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조윤승 목사님을 추모함
2008-12-30 09: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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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이미 고인이 되셔서 영화로운 하늘나라에 계시는 조윤승(島岩 曺允承) 목사님. 그 어른의 2주기일이 내일, 즉 2006년12월31일이다. 향년 100세가 다 지나시도록 참 강령 하셨는데 만101세를 며칠 남긴 채 노환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다.
한국 감리교회의 도암 조윤승 목사님하면, 아마 나이 좀 드신 목사님들치고 모를 이가 별로 없을 것 같다. 감리회 전국 원로목사회, 또는 서울연회 원로목사회 회장으로 오래 일하셨고, 특히 어느 교회나 목사의 축하기념행사가 있으면, 의례 자작 한시를 친히 써 만든 액자를 지참하셔서 해설하고 증정하시곤 하시던 분이다.
故. 島岩 曺允承 목사님의 추모의 글을 쓰자니 먼저 외람됨과 송구한 마음이 앞선다. 마치 문외한이 거장(巨匠)의 명작을 이렇다 저렇다 평하는 격이라고나 할까.
고. 조 윤승 목사님은 그 거칠고 험했던 지난 한 세기를 사도 바울처럼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믿음을 지키면서 달려갈 길을 다 마친 참 성직자요, 위대한 우리의 사표이시었다.
내가 조 윤승 목사님을 맨 처음 뵌 것은 1947년 2월 어느 날, 평양 성화신학교 남자 기숙사 점심시간이었다. 훤칠한 키에 기품 있는 분이 점심 먹는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문시를 읊으시고 그 뜻까지 풀이 하신다.
수지아량이리오 수지아량이로다.」(誰知我量. 水知我量) (그 누가 내 식량을 알랴, 물이 내 식량을 알아주는구나.) 당시 기숙사, 한 끼에 25전하는 식사 메뉴란, 백미와 붉은 수수를 50대 50으로 혼합한 공기 밥과, 시래기 국, 깍두기, 멸치찌개쯤이 고작이었다. 모두 한창때인 식량에 공기 밥은 먹으나마나, 그래서 쭉 들이켠 물 한 그릇이 배를 채워준다는 말이다.
고. 도암 조윤승 목사님은 평양 대동강 하류에 있는 두로섬(豆老島)에서 1905년 1월 23일 출생하셨다. 1905년은 일본이 강제로 체결한 소위 한일보호조약(乙巳勒約)의 해이다. 우리나라를 강점한 일본은 우리 군대를 해산하고 황후를 시해하며 국권을 약탈했다. 이 시대에 목사님은 애국가(愛國歌)가 아닌 애국가(哀國歌)를 부르며 어린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슬프도다. 우리 민족아
사천년 역사국으로
자자손손 복락 하더니
오늘 이 지경이 웬일인가
(후렴)
철사주사로 결박한 줄을 끊어버리고/
대한독립만세 소리에 바다가 끓고 산이 동했네.
조 목사님의 회고록을 보면 그는 모교회(母敎會)인 두로도 감리교회에서 자라면서 엡윗청회 총무 일을 맡아 봤는데 그 일이란, (1)섬에 무당, 점쟁이 등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미신 타파, (2)밤에 한글을 가르쳐주는 문맹퇴치, (3)음주 도박을 추방하는 사회정화운동, (4)집집 이 전기, 수도, 시계설치 등 생활개선 장려운동을 했다고 회상했다.
조 목사님은 1937년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신 다음, 두로도 교회, 유성리 교회를 거쳐 1.4 후퇴로 월남 후 대구제일 감리교회, 서울 혜명교회, 반석교회 등 46년 목회기간 15교회를 개척설립 하고 네 번 교회당을 지었다. 1976년 정년은퇴 후에도 그는 조금도 쉬지 않으셨다. 아니 더 많은 일을 하셨다는 말이 맞을지 모른다.
소속교회의 담임목사를 도와 마치 부목처럼 매월 1차 주일설교, 환자심방, 속회인도까지 빠짐없이 하시는가하면, 밖으로는 교단의 부흥과 은급사업에 협력하였고, 또 20 여 년간 감리교 원로목사회 회장, 또는 임원으로 봉직하면서 원로목사들을 이끌어 주었다.
그리고 기독교방송국, 서울 YMCA, 서울경찰국 등 사회기관사업에도 많은 봉사를 하였다. 그러므로 목사님께서 받은 표창장은 대통령, 장관, 치안국장, 방송국 사장 등을 포함해 모두 20 여개나 된다.
