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활동
복음으로 어두움을 깨우는 교회 (1884 - 1903)

sub04_01_img1884년 6월 맥클레이의 입국으로부터 시작된 감리교회는 이듬해 4월 5일 아펜젤러선교사 부부와 스크랜턴 선교사 부부 그리고 스크랜턴의 어머니가 제물포항에 발을 내딛음으로 본격적으로 선교에 착수하였다. 이들은 정동에 기지를 마련하고 각각 교육사업과 의료사업 그리고 여성교육사업을 시작하였다. 이 민족의 고난기에 들어온 감리교회는 교육과 의료사업을 통해 민족을 섬기며 성장하였다.
병원을 세워 수많은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었고, 학교를 세워 근대국가에 필요한 인재를 공급해 주었다. 이런 헌신적인 섬김의 자세를 보고 한국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어 1887년 10월 9일 정동에서 최초의 감리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그 후 복음은 북쪽으로는 평양, 동쪽으로는 원산, 서쪽으로는 제물포에 각각 선교기지를 마련하여 이곳을 중심으로 감리교회가 퍼져나가게 되었다. 교회는 가는 곳마다 매일학교를 세웠다.

매일학교를 통해 교회는 가장 기초적인 국민교육을 감당하는 한편, 유교경전 대신 성경을 가르쳐 선교의 지평을 확장시켜 나갔다. 또 서울에 복음전파를 위한 출판사를 세워 기독교서적과 국민계몽을 위한 많은 책을 출판함으로 우리 나라 출판문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복음이 전파됨에 따라 많은 인재들이 입교하여 교회를 통해 만민평등사상과 주권재민사상을 배움으로 이 나라 독립을 위한 꿈을 간직하며 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야말로 복음을 통해 이 땅의 어두움을 물리치려는 열정을 가진 젊은이들이 많이 입교하였다.

이들 중에서 1901년 한국교회사에서 최초로 두명의 한국인 목사가 탄생하였는데 그들의 이름은 김창식, 김기범이다.

하나님사랑과 나라사랑을 실천하는 교회 (1903 - 1930)
선교50주년 기념식을 마치고 선교사와 한국인 사역자(1930년대)

선교50주년 기념식을 마치고 선교사와 한국인 사역자(1930년대)

1903년 원산의 하디 선교사에서 시작된 부흥운동은 전국의 모든 교회에 영적인 부흥운동을 일으켜 한국 교회 성장의 기폭제가 되었다.교파의 구분 없이 전국 교회로 운동이 확산된 이 운동은 1907년 평양의 부흥운동으로 절정에 도달하였으며 자연히 교회연합운동으로 이어지는 결실을 보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한국감리교회 사역자와 교인들은 뜨거운 전도열을 가지고 곳곳에 교회를 세웠다. 한편 감리교인들은 일제의 침략에 맞서 열렬히 구국운동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는 상동학원을 개설해 청년들에게 나라사랑의 정신을 심어주는 한편 다른 동지들과 힘차게 구국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때 상동교회에는 구국의지에 불타는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는데 이들은 한국 근대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위대한 선각자가 되었다. 이러한 나라사랑의 전통은 3.1운동으로 계승되었다. 3.1운동에는 민족 지도자 33인 중에 감리교인이 9인이었고, 그 밖에 많은 감리교인들이 각 지역의 운동을 주도하였다.

고난당하는 교회 (1930 -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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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남북 감리교회가 각각 갈리어 들어 왔던 감리교회는 선교초기 부터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를 공동으로 운영하는 등 서로의 협력을 모색하여 오다가 1930년 12월 2일 서로 합동하여 자치교회인 기독교조선감리회를 조직하고 한국인 스스로 교회를 치리하게 되었다. 이 총회에서는 최고의 영적, 행정 지도자로 양주삼 총리사를 선출하여 한국 감리교회를 이끌어 나가게 되었다. 한편 이용도 목사는 기도운동, 부흥운동을 일으켜 한국 교회에 새로운 활력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말 일제의 압력에 따라 한국감리교회는 완전히 변절되고 말았다.

1930년대 말부터 시작된 신사참배는 물론이고, 1941년 친일지도자가 주도하여 연회를 해산하고, 일제의 각본에 따른 법을 통과시켜 친일교단을 조직하였다. 일제의 꼭두각시 노릇을 한 이 친일교단에서는 일제에 비행기를 헌납하는 등 참으로 부끄러운 과오를 범하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북한교회는 공산치하에서 어려운 시련을 겪게 되었고, 남한의 교회는 재건파와 복흥파가 분리되어 극한 대립을 하고 있었다. 이런 대립은 1949년 가까스로 수습되어 하나의 교회로 다시 합쳐지게 되었고 합동총회에서 김유순목사를 새로운 감독을 선출하였다.

그러나 분열을 극복하고 새로운 자세로 선교에 임하기로 한 이듬해 한반도는 6.25전쟁이 일어나 동족상잔의 비참한 전쟁에 휘말려 들게 되었다.

하나되어 선교하는 교회 ( 1953 - 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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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교회인 미국교회와 세계 감리교회는 고난에 빠진 한국감리교회를 돕는데 온갖 힘을 다하였으며, 형제들의 사랑은 한국 감리교인에게 커다란 위안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형제교회의 도움으로 곳곳에 새롭게 교회를 개척할 수 있었다. 특히 북한에서 피난 온 교역자들을 중심으로 제주도와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에 많은 교회를 개척하였다.
이 지역은 선교초기에 체결된 선교협정에 따라 감리교회 선교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던 곳이었다.

한국감리교회는 1964년 파송제를 포기하고 개교회 청빙제를 채택함으로 교역자가 한 군데에서 안정적으로 목회할 수 있게 되면서 급속한 교회성장을 경험하였다.

한국감리교회의 교회성장은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부흥운동에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교회 성장의 과정에서 여러번 교회 분열의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치된 교회를 원하시는 주님의 뜻에 따라 분열을 극복하고 일치된 교회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한국 감리교회는 또한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노동자 농민들을 위한 사회선교를 과감히 펼치는 등 인권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며 이 나라 민주화에 적극 동참하였다.

한국감리교회는 해마다 계속 성장하였으며, 이에 따라 연회와 지방회수도 많아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