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사전]벙커(Annie Ellers Bunker, 1860. 8. 31~1938.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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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05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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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감리회 여선교사. 한국명 방거부인(房巨夫人)

엘러즈 벙커는 미시건 주 버오크에서 장로교회 목사의 딸로 태어났다. 1881년 일리노이 주 록포드대학을 졸업하고 페르시아 선교사로 갈 계획으로 보스턴에 있는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의료선교사로서의 자질을 닦던 중 한국에서 활동하던 북장로회의 알렌(H.N. Allen)에게서 의료선교사로 와 달라는 청탁을 받고 페르시아 선교를 한국 선교로 바꾸게 되었다. 1886년 7월 육영공원 교사로 부임하는 벙커(D.A. Bunker), 길모어(G.W. Gilmore) 부부, 헐버트(H.B. Hulbert)와 동행하여 내한한 그는 제중원에서 알렌을 도와 의료선교에 착수하였다. 엘러즈의 도착으로 제중원 안에 부녀과가 신설되었고 여자들도 서양의술과 기독교적 선교의 대상이 되었다. 처음엔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로 파송되었으나 미감리회 선교사 벙커와 결혼한 후 미감리회로 옮겼다.

한국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명성 황후가 병이 들었다. 당시 고종 황제 시의(侍醫)였던 알렌의 투약치료가 별 효험이 없자 직접 진찰을 위해 여성인 엘러즈가 추천을 받아 궁내에 들어가 명성 황후를 치료하였다. 이 일로 그는 궁내의 신임을 받아 왕비 전속 시의로 발탁되었다. 이듬해 엘러즈는 육영공원의 교사였던 벙커와 결혼했으며, 이후 일생을 남편과 함께 선교에 바쳤다.

그는 또한 한국에서 최초의 장로교 여학교를 세운 공적을 남겼다. 1887년 6월 제중원 사택에서 다섯 살 난 여아(정례)를 데려다 글을 가르친 것이 발전하여 정동여학교가 되었고, 이것이 오늘의 정신(貞信)여학교가 되었다. 남편이 1894년 육영공원을 그만두고 배재학당으로 옮긴 것을 계기로 부부가 함께 미감리회 선교사가 되었으며 이후 그는 남편을 도와 선교활동을 계속하였다. 특히 한국YWCA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고 그 창설에 협력하여 5천 엔을 창립기금으로 희사하였고, 사업에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1926년 선교사직을 은퇴하고 남편과 함께 귀국하여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던 중, 1932년 남편이 별세하자, 남편의 유언에 따라 유골을 양화진에 안장하였다. 그는 1937년 재차 내한하여 소래에 머물렀고, 이듬해 10월 8일 서울 정동 그레이하우스에서 별세하였다. 감리교 제3회 총회가 열리고 있던 10월 12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원한경 박사의 주례로 장례식을 거행하고 경성화장장에서 화장한 후 유골을 남편이 묻혀있는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안장하였다.

-논문:\"My First Visit to Her Majesty the Queen\", The Korean Repository, Vol. II, 1895;\"Personal Recollections of Early Days\", The Korea Mission Field, 1934;\"Early Personal Recollections\", The Korea Mission Field, Vol. 31, No. 4, 1935;\"Early Memories of Seoul\", The Korea Mission Field, Vol. 34, No. 2,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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