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사전]오화영(吳華英, 1879. 4. 5~19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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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06-07-0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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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1879년 황해도 평산군 평산면 대촌리에서 오석조의 장남으로 출생. 1895년 18세까지 한학을 수학하였고 이때 동학에 가담하여 활약하다가 만주로 망명하였으며 이곳에서 신학문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의 개종에 대한 동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구국의 열정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귀국 후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여 1918년 졸업하였다. 1909년 남감리회 소속으로 전도생활을 시작하여 개성서구역(1909~1911), 개성 북부교회(1911~1913) 전도사를 거쳐 1913년 9월 원산 상리교회로 전임하였다. 그리고 1914년 8월 23일 김영학(金永鶴), 최태곤(崔泰崑) 등 3명이 함께 앳킨스 감독(Bishop James Atkins)에게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원산여선교회의 창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최초의 원산여선교회는 앨리스콥성경학원(Alice Cobb Bible School)에서 발족되었다. 앨리스콥성경학원은 보혜(普惠)여자성경학원 혹은 원산여자성경학원으로 불렸는데 전도부인과 여성지도자들을 많이 양성하였으며, 이후 원산여선교회의 구심점이 된다. 당시 원산여선교회 사업을 주관하고 있던 노이즈(A.D. Noyes)의 증언은 원산여선교회 창립에 오화영 목사의 역할이 중요했음을 알게 해 준다.

\"이곳(원산) 상리교회 전도사 오화영의 제안에 따라 여성들이 스스로 회(band)를 하나 만들었는데 매달 봉급의 20분의 1을 내서 전도부인 1명을 보조할 계획입니다. 올해는 주님 사업에 있어 기쁨과 축복으로 가득 찬 해였습니다.\"

이러한 여선교회의 창립은 당시 넉넉하지 않았던 전도부인들의 지원을 위해 솔선수범하는 데 있었는데 원산여선교회의 이런 방법은 다른 지역 여선교회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1917년 서울 종교교회로 부임하였으며 1918년 10월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민족주의 의식이 강한 목회자였다. 이러한 모습은 그가 항일운동 후 법정에서 진술한 말로 1920년 10월 〈기독신보〉에 게재된 공소 공판기에서 볼 수 있다.

\"사천 년 역사를 가진 조선을 일조에 일본에게 빼앗기었던 것을 반대하고 독립하고자 하는 희망이야 어찌 말로 하리오 그러나 다만 시간 문제이나 어느 때던지 조선은 반드시 우리의 조선이 될 줄 알고 오늘날 이 자리에서 이러한 수치를 당하면서도 독립을 기다리고 있던 차에 정춘수에게 독립운동계획을 듣고 이에 참가한 것이라.\"

그는 3.1운동에 소극적이었던 신석구 목사를 3.1운동에 참여하도록 권유하기도 했다. 그는 민족 대표 33인으로 개성에서 정춘수 목사와 개성북부교회 목사 강조원 등과 연락을 취하면서 만세시위를 준비했으며, 1919년 2월 20일 창신동 박희도 자택에서 이승훈ㆍ정춘수ㆍ오기선ㆍ신홍식 등과 밀의하고 독립운동에 관한 대책을 세웠다. 각 대표들과 함께 그 달 27일 제동 최린 자택에서 다시 회집, 천도교 대표 손병희, 장로교 대표 길선주, 감리교 대표 이필성, 불교 대표 백룡성의 순위로 33인 민족 대표가 서명날인한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후 거사 당일인 3월 1일 2시 종로 명월관지점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하다가 투옥되어 2년 6개월의 실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른 뒤 만기 출옥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중진 교역자들이 3.1운동으로 투옥되었기 때문에 남감리회나 미감리회 모두 한국인 담임목사들을 파송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오화영 목사는 출옥하자마자 1922년 5월 다시 수표교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가 그 해 9월 다시 종교교회 목사로 전임되었으며, 1925년 9월 개성 북부교회(1925~1927)를 거쳐 1927년 9월 다시 수표교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수표교교회에서 1년간 목회한 후 경성기독교중앙청년회관, 즉 YMCA의 종교부 간사가 되어 일하게 되었다.

1929년 광주학생독립만세사건 당시에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주요한, 의사 이용설, 목사 박연서 등과 자택에서 모여 사후대책을 강구하던 중 체포되어 두 번째 옥고를 치렀다. 1930년 9월 수표교교회를 사임함으로써 일단 목회일선에서 퇴임하였으며 이 사건으로 다시 검속당한 후 6개월 간의 옥고를 치르고 석방되었다.

1931년 다시 1년간 수표교교회 목사로 파송되어 시무한 후, 상동과 연화봉교회로 각각 1년간 파송되어 담임목사로 일하였다. 그 후 1935년에 수표교교회 담임목사로 다시 파송되었다가 1937년 중부연회에서 퇴회하여 수표교교회 본처목사가 되었다.

이후 농업에 종사하다가 1939년 흥업구락부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그 후 그는 해방 이전까지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가 1945년 8.15해방과 함께 정계에 투신, 그 해 8월 건국준비위원으로 피택되었고 조선민족당을 결성하여 당수로 피선되었으며, 여러 요직을 겸비하였다. 1946년 비상정치회의 위원, 비상국민회의 대의원 정무위원 및 외교협회 이사,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회장, 독립전취전국대회 회장 및 조선정치학관 관장, 조선정치대학 기성회장 및 조선통일총본부협의원, 남조선과도정부입법의원, 1948년 재단법인 조선정치대학관 이사 및 관장, 1949년 정치대학장들을 역임하면서 활발한 정치활동을 하였다. 1950년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으로 서울 종로구에서 당선 후 곧 6.25전쟁 때 공산당에게 피납되었다.

그는 북한에서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결성식에서 축사를 하도록 강요되었고, 조소항ㆍ안재홍 등과 함께 최고위원으로 동원되었으며, 상부위원으로 활약하도록 강요당했다. 1959년 별세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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