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사전]류형기(柳瀅基, 1897. 11. 17~1989.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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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0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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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북도 영변에서 출생. 1906년 영변숭덕학교에 입학하여 고등과 2년까지 마치고 1914년 평양 숭실중학교에 진학하였다가 서울 배재학당으로 옮겨 한 학기 동안 공부한 후 다시 평양 숭실학교로 편입하여 1916년 졸업하였다. 1917년 숭실대학에 입학한 후 1년 만인 1918년 3월 일본에 유학, 아오야마학원을 거쳐 1921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1923년 오하이오 주 웨슬리안대학 문학부를 졸업하였고, 1926년 보스턴대학교 대학원을, 1927년에는 하버드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감독직을 마치고 1960년 성경주해(전4권) 저술을 계획한 후 성경의 새로운 해석학과 편집방침 그리고 새로운 자료를 구하기 위해 미국 유니온신학(1960~1961), 독일 하이델베르그대학(1961~1962), 영국 옥스퍼드대학(1961~1962) 등에서 연구한 바도 있다.

류형기 목사는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1927년 8월 25일 결혼하였다. 신부는 신줄려(Julia), 한국 이름은 신형숙이었다. 1898년 12월 23일 경기도 가평에서 출생한 부인 신형숙은 1927년 김활란 씨보다 이화를 1년 먼저 졸업한 후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3.1운동에 연루되어 1년 징역에 3년 집행유예의 선고를 받고 출감한 독립투사였다. 그 후 북경대학에 유학하여 1년을 수료한 후 도미하여 웨슬리안대학을 마쳤으며 결혼한 그 해 류 목사와 함께 서울로 오게 되었다.

1927년 겨울에 귀국한 류형기 목사는 곧바로 감리교총리원 교육국 청년부 간사로 취임하여 활동하였다. 1933년 교육국 김준옥 총무가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장으로 전임되어 가자 그의 후임으로 교육국 총무에 취임하여 이때부터 교단 커리큘럼과 교재 준비 및 제공, 프로그램 작성 등 다방면에 걸친 종교교육사업을 전개하였으며, 1934년 선교 50주년을 기념하여 《단권 성경주석》을 출판하였다.

1941년 10월 정춘수 감독이 감리교 혁신교단을 만들고 총리원 기구를 개편할 때 총리원에서 퇴직당하기까지 14년을 몸담아 일함으로 젊은 시절을 다 보냈다. 그러나 1941년 감리교 혁신안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목사직 파면을 당한 후 동대문부인병원 회계과장이 되어 아현동에서 전차를 타고 출퇴근했다. 당시 연희전문학교 문과과장을 지낸 백낙준 박사도 연전에서 쫓겨나 동대문 밖 우마차조합에 취직하여 출퇴근을 하였는데 때때로 류 박사와 백낙준 박사가 전차에서 만났다.

8.15해방과 더불어 그는 미군정청으로부터 국내에서 가장 큰 인쇄소, 즉 \"조선인쇄주식회사\" 관리책임을 맡기로 하고 이를 맡아 운영하면서 출판사업에 전심하였는데 교육국에 14년간 있으면서 번역 또는 저술하였던 도서를 거의 재판 삼판씩 출판하여 해방 후 기독교 서적의 성황을 이루어 놓기도 하였다. 당시 그는 홍현설 송정률 안병무 마경일 등의 젊은 목사들과 안신영의 협조를 얻어 《한영사전》, 《영한사전》, 《철학사화》 등을 출판하였다. 류 박사는 출판사업에서 번 돈으로 미국에 유학간 젊은 목사들의 가정에 생활비 도와주기, 감리교신학교 경비 또는 연회 모일 때의 비용 등 자신이 쓰기보다 남을 도와주는 일에 다 썼다. 같은 해 웨슬리안신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음과 동시에 감리교신학교 제9대 교장(1948~1953)으로 취임하였다.

1950년 6.25전쟁으로 인하여 김유순 감독이 납북되자 그 해 11월 기독교대한감리회 총리원 운영위원장을 거쳐 1951년 감독으로 피선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피난민 구제사업과 교회 복구사업에 전력투구하였고 감독추천기금으로 4백여 교회를 재건하였다. 그는 7년 동안 재임하면서 일제와 6.25전쟁으로 파괴된 감리교회를 재건하여 한국 감리교회의 중흥시대를 만들어 놓기도 하였다. 또한 그 해(1951) 보스턴대학교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1958년 10월, 감독 생활을 마치고 은퇴, 미국에 거주하였다.

그 후 《성경사전》, 《성경주해》(전4권)를 위시하여 별세할 때까지 \"양서를 헐값에\"라는 표어 밑에 교회 서적을 번역 출판하는 데 총력을 쏟다가 그 붓을 잡은 채 눈을 감았다.

8.15해방이 오자 미국 유학생들은 모두 한자리씩 얻어 출세하는데 그는 고작 미군정청에 들어가 유창한 영어로 부탁한 것이 조선인쇄소를 자기에게 맡겨달라는 것이었다. 그때 일을 그는 아래와 같이 회상하였다.

\"코리아타임즈 간부들은 한달동안 미군을 위해 무보수 통역봉사 후에 이묘묵 박사가 하지중장의 통역관으로, 정일형 박사가 인사과장으로, 오천석 박사가 문교부로, 백낙준 박사가 서울대학으로, 최규남 박사가 연세로, 하경덕 박사가 서울신문사로 가고, 나는 자원해 봉내정에 있는 조선인쇄주식회사 관리인이 되었다. ……\"

류형기 목사의 일생은 좋은 책을 저술하고 출판시키기 위한 삶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의 일생은 책으로 일관되어 있다.

\"…… 삼십일만 참아 주시면 구약을 마치고 갈터인데 이자식 데려다 뭘하시려고 다려가렵나이까. 그러나 그것이 당신의 뜻이면……\" 눈을 감기 며칠 전 병원 침대에서 쓰다가 손이 떨려 더 못 쓰고 붓을 놓은 마지막 글이다.

-저서:《구약문학개론》, 1932;《신약문학개론》, 1932;《기독교의 진수》, 1933;《단권 성경주석》, 1934;《가정예배서》, 1936;《영어회화》, 1945;《영한사전》, 1946;《한영사전》, 1946;《영한대조 신약전서》, 1948;《철학사화》, 1956;《세상의 소망》, 1956;《믿음\"소망\"사랑》, 1957;《성서사전》, 1960;《성서주해》, 1968;《세계인명대사전》, 1973;《신약시대 역사와 외경개론》, 1977;《영력의 사람 바울》, 1978;《십이제자ㆍ일곱사도 탐문기》, 1978;《요한 번연》, 1978;《성 프랜시스》, 1978;《기독교회사》, 1979;《아브라함 링컨》, 1980;《성탄이야기 101편 명상 설교집》, 1981;《성 어거스틴》, 1983;《은총의 팔십오년 회상기》, 한국기독교문화원,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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