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사전]박현숙(朴賢淑, 1896~1980. 12. 31)

인물사전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6-07-0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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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9
정치인

평안남도 평양에서 박정규(朴貞圭)의 8남매 중 2녀로 출생. 어머니 최광명(崔光明)에 이끌려 5세 때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여 정진소학교를 졸업하고 15세 되던 해 숭의여학교에 입학하였다.

1913년경 숭의여학교의 상급반 학생들로 \"송(松)형제회\"가 먼저 조직되었다. 숭의여학교 교사 황대덕이 같은 교사 이효덕과 김경희의 동조를 얻어 비밀결사를 조직하기로 하였는데 각 지방의 대표를 선발하였다. 평양에서는 대표 박현숙을 비롯하여 송복신, 목포에 최자혜와 박경애, 선천에 김옥석과 황성도, 제주에 홍마태와 홍마리아, 부산에 서매몰 등이 중심 구성원이었다. 이 송형제회 회원들의 추천에 의해 (주로 하급반) 학생들이 별도로 \"죽(竹)형제회\"를 조직했다. 채광덕, 이마대, 최의경 등이 중심 인물이었다. 이 둘을 합해 \"송죽형제회\"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 형제회 회원들은 생일잔치로 위장하고 매달 15일을 기해 1회 모임을 갖고 회비를 모아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했으며 군자금조달을 위한 행동방안으로서 엿장수, 떡장수로 변장하고 거리에서 행상을 하기도 하였다. 자수로 또는 머리채를 잘라 팔아서 군자금에 헌납하는 회원도 있었다.

그 후 1915년 숭의여학교를 졸업한(제6회) 박현숙이 기전여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7년 4월 다시 모교로 돌아와 교사로 부임하였는데 김경희 선생의 뒤를 이어 송죽결사대 회장으로 선출되어 상해 임시정부를 돕는 지하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사실은 독립만세사건 준비도 거의가 송죽회 회원들에 의해서였다.

송죽결사대를 중심으로 형성된 여성운동 세력은 평양의 3.1운동 중심세력으로 그대로 연결되었다. 이들의 지하운동이 조금씩 알려지게 되자 평양 남산현교회 목사인 신홍식에게 3.1운동에 참가해 달라는 정식 요청을 받기에 이르렀고 이를 기꺼이 받아들인 송죽결사대 회원들은 태극기 제작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3월 1일 평양의 숭덕학교, 장대현교회, 남산교회, 박구리교회 등에서 동시에 일어난 만세운동은 평양 전체를 뒤흔들었으며 이때 박현숙은 할머니 복장으로 변장하여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었다. 일경의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혈성가\"를 대담하게 불러 독립의 기개를 굽히지 않았던 그는 1년형의 징역 언도를 받고 복역중 8월 하순 병보석으로 출옥하였다.

출옥 후 독립운동가 김성업(金成業)과 결혼하였으며 이후 가정주부로 가정을 꾸려나가는 한편 독립운동자금 모금에 계속 투신하여 그 해 11월 평양을 중심으로 대한애국부인회가 조직될 때 그는 평양감리교회 지부 부회장으로 참여하여 지하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이 조직이 일경에 탐지되어 1920년 10월 다른 임원과 함께 체포되어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1924년 집행유예로 출옥하였다.

건강을 회복하자 평양 숭혜(崇慧)여학교 교감으로 취임, 교육에 종사하는 한편 평양YWCA 회장이 되어 문맹퇴치, 농촌사업 등을 통한 부녀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일제 말기인 1939년 2월 세계여성기도일에 사용할 기도문이 반전적(反戰的)이라는 이유로 또다시 일경에 검거되어 1개월 가량 구금되기도 하였다. 그 동안 남편인 김성업은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1937년에 검거되어 5년 징역형을 언도받고 서대문감옥에 복역하는 중이었다. 1945년 여름 남편이 병보석으로 출감하자 평양을 떠나 서울로 옮겼다가 8.15해방 직전 평양으로 귀환하였다.

1915년 숭의여학교를 졸업한 그는 기전여학교 교사로 초빙되어 전주로 이사하였다. 기전여학교에 부임하자마자 생활로 학생들의 모범이 되어 그를 따르던 임영신, 오자현, 송귀내, 유채룡, 오순애 등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공주회\"를 조직 신앙생활과 역사공부를 통한 민족운동의 요람이 되게 하였다.

공주회(公主會, King Daughter\'s Circle)는 1909년 이화학당 학생들이 학당의 정기예배만 가지고는 신앙심을 북돋우는 데 부족하다고 느끼고 자치적으로 만든 단체였다. 이 공주회는 다른 지역의 학교에서도 만들어졌는데 1915년에는 영변의 숭덕여학교와 평양의 숭의여학교에서도 만들어졌다. 숭의여학교는 1915년 당시 미감리회의 딜링햄(G.L. Dillingham)이 교사로 있으면서 공주회를 지도하였다. 당시 평양 전도사업을 책임지고 있던 베네딕트(R.E. Benedict)의 보고다.

\"매주일 아침 교회 예배가 시작되기 1시간 30분 전에 기숙사에 있는 학생들이나 집에 있는 학생들이나 모두 우리(선교사) 사택에 모여 찬송과 기도, 간증으로 이루어지는 예배를 드립니다. 참석자들은 한번 오면 도중에 나가는 법은 없습니다. 학생들은 자기 잘못을 숨김없이 고백하고 마음의 체험을 진술하며 열심히 기도하고 친교를 나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 이런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 학교 학생들이 아름다운 그리스도 품성을 이루어 나가는 데 더 없이 좋은 은총의 도구입니다. 저 자신만 하더라도 공주회 모임에 참석해서는 은혜를 받지 않은 적이 없을 정도입니다.\"

평양 숭의여학교를 다니는 동안 송죽회 활동을 하면서 역시 숭의여학교에 조직된 공주회에 참석하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는 기전여학교에 부임하여 그가 경험한 공주회를 조직하여 신앙생활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던 것이다.

해방이 되자 그는 조만식을 위시한 애국동지들과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고 1946년 신탁통치안이 가결되자 조만식, 이운영, 김병연 등과 함께 소련군사령과 스치코프를 방문하여 신탁통치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모든 것이 뜻을 이루지 못하자 월남하였다. 이후 이승만과 함께 정치 일선에 참가하여 민족통일본부 여자부장, 입법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58년에는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 전국 여성단체 최고위원, 3.1여성동지회 회장, 서울 적십자사 자문위원장, 대한부인회 부총재 등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에는 서울에 \"송죽원\"이란 고아원을 설립하였으며 1953년에는 숭의여학교를 서울에서 재건하고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63년 대통령 표창을 받은 그는 남산교회 장로로 봉사하다가 1980년 마지막 날 서울에서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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