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 여인의 믿음
2010-03-04 09: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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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여행 중에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지나가셨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베니게 지역의 수도인데 도덕적으로 문란했고 우상숭배가 만연한 지역이어서 유대인들에게는 부정한 도시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은 이곳에서 조용히 쉬시려고 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아마 예수님은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하시며 영적 충전을 하시려 계획하셨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그때 헬라 여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의 가나안여인 하나가 예수님을 찾아와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여인의 딸은 흉악한 귀신에 들려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귀신들린 자기의 어린 딸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며 건강을 회복시키려고 많은 재물을 허비하며 의원을 찾았으나 모두 헛수고뿐이었습니다.
귀신은 그 여인의 딸에게 갖은 심한 고통을 주어 죽을 지경입니다.
딸을 사랑하는 여인의 근심은 더하여만 갔습니다.
사랑하는 딸의 고통은 그 어머니에게 가장 큰 괴로움이며 아픔입니다.
그 때 들리는 소문은 말씀 한마디로 각색 병든 자들을 다 고쳐주시는 다윗의 자손 예수님께서 그곳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은 거라사에서 군대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말씀 한마디로 귀신을 쫓아내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러니 그 여자는 더없이 반가운 소식입니다. 그 여인에게 이보다 더 큰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그 소문의 주인공이요 구원자 예수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토록 만나고 싶던 소문의 주인공 예수님이 이 벽지 마을에 오셨다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런 좋은 기회를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없이 부요 하고 여유 있는 삶보다는 예수님 안에서 고난과 역경을 당하는 삶이 더 행복하다는 것을 이 여인은 알았을까요?
여인은 예수님이 쉬시려는 집(막 7:24)까지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이 여인의 끈질기게 매달려 간절히 기도함으로 목적을 이루고야만 믿음의 인내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1. 기회를 잃지 않고 부르짖은 여인의 기도를 배웁시다.
아마 이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질병에 걸렸던지 말씀 한마디로 치료하시고 어떤 귀신이던지 말씀 한마디로 쫓아내신 능력이 많은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 소문의 주인공 예수님 만나기를 얼마나 애 태우며 기다렸을까요?
그런데 마침 예수님이 이방인의 땅 국경근처에 오셨다는 소문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예수님을 찾아 나섰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은혜를 사모하지만 교회 문밖에 나가기 전에 곧 망각하고 맙니다.
말씀을 들었으면 들은 말씀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새기는 것이 아니라 교회 문 앞에 나가기도 전에 모두 잊어버리니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면서도 어떤 성도는 목사님이 설교를 잘하느니 못하느니 비평만 곧잘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복음의 소문만 듣고도 잊지 않고 마음에 간직하고 믿음으로 새겨 그 말씀 따라 실천함으로 후한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아는 것을 마음속에 묻어두는 사람이 아니라 들은 것을 믿음으로 실천하고 행하여 결실을 거둔 신앙의 사람입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생명이며 실천이며 결실이며 전진입니다.
실천하지 않고 행함 없이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잠자는 신앙이요 죽은 신앙이며 소멸되는 신앙입니다.
살아있는 고기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지만 죽은 고기는 물을 따라 흘러서 떠내려갑니다.
살아있는 나무는 물을 주면 성장하지만 죽은 나무는 물을 머금으면 썩어지고 맙니다.
여리고 성의 소경 바디매오를 보십시오!
예수님께 부르짖고 간구하여 눈을 뜨지 않았습니까?
12년을 혈루 병으로 앓던 여인을 보십시오!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의 옷을 붙들고 병을 고침 받지 않았습니까?
10명의 문둥병자들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다가 고침을 받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 믿음으로 나아가 부르짖고 애원하며 간구 한 사람들은 모두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한 사람들은 모두 문제들을 해결 받았습니다.
육신의 질병들도 고침을 받고 영혼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를 않고 실천하지를 않는 사람들은 죽은 자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현재에서 전진하는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의 위치에서 전진하여 나아가는 새로운 출발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멸망 받을 소돔성에 그냥 남이 있었더라면 소돔성과 함께 멸망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뒤도 돌아보지 말고 앞으로만 신속하게 달려 나가라는 천사의 권고에 아내와 두 딸들은 성밖으로 데리고 나갔습니다.
멸망의 도시 소돔성에서 억지로 순종한 롯과 그의 두 딸은 살았습니다.
그러나 롯의 아내는 불순종하고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멸망의 도성에 마음 두지 말고 생명의 근원 되시는 예수님께 나아가면 사
는데 사람들은 결단 없이 농담으로 여기다가 롯의 사위들처럼 망하고 롯의
아내처럼 멸망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비와 친척과 정든 고향을 떠나라고 하시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무조건 순종하여 하란을 떠났을 때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우상이 범람하는 갈대아 우르를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나섰던 아브라함에게 축복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낯설고 산설은 곳이라 해도 순종하고 나아갔을 때 가장 큰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호렙산 가시떨기 불꽃가운데서 부르시는 하나님 음성을 듣고 순종했을 때 양치는 목자가 이스라엘 민족을 거느리는 영적 목자가 되었습니다.
