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사전]매클레이(Robert Samuel Maclay, 1824. 2. 7~1907.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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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0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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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선교의 양부. 한국명 맥이가(麥利加)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콘코드에서 9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840년 15세 되던 해 집 근처에서 열린 부흥집회에 참석하여 참 신앙과 소명을 깨닫고 복음 전도를 위해 헌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1840년 9월 펜실베이니아 주 디킨스대학(Dikeson Collage)에 입학하였고 스캇 목사(Rev. L. Scott)와 바우만 목사(Rev. T. Boeman)의 감화를 받으며 공부하였다. 예과 2년 과정을 1년 만에 마치고 다음해 9월 본과 1년에 진급하였고, 1845년 7월 10일 본과를 졸업하였다. 대학 졸업 후 펜실베이니아 중앙교구로 임명을 받아 6개월간 예비 교역자로 일한 후 볼티모어연회에 집사목사로 천거를 받고 게데스부르그교회 부목사로 임명을 받았다.

1847년 2월 모교의 학장 에모리(R. Emory) 박사의 간곡한 권유와 주위 사람들의 조언으로 매클레이는 중국 선교를 하나님의 뜻으로 확신하고, 1847년 9월 10일 햄린 감독(Bishop Hamline)에게 중국 선교사로 임명받았다. 이후 1872년까지 25년간 중국 푸저우(福州)에서 선교사로 헌신하였다. 1872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미감리회 총회에서 아직 선교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일본에 선교하기로 결의하였고, 중국에서 많은 선교사업의 경험을 쌓은 매클레이가 일본 주재 선교사로 선임되었다. 1873년 6월 11일 초대 일본 선교사로 부임하여 1879년 미감리신학교를 창설하여 후에 에이와(英和)학교, 아오야마(靑山)학원으로 발전시켰다.

1884년에는 한국을 방문하여 미감리회가 한국에서 교육\"의료사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획득했기에 \"한국 선교의 양부\"로 추앙받게 되었다. 한국 선교의 계기는 1883년 9월 13일 위싱턴행 기차를 탄 가우처(J.F. Goucher) 목사가 한국 견미 사절단을 만나 대화를 나누던 중 한국에도 선교를 해야 한다는 결심을 굳히면서 시작되었다. 가우처 목사는 즉시 미감리교 해외선교부에 한국 선교기금으로 5천 달러를 보내면서 한국 선교를 제의하였다. 감리교 해외선교부는 1884년 1월 선교부 총회를 열고 정식 가결하는 동시에 한국 선교 답사금으로 가우처 목사가 보낸 5천 달러를 일본 선교 기금에 편입시켜 주었다. 그리고 선교부에서는 일본 주재 미감리교 선교 책임자 매클레이 목사에게 \"가능하면 한국을 답사하여 선교 여부를 타진해 보라\"는 편지를 보냈으며, 가우처 목사도 매클레이에게 같은 뜻의 편지를 보냈다. 더욱이 푸저우에서 선교사업을 하던 중, 배가 부서져 간신히 목숨을 건진 한국인을 본 매클레이는 저 나라에도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런 중에 한국 선교에 관한 편지를 받았으니 이를 하나님의 뜻으로 여겨 기쁘게 받아들였다.

매클레이는 1884년 6월 19일 일본 나가사키(長崎)를 떠나 부산, 제물포를 거쳐 24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가 도착했을 때 한국의 정세는 불안했으나 다행히 일본에서 가깝게 지내던 김옥균(金玉均)을 만나 그의 방문 계획을 원만히 수행할 수 있었다. 7월 3일 매클레이는 김옥균에게 고종이 \"교육과 의료사업\"을 시작해도 좋다고 허락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매클레이에게 선교사업 윤허를 내린 고종은 미국 공사 푸트(L.H. Foote)에게 그 사실을 정식 통고하였고 푸트 공사도 그 해 9월 1일 미국 장관에게 교육 및 의료사업에 관한 고종의 윤허 내용을 보고하였다. 그 보고문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 지난 7월 다녀간 동양에 유하면서 선교사업에 종사하던 신학박사 매클레이가 조선을 방문하였는데 그 목적인즉 할 수 있으면 교회학교와 병원을 설립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이 경성에 유하는 동안에는 본 공사관의 빈객으로 있었는데 그 방문한 목적에 대하여 자유스럽게 토의하였다. 한국 정부에서는 그 사업에 대하여 별로 반대함이 없을 뿐 아니라 그가 일본으로 귀환한 후에 한국 대군주 폐하께서 미감리교회가 경성에서 교회학교와 병원을 설립하는 일에 지장 없게 할 뿐 아니라 은연중에 권장하시겠다고 보증하는 말씀까지 해오셨다. ……\"

매클레이는 선교사가 거주하고 일할 수 있는 선교부 대지를 물색하였고, 주한 미국 공사 푸트에게 공사관 인근 언덕을 매입해 달라고 부탁하고 7월 8일 서울을 떠났다. 일본으로 돌아간 매클레이는 미국 선교본부에 한국 선교사로서 교사 1명과 의사 1명을 청원하였고, 그 청원에 의하여 교사로 아펜젤러 목사 부부, 의사로서 스크랜턴 부부, 그리고 여성교육으로 스크랜턴 대부인이 선택되어 한국에 정착하게 되었다. 매클레이는 이미 한국인으로 일본에 와서 마가복음을 번역한 바 있는 이수정에게 부탁하여 감리교 교리문답 교본을 한글로 번역하도록 하였고, 아펜젤러 목사가 일본에 도착할 무렵에 1천 부를 발간해 놓도록 일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한국 기독교 선교의 문을 연 사람은 매클레이 목사였다. 매클레이는 이와 같은 사실을 자신이 쓴 \"1884년 한국 서울에서의 2주간\"(A Fortnight in Seoul Korea in 1884)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한국 선교가 역사적으로 문이 열린 것은 미감리교회의 역사적인 100주년과 같은 해가 된다. 미국 감리교회의 조직은 1784년이었고 한국 감리교의 선교의 문빗장이 열린 것은 1884년이다. …… 한국 선교에 필요한 보조금을 자진해서 헌금한 볼티모어시의 가우처 박사의 재빠른 한국 선교 제안은 우리 교단에 의해 진지하게 토의 수락되었으며 나의 서울 방문은 이 제안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이 한국에서 기독교 선교의 첫 문을 열고 주춧돌을 놓은 귀중한 특전이었는데 그 특전을 내가 차지한 것이었다. 그로 인해 1885년 서울에 선교사를 보내 선교부를 조직하게 되었고 거룩한 복음사업에 돌입했던 것이다. ……\"

매클레이는 1888년 귀국하여 캘리포니아 주 페르난도에 있는 매클레이대학 신학부장으로 후배 양성에 헌신하다가 1907년 8월 18일 별세하였다.

-논문:\"Korea\"s Permit to Christianity,\"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Apr. 1896;\"Commencement of the Korea Methodist Episcopal Mission,\" The Gospel in all Lands, Nov. 1896;\"A Fortnight in Seoul Korea in 1884,\" The Gospel in all Lands, 1896.

-참고문헌:윤춘병, 《한국 선교의 문을 연 맥클레이 박사의 생애와 사업》, 한국기독교문화원,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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