 12)

인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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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06-07-0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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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감리회 최초의 한국 여선교사. \"강부인\"(姜夫人) 혹은 \"강모인\"(姜慕人)이란 칭호를 받음

미국 남부 텍사스에서 출생함. 21세 되던 해에 조셉 캠벨(Joseph Campbell) 목사와 결혼하였고,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으나 1880년 캠벨 목사가 별세하고 수년 내에 자녀들도 모두 잃어 혼자 남게 되었다. 이 같은 불행을 겪은 캠벨은 남은 일생을 \"다른 사람을 위하야 공헌하기로 결심하고\" 시카고에 있는 간호원 양성소에 들어가 간호원 교육을 받았다. 그 무렵 남감리회의 중국 선교사로 갈 결심을 하여 1886년 정식 선교사로 중국에 파송되어 중국 상해(上海)ㆍ소주(蘇州) 등지에서 10여 년 간 활약하였다. 그는 1897년 남감리회 해외여선교부(Woman\'s Board of Foreign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가 한국으로 파송한 첫 정식 선교사로 10월 9일 내한하였다. 그는 내한하면서 중국에서 활동하던 시절 얻은 교인이며 양녀이기도 한 \"여도라\"(Dora Yui, 余小姐)를 데리고 왔다. 여도라는 정식 선교사는 아니었으나 선교사 이상의 활약을 보였으며 캠벨이 추진하는 선교사업에 훌륭한 조력자였다.

캠벨은 이미 내한한 남감리회 리드(C.F. Reid) 부부가 있던 남대문 안 남송현(南松峴) 선교부 안에 정착했다. 그러나 남송현의 선교기지가 훌륭하기는 하지만 다른 선교부 사업이 이미 진행중이었기 때문에 기존 선교부가 들어가지 않은 지역에서 교육사업을 개척하려 했다. 그 계획은 구체적으로 추진되어 1898년 8월 1일 서울 북서부 \"고가나무골\"(古澗洞, 지금의 내자동으로 주로 궁에 드나들던 내시들이 살던 곳으로 속칭 \"자골\"로도 불렸다)로 이주하였다. 1898년 5월 1일 서울에서 여자 3명, 남자 2명, 모두 5명의 학생으로 매일학교(Day School)를 설립한 캠벨은 고가나무골에 정착하면서 본격적인 여성 \"기숙학교\"(Boarding School) 설립 준비를 서둘렀다. 1898년 10월 2일, 8세 소녀 5명으로 학교를 설립하였으니 이것이 남감리회의 가장 대표적인 여학교인 \"배화여학교\"의 시작이었다. 이 학교의 처음 이름은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있는 아이들이 낸 선교기금이 학교 설립 자금의 일부로 쓰여졌기 때문에 \"캐롤라이나학당\"(Carolina Institute)이라 불렸다. 이 학교는 1903년 12월에 구한국 정부 학부대신의 설립인가를 받으며 비로소 \"배화학당\"(培花學堂)이란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5명의 학생으로 시작된 배화학당은 1900년에는 학생이 38명으로 증가하였고, 1901년 학당 부지 안에 별도의 예배당을 건축하여 \"루이스 워커 기념예배당\"(Louise Walker Chapel)이라 불렀는데 이곳에서 시작된 예배 집회가 종교교회와 자교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배화학당은 1909년 \"배화여학교\"로 정식인가를 얻으며 졸업생도 정기적으로 배출하게 되었고, 캠벨은 1898년부터 1912년까지 배화여학교의 제1대 교장을 역임하였다.

교육사업과 함께 전도부인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인식한 캠벨은 전도부인 양성에도 관심을 기울여, 고가나무골로 정착한 1898년 8월에 바로 여성 사경반(Bible Class)을 열어 전도부인 후보자 교육을 시작하기도 하였다. 캠벨은 지방 여성 교육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918년 캠벨은 안식년으로 귀국하였다가 이듬해 한국으로 돌아오려는 채비를 하다가 신병을 얻었다. 주위의 친지들은 신병을 회복한 후에 한국에 갈 것을 권면하였으나 그는 1919년 8월 한국으로의 귀환을 강행하였다. 그러나 병세가 호전되지 못하고 고생하다가 1920년 11월 12일 별세하였다. 11월 15일 그녀의 장례는 배화학당장으로 거행되었고, 유해는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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