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사전]스웨어러(Wilbur C. Swearer, 1871. 2~1916.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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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06-07-0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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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감리회 선교사. 한국명 서원보(徐元輔)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에서 태어남. 엘리커니대학교를 졸업하고 드루신학교를 졸업하였다. 2년 동안 뉴욕신학교에서 연구과정을 수료하였다. 1898년 4월 한국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내한 후 주로 배재학당 내에서 활동하면서 삼문출판사 사장을 역임하였다. 1898년 11월에서 1900년까지 상동교회의 스크랜턴 선교사의 안식년 휴가 기간 동안 콥과 스웨어러 선교사가 차례로 담임을 하였고, 실제 목회는 이은승 전도사가 맡았다. 상동교회에 대한 스웨어러의 보고를 보면 상동교회의 성격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교회 교인 대부분은 가난한 이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굶어 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지난 겨울 동안 이러한 목적으로 모금한 돈이 30원입니다. 또한 교인 중 극빈자가 죽는 경우에는 그 장례비까지 대주어야 합니다. 이런 목적으로 쓸 돈 10~12원이 비축되어 있습니다.\"

1902년 6월 1일 스웨어러는 아펜젤러와 무어 감독과 함께 시흥에 있는 무지내교회 봉헌예배에 참석하기 위하여 자전거를 타고 갔다. 경부철도공사를 하던 일본인 노동자들이 선교사 일행을 러시아 첩보원으로 오인하고 행로에 트집을 잡아 아펜젤러와 스웨어러의 이마를 장작개비로 내리쳐 피투성이가 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즉시 서울로 돌아와 치료를 받아야 했으며 이 사건으로 항의를 받게 된 일본 공사관에서는 가해자 일본인을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하였다. 이는 아펜젤러에게 불행한 사건의 원인이 되어 결국에는 선박충돌 사고로 순직하게 되었다.

1903년 5월 서울 정동교회에서 미감리회 한국선교회 19차 연례회의에서 정동제일교회, 상동교회, 동대문교회와 아현교회를 묶어 서울구역을 구성하고 스웨어러를 담임목회자로 샤프와 최병헌, 전덕기를 협력목회자로 파송하였다. 최병헌은 정동제일교회, 전덕기는 상동교회, 스웨어러는 아현교회를 담당하였다.

1905년 충남 공주지방 선교사로 전임하였고 전도활동과 육영사업에도 전력하였다. 1907년 스크랜턴 관리자의 사회로 모인 한국선교연회에서는 한국을 서울, 제물포, 평양, 연안, 공주 등 5개 지방으로 분할하였는데, 그 중에 공주지방이 제일 큰 지방으로 부각되었다.

1907년 선교사 윌리엄즈와 안창호가 1주일간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사흘째 되는 날부터 통회 자복하며 많은 은혜를 받았다. 부흥회를 마친 후 교인들은 스웨어러와 김상배가 인도하는 매일 기도회를 가졌는데 그때 평양에서 강신화와 고정철이 내려왔다. 이들은 공주의 교인들을 위하여 노블 선교사가 파송한 전도인이었다. 두 사람은 다시 1주일간 부흥회를 인도하였는데 특히 평양 감리교회 부흥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던 \"숭실 학생\" 강신화의 설교를 듣고 공주 교인들은 또다시 절도ㆍ미움ㆍ문서 위조ㆍ근친상간ㆍ사기ㆍ협잡ㆍ간음ㆍ불효 등의 죄를 자복하였다. 그리고 평양 부흥운동과 마찬가지로 훔친 물건을 되돌려주고 해를 입힌 사람을 찾아가 용서를 비는 \"보상\" 행위가 이어졌다. 이와 같이 2차에 걸쳐 20여 일 간 지속된 부흥운동으로 공주 교인들은 \"서로 화해하고 죄를 씻은 후보다 새롭고 고귀한 삶을 살기 시작했다\"고 스웨어러는 기록하였다.

1903년 6월부터 1904년 12월까지 무스(J.R. Moose)와 함께 〈신학월보〉 사장으로 선임되어 문서사업에도 크게 활동하였다. 1916년까지 근속하다가 건강을 잃어 귀국하였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편 1906년 결혼한 그의 부인(May Shattuck, 徐思德)도 미국에서 신학교 및 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다년간 뉴욕여자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미국 알피온 주립 사범학교 교사로 재직중 외국 선교사로 헌신을 결심하고, 1906년 한국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한국으로 와서 충남 공주지방 선교사로 부임하였다. 영명여학교 교장으로 1929년까지 근속하면서 육영사업에 전념하였으며 1940년 귀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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