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사전]이용도(李龍道, 1901. 4. 6~1933. 1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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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6-07-0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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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운동가. 호는 시무언(是無言)

황해도 금천군 서천면 시변리에서 비(非)신자인 아버지와 경건한 기도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더없이 가난했고 장터 거간꾼이었던 아버지의 방탕과 어머니의 병고가 그가 자라난 가족 환경이었다. 이용도는 어려서 잔병을 많이 앓았고(특히 학질을 언제나 앓았다고 한다), 신경이 과민한 편이었으며 울기를 잘하는 등 보통 이하의 변변치 않은 아이였다.

이용도는 이처럼 대주가(大酒家)인 부친과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 사이의 편치 않은 가정 속에서, 어머니의 신앙에 깊은 감화를 받아 13세 때부터 예배당 종각에 올라가 여러 시간 혹은 밤새도록 기도를 올린 일도 있었다. 어느 날 중풍에 걸리신 백부(伯父)의 약을 구하기 위해 캄캄한 밤길을 가는데 키가 9척이나 되는 마귀(魔鬼)가 나타나 길을 막았다. 이때 이용도는 놀라지 않고 마음을 침착히 한 후 찬송가를 큰 소리로 불렀더니, 하늘에서 천사의 날개가 내려와 그 마귀를 밀어내고 보호하여 주어서 그 길을 무사히 가서 목적한 바를 이루었다. 이것이 그가 세상에서 환상을 본 첫 경험이었다. 시변리공립보통학교를 졸업(1914)한 이용도는 1915년에 개성 한영서원에 입학하였다. 이용도는 19세에 결혼까지 한 몸이었으나, 3.1운동 때 개성에서 독립운동에 가담하였고 약 2개월간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920년 2월 11일에는 기원절 사건으로 6개월간, 1921년 성탄절에 불온문서 사건으로 6개월간, 1922년 가을에 태평양 의회 사건으로 2년 징역 언도를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는 등 3년 이상을 감옥에서 살았다.

이용도는 1924년 윤치호와 왓슨 교장의 추천으로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오직 애국심에 불타고 독립운동에만 열중했던 이용도는 이 당시 신학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잡지, 시가, 법률, 소설, 정치 서적을 읽으며 이론가, 논쟁가, 말썽꾼, 싸움패, 과격파로서 잘 알려져 있다.

이용도의 폭풍우 치는 마음은 우원 이호빈, 이환신과의 만남으로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갔으나, 1925년 가을 사형선고와 같은 폐병 3기 진단은 이용도가 이환신의 손에 이끌려 강동(江東)으로 가는 계기가 되었다.

강동에서 이용도는 작은 교회의 부흥회 인도를 맡았는데 이때의 체험은 이용도의 삶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찬송가를 부르다가 강단에서 한없이 쏟은 눈물이 이용도를 딴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후 그의 병은 호전되었고 음식도 상당히 섭취하면서 자진해서 여러 교회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1928년 1월 28일 이용도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강원도 통천구역으로 파송받았다. 그의 교회 담임 초기의 활동은 이성적인 전도인이요 문화적인 교역자였다. 사실상 그가 기도에 전력하게 된 것은 통천에서 만난 박재봉이라는 청년과의 만남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통천읍 서북쪽 백정봉에서 10일간의 금식기도 후 이용도는 변화되었고, 특히 1928년 12월 24일 새벽에 환상 속에서 마귀와의 투쟁(승마 체험)은 그가 대부흥사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용도는 1929년에 자기가 담임한 교회 이외에 20여 교회에서의 부흥회 인도를 시작으로 1930년도에 여러 곳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였고 1930년 주일학교연합회 간사로 부임한 후에도 부흥회 인도를 멈추지 않았다. 1931년에는 평양 중앙교회, 재령 동부교회, 재령 서부교회, 경남 거창교회, 간도 용정교회, 국자가교회, 두도구교회, 평양 남문교회, 함남 영무수양회, 은률교회, 선천 남교회, 선천 북교회, 아현성결교회, 경남 통영교회, 사천교회, 충북 진천교회, 경남 삼청동교회, 중앙전도관, 인천 내리교회, 개성 남부교회, 화천교회, 평양 명촌교회, 산정현교회 등을 인도하였고, 1932년에는 동대문교회, 인천 내리교회, 서울 자교교회, 연화봉교회, 상동교회, 도화동교회, 강원도 양구교회, 용두리교회, 신설동교회, 채부동교회, 평양 명촌교회, 평양 신암교회, 한포교회, 충남 당진교회, 광화문교회, 평남 안주교회, 운산 북진교회, 해주 남본정교회, 신계교회, 양주 월계리교회 등 5년 목회기간 동안 약 1백여 개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그는 찬송과 기도와 설교의 사람이었다. 성령이 임하면 열정적으로 부흥회를 인도했던 이용도는 기도, 체험, 성령충만을 강조함으로써, 특히 영혼만을 구원한다는 데 집중하였다. 신학보다는 삶, 형식보다는 은혜, 제도보다는 사랑의 은사를 강조하였고, 현실 교회의 실패 원인을 성령 받지 못한 탓에 있다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이용도의 부흥운동이 결국 몰락하게 된 원인은 교회의 이용도에 대한 강경한 결의와 1932년 10월 한준명과의 관계에서 시작되는데, 그는 원산에서 한준명과 백남주, 유명화의 강신극 사건에 휘말려 들었던 것이다. 이용도가 이들 일파에 접속된 동기는 두 가지로서 하나는 유명화가 원산에 있을 때 이용도가 그의 말소리에서 예수의 음성을 들었다고 착각하여 그 앞에 엎드리어 \"주여\"라고 한 데서 시작되었으며, 다른 하나는 이용도가 원산에 있던 한준명이 평양에 갈 때 그에게 준 평양으로 보내는 소개장 때문이었다. 원산에서 평양으로 온 한준명은 그곳에 있던 접신녀 이유신과 한 달 동안 머물면서 3일간 강신극을 벌였는데, 이때 사람을 구타하고, 예언이라 하며 욕을 하고 난리를 벌이는 통에 한준명과 이를 소개한 이용도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높아지고, 결국 이용도를 노리고 있던 평양 교회의 목회자들에게서 \"한준명이 그릇되며, 그를 소개한 것이 잘못이고, 그와 관계를 앞으로 끊겠다는 성명을 발표하라\"는 압력이 이용도에게 가해졌다. 그러나 이용도는 이를 거절했고, 이를 계기로 이용도 목사는 몰락의 길에 접어들었다.

1933년 1월 28일에서 2월 4일까지 황해도 해주에서 지극히 소수의 사람들 앞에서 설교하고 그곳에서 또 과격한 몇 청년들에게 폭행당한 것이 그가 공식 석상에 섰던 마지막 기회였다. 결국 그는 불치의 병, 폐결핵으로 1933년 파란 만장했던 생(生)을 조용히 마감했다.

-참고문헌:변종호, 《이용도목사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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