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제59강: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심(9:14-29) <b>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12-03-29 10:39
조회
984
그 아이의 아버지의 계속된 대답에 대해, 마가는【22】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라고 하였다.

세상적인 관점으로는 쓸모 없는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그 아들에게 전심 전력을 쏟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헨드릭슨(W. Hendriksen)은 “여기서 아버지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 아들이 불이나 물에 자주 던져진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를 죽이려고 하는 악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이 사악한 살인마에게 붙들려 있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자식의 상태가 절망적이기는 해도, 그 아버지는 완전히 절망하지는 않았다. 그는 실낱같은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예수께서 자기 아들을 돕고 싶어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였다. 문제는 예수께서 과연 하실 능력이 있으신가 함이었다”(W. Hendriksen). 그래서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이라고 한 것이다. 아마 제자들의 실패를 보았기 때문에 한 말일 것이다. 이 점에서는 1:40의 나환자가 말한바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와 좋은 대조가 된다.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충분한 믿음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고 하여, 고민거리밖에 안 되는 아들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놀라운 부성을 보이고 있다(비교: 마 15:22, 25).

여기에 사용된 도와 주옵소서(부정과 능동태 명령법 이인칭 단수형인 보에테손, βοήθησον)는 보에(βοή: 부르짖음)와 테오(θεώ: 달려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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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성어이며, “그 낱말이 사용된 어떤 문맥을 보더라도, 그와 같은 요청은 주님 또는 어떤 능력 있는 조력자가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달려가서 도와주게 될 만큼 성실하고도 감동적인 요청을 의미한다(마 15:25, 행 16:9, 21, 28, 고후 6:2, 히 2:18, 계 12:16)”(W. Hendriksen).

예수님의 답변에 대해, 마가는【23】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라고 하였다.

예수님이 재빠르게, 그리고 극적으로 아이의 아버지를 공박하시는 것을 보면 상당히 흥미가 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는 아이의 아버지의 말을 다시 받아서 그의 반신반의하는 태도를 책망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아이를 고치시기 전에 철저한 믿음을 갖지 못한 아버지의 태도를 바로잡으시려는 의도를 드러내신 것이다. 헨드릭슨(W. Hendriksen)은 “사실상, 주께서는 ‘문제는 내가 할 수 있느냐 함이 아니라, 내가 믿느냐 함인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닐카(J. Gnilka, 하권, p. 68)는 “믿는 자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기 때문에 모든 제한을 극복한다. 이로써 하느님의 전능에 관한 진술(참조: 10:27)이 믿는 자에게 옮겨진다(참조: 11:23). 누구의 신앙이 언급되는가 하는 문제가 성립한다. 예수는 아버지의 신앙 없고 회의적인 부탁에 대해 자기 신앙의 능력을 대비시키는 것인가? 아니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신앙에로 아버지를 촉구하는 것인가? 양자를 모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 기적 설화의 취지는 예수의 존귀한 계시에 있지만, 인간의 신앙이 예수에게서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예수의 행위, 또한 예수의 신앙에서 불붙게 된다는 것이 마르코의 의도라고 볼 수 있다(참조: 11:12-14, 14:20-22). 아버지가 아니라 예수가 신앙의 모범이다. 예수만이 믿는 자의 전능에 관한 진술을 할 수 있다. 그만이 이 신앙을 허락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아버지의 반응에 대해, 마가는【24】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라고 하였다.

즉각적인 아버지의 부르짖음은 마음에 가득한 비통을 드러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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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D. W. Burdick, E. Schweizer).

말씀의 빛 안에서 마음의 문이 열린 그는, 비로소 자신의 믿음이 믿음이라고 할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순간,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먼저 믿음을 표명하고, 뒤이어 불신앙을 표명하고 있다. 이것은 논리적으로는 모순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모순이 아니다. 이 점에 대해, 칼빈(J. Calvin)이 잘 설명하고 있다. “모순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어느 곳에도 완전한 믿음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도 부분적으로는 불신자이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적은 분량의 믿음 때문에 우리를 믿는 자로 여기신다. 우리는 남아 있는 불신의 조각들을 제거하기 위해 투쟁해야 하며, 주께 바로잡아 달라고 요청해야 한다.”1)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의 사랑의 기적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갖춰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바로 그것 곧 온전한 믿음을 요구하였다(참조: 엡 2:8, 마 16:16-17, 고전 12:3 후반). 이러한 참 신앙에 대해, 바르트(K. Barth in 마경일)는 “인간은 결국 인간의 한계를 돌파하여 신앙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다. 신앙이 인간적 가능성일 때에 그것은 미신과 같은 계열에 속한다. 인간이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할 때, 그 신앙은 결국 하나님의 선물이어야 한다.”라고 설명하였다.

