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사전]우덕순(禹德淳, 1876~1950.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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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06-07-0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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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일명 우연준(禹連俊). 호는 단운(檀雲)

충북 제천에서 태어남. 서울로 올라와 동촌(東村)에서 잡화상을 경영하며 생계를 이어가던 중, 일제의 통감정치에 비분강개하여 독립협회 등 애국단체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다.

독립협회 해산 이후 \"상동예배당에 청년회를 세우고 전에 하던 일을 속으로 계속하다가\", 1905년 일제에 의해 을사보호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국내에서는 활동할 여지가 없음을 깨닫고 해외로 망명해 국권회복 투쟁을 결심, 그 해 겨울 칠순의 노모와 처자식을 남겨 두고 시베리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출발했다. 목적지에 도착한 그는 동지들의 재정 지원으로 1906년 계동(啓東)학교를 설립하고 조국광복을 위한 청년 교육사업에 헌신하는 한편, 전 북간도 관리사 이범윤(李範允) 등과 연락을 취하여 의병을 조직, 의병 1천여 명을 모아 김영준을 교관으로 연추에 훈련소를 만들어 항일 전투력을 강화하였다.

그러던 중 1908년 여름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安重根)이 이끄는 독립군에 가담하여 국내로 침투, 함경북도 경흥ㆍ회령지방의 일본군영을 습격하다 체포되어 7년형을 선고받고 경흥감옥에서 복역중 탈출하였다. 이듬해인 1909년 봄에는 다시 노령 연추에서 안중근, 김기열 등과 함께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결성하여 결사보국을 맹세, 이름을 연준으로 개명하고 담배행상을 하며 블라디보스토크 각지를 왕래하면서 〈대동공보〉(大東共報,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 교민단체인 한국국민회가 발행한 신문으로 독립의식을 고취함)의 모금 및 동지간의 연락을 담당했다.

그 해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상(財務相)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안중근, 조도선(曺道先), 유동하(劉東夏) 등과 함께 거사를 계획하였다. 거사 직전, 하얼빈 김성박의 집에서 그와 안중근은 함께 결의를 다지며 시를 지었다. 먼저 안중근이 9언 절구 한시를 지었는데, 이를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장부가 세상에 있음이여 그 뜻이 크도다 / 때가 영웅을 만듦이여 영웅이 때를 만들도다 / 영웅이 세상을 봄이여 어느 때에 뜻을 이룰 것인가 / 동풍이 점점 차가와짐이여 뜻한바를 필히 이룰지니라 / 쥐새끼들이 훔쳐봄이여 어쩌다 이런 운명이 되었는고 /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음이여 때와 형편이 확연하구나 / 동포여 동포여 대업을 속히 이룰찌어다 / 만세 만세 대한독립 만세 / 만세 만세 대한독립 만세\"

이어서 그가 한글 4.4조 민요 형태의 시조를 지었는데 이 시에서 그의 민족주의 신앙의 실체를 읽을 수 있다.

\"만났도다 만났도다 원수너를 만났도다 / 너를한번 만나고자 일평생에 원했지만 / 하상견지(何相見之) 만야(晩也)런고 너를한번 만나려고 / 수륙으로 기만리를 혹은윤선 혹은화차 / 천신만고 거듭하여 로청양지(露淸兩地) 지날때에 / 앉을때나 섰을때나 앙천하고 기도하길 / 살피소서 살피소서 주예수여 살피소서 / 동반도의 대제국을 내원대로 구하소서 / 오호간악(嗚呼奸惡) 이도적아 아등민족 이천만을 /멸망까지 시켜놓고 금수강산 삼천리를 / 소리없이 뺏노라고 궁흉참악(窮兇慘惡) 저수단을 / …… (중략) …… / 지금네명 끊어지니 너도원통 하리로다 / 갑오독립 시켜놓고 을사체약 한연후에 / 오늘네가 북향할줄 나도역시 몰랐노라 / 덕닦으면 덕이오고 죄범하면 죄가온다 / 너뿐인줄 알지마라 너의동포 오천만을 / 오늘부터 시작하여 하나둘씩 보는대로 / 내손으로 죽이리라\"

거사를 확실히 하기 위해 채가구(蔡家溝) 역과 하얼빈 역을 거사장소로 정한 두 사람은, 정착 가능성이 더 높은 하얼빈 역으로 서로 가겠다고 고집하다, 결국 우덕순이 채가구 역에, 안중근이 하얼빈 역에 대기하기로 했다. 이토를 태운 기차가 채가구 역을 지나침으로써 이토 저격은 안중근에 의해 행해졌던 것이다. 안중근이 현장에서 러시아 헌병에 체포된 뒤 이 소식을 듣고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다가 역시 러시아 헌병 20여 명에게 포박당했으며, 곧 국경지방 재판소에서 수일간 심문을 받은 후 일본총영사관 경찰서로 인계되었고, 다시 여순관동도독부 지방법원으로 호송되었다.

1910년 2월 22일 6회에 걸친 공판을 마치고 결심공판에서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그 해 9월 여순감옥에서 경성감옥으로 압송되어 수감중, 1908년 경흥헌병대 파옥 탈출 사건이 탄로나 다시 함흥지방 검사국으로 이감, 사형을 언도받았다가 일본 천황 다이쇼(大正)의 즉위에 의한 특사령으로 경흥사건은 면죄되어, 다시 서대문감옥으로 압송되었다.

그는 결국 7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1915년 2월에야 출옥하였으며 일경의 감시로 국내에서는 활동할 수가 없어, 그 해 5월 다시 만주로 망명하여 하얼빈ㆍ치치하루ㆍ만주리ㆍ납하ㆍ리하 등 각지를 왕래하면서 학교 및 교회를 설립하였고, 교포들 상호간의 연락과 제2세 교포들을 위한 육영사업에 헌신하는 한편, 민족운동에 전념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으로 일제의 세력이 만주 전역에 뻗쳤을 때, 그는 요시찰인으로 감시를 받아 몇 차례에 걸쳐 투옥당했으나 굴하지 않고, 기독교 장로로서 교회를 근거 삼아 우리말 보존에 헌신해 오다가, 1945년 8월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일본헌병에 검속당했으며 해방과 동시에 출감, 흑룡강성 한인민단위원장에 추대되었다. 그는 이때 아들 대영(大榮)과 함께 교포피난민들을 고국으로 수송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귀국 후 1949년 대한국민당 최고위원에 피선되어 배은희, 신익희, 윤치영, 지청천 등과 함께 건국사업에 투신하였으나, 1950년 9월 26일 공산군에 의하여 참살당했다. 1962년 3월 1일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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