특별히 도암 조 윤승 목사님 하면 세상이 다 알게 된 것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의 유명한 한문시(漢문詩)이다.
일찍이 한문수학으로 창작 시에 조예가 있으신 목사님은 교계에서 생기는 무슨 기념식, 봉헌식, 취임식, 하례식 등 많은 축하행사에 빠짐없이 초청을 받는다. 그러면 목사님은 한시를 짓고 써서 액자에 넣어 가지고 참석하고, 차례가 되면 나아가 낭송하고 유머를 곁들여 해설하신다. 이래서 웬만한 교회 치고 목사님의 한시액자가 아마 한 두 개쯤은 다 걸려 있으리라.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를 감동 시키는 것은 그 시간 받은 사례금을 교통비로도 쓰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서 교단 신학교들에 장학금으로 수 1.000. 만원을 보냈고, 은급부에 매년 10만원 씩 해서 수 백 만원을 보내셨다고 한다. 도암 조 목사님은 평생에 우리가 지키기 어려운, 다음의 세 가지를 지키는 데에 성공하신 분이라고 생각한다.
첫째, 성직자의 품위이다.
조 목사님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목사로서의 사명과 품위를 끝까지 지키기를 노력하신 분이다. 1930년에 목회를 시작해서 1976에 정년 은퇴하기까지, 그리고 은퇴 후 30년의 파란만장(波瀾萬丈)한 난세를 사시면서 한점 흩어짐 없이 성직자의 품격을 지키셨다.
목사님의 성품을 평양신학교 입학동기인 고. 박 용익 목사는 “나는 조 윤승 목사가 분노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라고 섰고, 한 지방에서 오래 목회한 박 설봉 감독은 “교단에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에 그는 언제나 공정성과 화해와 평화를 중요시 했었다”고 술회했다.
필자는 원로목사회 서기로서 10 여 년간 목사님을 모시면서 그 분이 누구를 비난하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그러므로 조 목사님을 가까이에서 본 이들은 한 결같이 조 목사님이야 말로「참 목사」,「표본목사」,「목사 중 목사」라는 평을 서슴지 않는다.
둘째, 자녀들의 신앙생활이다.
조 목사님은 다자손의 축복을 받아서 슬하에 4남매를 두셨는데 그들을 통해서 난 증손들까지 합치면 현재 모두 55명이나 된다. 이 중에는 현직 목사가 5명, 장로 4명 그 외에 교수, 의학박사도 있다. 그런데 이 대 가족 중에 신앙의 울타리를 벗어나 살거나, 타 교파 가족이 하나도 없다. 이 일이 쉬운 것은 아니다. 족장 아브라함처럼 참된 신앙의 모범과 끊임없는 교육의 힘이리라 생각한다.
조 목사님은 자손에게 아래와 같은 유언문을「망백기념회고록」에 기록해 두었다.
나의유언: “물질의 유산은 잠간, 영원한 유산은 믿음, 우리가문은 성직자가 대대로 계승
되게 하라 이것이 나의 평생소원이요 유언이다“
셋째, 몸과 마음의 건강이다.
조 목사님은 소천 하시기 2,3년 전까지만 해도 시각이나 청각, 언어, 식사에 아무런 불편이 없으셨다. 건치에 흑발, 앞서 걸으시면 따라가기에 바쁘다.
아침에 전화를 걸면 식구들이 대신 받으며 지금 산책 중이라고 한다. 이러한 그의 건강은 타고난 하나님의 축복이기도 하겠지만, 남모르는 목사님의 노력의 결과이었을 것이다.
1976년 은퇴하시면서 “인생은 70부터”라고 해서 유행어가 되었고, 이어서 “인생은 80부터”,
“인생은 90부터로 이어졌다. 1982년 원로목사 일행이 일본여행 길에, 장수의 비결을 묻는 일본인에게 조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① 心不老, (마음이 늙지 않아야한다.)
② 信不老(믿음이 늙지 않아야한다.)
③ 役不老(하는 일이 늙지 않아야한다.)
도암 조윤승 목사님은 2006년 12월 31일(주일) 아침 8시30분, 서울간호대학 요양원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영화로운 하나님나라로 들어 가셨다. (향년101세)
끝으로 조 목사님의 시조 한 수를 올린다. (드물게 보이는 그의 한글 시이다)
(2008년 12월 29일 차종필 기)
청산은 나를 보고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네.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강수는 나를 보고 자랑 말고 살라하네
청풍은 나를 보고 구별 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혈기도 내지 말고 영화도 내버리고
청산 같이 창공 같이 강수같이 청풍 같이
맑고 깨끗하고 아름답게 살다가 가라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