아이의 아버지가 절실한 고백을 하고, 또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을 보신 예수님은 드디어 귀신에게 나오도록 명하셨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25】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라고 하였다.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는 이미 모여든 군중(14, 15절) 외에도 또 다른 무리가 뛰어서 모여드는 것을 보셨다는 뜻이다.2) “이 군중이 모인 것은 아이의 새로운 발작이 군중의 호기심을 자극했기 때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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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조: W. W. Wessel, 山口 昇, 이상근.
2) E. P. Gould, W. W. Wessel, F. C. Grant, W. Hendriksen, 黑崎幸吉, 마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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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심리학적 설명”(Theiβen)1)은 받아들일 수 없다. 군중이 달려 모인 이유는 예수님이 그 곳에 계신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단순한 기적 행위자로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예수님은, 수많은 무리가 모여드는 것을 보시고는 서둘러 아이를 고쳐 돌려보내려고 하셨다.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는 감히 거역할 수 없는 예수님의 영력이 담긴 책망과 명령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의 호칭은 더러운 귀신이 아이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고(F. C. Grant, W.Hendriksen, W. W. Wessel), 명령은 인간을 지배하는 더러운 귀신에 대한 예수님의 신적 권위를 보이시는 것이다.

언제나 그런 것처럼, 여기서도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라고 하신 단호한 명령은, 그 귀신에게는 절대로 거역할 수 없는 신적 권위의 표현인 반면에, 그 부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신적 사랑의 표현이다.

예수님의 명령을 들은 귀신의 발악에 대해, 마가는【26】귀신이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라고 하였다.

귀신이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에 대해서는 1:25-26의 주석을 보라.

귀신이 쫓겨나가자 그 아이는 죽은 것 같이 조용해졌고, 또 그 얼굴이 창백해졌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그 아이가 죽었다고 말하였다.

예수님은 아이를 고쳐 주셨을 뿐만 아니라, 일으켜 세워 주셨다. 이 사실에 대해, 마가는【27】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라고 하였다.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는 예수님이 치료하실 때에 자주 취하신 태도이었다(1:31, 5:41, 마 14:31. 막 1:31의 주석을 보라).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를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실 것과 관련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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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J. Gnilka, 하권, p. 69, 주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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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학자들(E. Schweizer, W. W. Wessel, J. Gnilka, 하권, p. 69)이 있으나, “이 경우 그와 같이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된다”(山口 昇). 여기서는 단순히 예수님이 그 아이를 일으키시자 그 아이가 힘을 얻어서 스스로 일어선 것을 묘사한 것이다. 예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

귀신들렸던 아이를 구원하신 예수께 제자들이 질문한 것에 대해, 마가는【28】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라고 하였다.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에게서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부여받았고(6:7, 마 10:1), 또한 성공적으로 수행하기도 하였다(6:13, 30). 그런데 이번 경우에는 실패한 제자들이 예수께 그 이유가 무엇인지 조용히 질문하였다.

예수님의 답변에 대해, 마가는【29】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라고 하였다.

아홉 제자들의 실패의 원인은 기도의 결핍이었다. “분명히 그 아홉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 자기들에게 주어진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을 것이거나, 혹은 귀신을 쫓는 능력이 원래 자기들 속에 잠재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귀신을 쫓는 일에 있어서 더 이상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았다. 즉, 기도로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W. W. Wessel).

많은 교인들이 일단 하나님에게서 은사와 능력을 받으면, 언제나 내재 또는 잠재되어 있어서 아무 때나 발휘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교인 또는 교인의 기도나 경건 생활 자체에 하나님의 은사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사나 능력이 제공되거나 발휘되는 방편이다. 그러므로 교인은 늘 기도에 힘써야 한다.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1)라고 권면하였다.

마태는 그 실패의 원인을 믿음이 적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마 17:20). 물론, 두 기사는 서로 상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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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필자의 데살로니가전서 5:17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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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존과 신뢰로 이해되는바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엡 2:8)에는 반드시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가 따르게 마련이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란 반드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전제하는 것이다(11:23-25).

많은 사본들(P45vid, אb, A, C, D, K, L, W, Χ, Δ, Θ, Π, Ψ, ƒ1)에는 ‘기도와 금식’(προσευχῇ καὶ νηστεία)으로 되어 있으나, 기도(프로쉬케, προσευχῇ)로 되어 있는 사본들(א*, B)1)이 더 유력하다는 점과 “마가에 보여지고 있는 예수님의 견해로는 금식을 그렇게 중요한 것으로 보고 계시지 않으므로(2:18-20), 이 말씀이 본래 예수님에 의하여 말해졌을 때, ‘금식’이라는 말이 있었다고는 생각되어지지 않는다”(山口 昇)는 점을 보아, 금식이라는 말은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의 이런 유는 귀신의 세계에 차이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어떤 귀신은 다른 귀신들보다 더 능력이 있고, 더 사악하다는 것이다”(W. Hendriksen). 그러나 그 어떤 귀신이라 할지라도, 전능하신 주님 예수의 능력을 믿고 끈질기게 기도하는 이들 앞에서는 쫓겨갈 수밖에 없다. 사랑의 주님 예수는 항상 우리를 이기게 하신다(고후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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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K. Aland, et al., ed.
2) 필자의 고린도후서 2:14의 주석을 보라.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절기 설교집 외 20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T. 426-3051



전체 1

  • 2012-04-19 12:36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란 반드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말씀 내려 주심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필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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