아람 장군 나아만은 엘리사의 말에 억지로라도 순종했을 때 문둥병을 고침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미련한 처녀들처럼 준비하지 않고 비록 잠잤으나 눈뜨고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가 붙들기만 하면 소망을 이루고 천국을 소유하는 자가될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께 나와 큰소리로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 때 그 주위에 이 여인뿐 아니라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과 무리들도 있었을 것이며 지나가는 행인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인이 길에서 예수님께 소리 질러 간구 한다는 것은 남의 눈에 그슬리는 일이요 귀찮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남의 눈이나 경멸 따위는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사랑하는 딸의 건강한 회복을 바라는 간절한 소망은 체면이나 부끄러움 따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을 받고자하는 사람이 누구를 두려워하고 사람들을 부끄러워하고 체면을 생각한다면 어떻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겠습니까?
영생을 구하는 사람은 믿음으로 바라보며 구하려는 목적을 위해 전심전력을 다 해야 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체면이나 논리나 선후를 생각하기보다 살기 위해 급히 소리치듯이……. 운동선수가 경기장에서 앞만 보고 달려가야 하듯이……. 주위 환경이나 처지를 바라볼 여유가 없습니다.
만약 목적을 가지고 나왔다는 사람이 주위의 환경이나 처지를 의식하고 체면만 생각한다면 그는 진정한 목적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사랑하는 딸을 위하는 일념밖에 없었기에 남의 시선이나 체면 따위는 생각지도 않고 모처럼의 얻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전심전력을 다하여 예수님께 간절히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2. 낙심하지 않고 부르짖어 응답받은 믿음을 배웁시다.
여인의 간절한 부르짖음에도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 여인의 간구하는 기도소리를 못 들으셨을까요?
그 여인을 못 보셨던 것일까요? 그를 이 없습니다.
설사 가까운 거리가 아니라 먼-곳에서 부르짖었다 해도 그 여인의 육성이 예수님께 들리지 않았다 할지라도 사람의 마음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모르실 이 없습니다.
또 모르셨다 가정해도 제자들이 듣고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라고 중계역할을 하였으니 이미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여자가 얼마나 믿음이 있나 인내심을 보려고 못들은 체 한 것 같지만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냄을 받지 아니하였다”고 하신 것을 보면 연극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그 여인을 외면하고 못들은 체 하셨을까요?
그 말씀대로라면 아직 이방인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들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이 구원계획은 사도행전 1:8, 유대로부터 세계로 뻗어 나가야하며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과 일치하게 일하십니다.
유대부터 시작해서 선민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을…….” 찾는다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9:20-26,에 보면 노아가 술에 취해 부끄러움을 드러내놓고 자고 있을 때 아버지의 수치스러운 모습을 본 함은 밖으로 나가 형제들에게 아버지의 흉을 보았다가 아버지 노아로부터 저주를 받습니다.
이 여인은 바로 함의 후손으로 노아에게 저주받은 가나안 족속으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남여노소를 막론하고 하나도 불쌍히 여기지 말고 모두 전멸시키라는 백성들 중의 한 지파입니다.
유대주의를 강력히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오직 유대인들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이방인은 모두 지옥의 땔감이라고 가지 혹평했습니다.
이방 민족이며 가나안백성 중 한사람인 이들은 아직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해당되지 않은 족속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인이 안타깝게 부르짖는 간구도 외면하셨던 것일까요?
그러나 여인은 예수님의 외면도 불구하고 얍복 강가에서 환도 뼈가 부셔지기까지 천사와 씨름했던 야곱처럼 끝까지 매달리는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응답을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
생사의 결단으로 끝까지 매달린 불굴의 믿음입니다. 그녀는 부르짖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앞까지 나와 엎드려 간절히 간구했습니다. “저를 도우소서.…”
여리고의 소경 바디매오도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크게 부르짖을 때 주위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꾸짖었으나 꾸짖으면 꾸짖을수록 더 크게 소리를 질러 예수님을 머물러 서게 했고 마침내 응답을 받아 내었습니다.
예수님은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에게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고 하자 소경은 겉옷을 버리고 뛰어 나아오자 예수님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소경은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은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하시니 곧 보게 되어 예수님을 길에서 좇았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에게 억울한 일을 당한 여인도 귀찮을 만치 쫓아다니며 간구하여 마침내 불의한 재판관의 마음을 돌이켜 원한을 풀었습니다.
12년을 혈루 병으로 고통당하던 여인도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예수님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려 고침 받았습니다.
이 수로보니게 여인도 소망이 더디게 이루어지는데도 불구하고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부르짖고 간구해 외면하고 지나가시던 예수님으로부터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이 여인의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얼마동안 기도하고 나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쉽게 포기하고 낙심하지 말고 응답될 때까지 확신 갖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시간이 없다, 응답이 안 된다, 공연한 헛수고다, 그러니 포기하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사탄의 속삭임에 속지 말고 이루어지기까지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간절한 간구는 하나님 마음도 감동하고 하나님의 계획까지 변경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결코 헛수고나 시간의 낭비가 아닙니다.
니느웨를 심판하려던 하나님은 요나가 “니느웨는 40일 후에 멸망한다.”는 외침을 듣고, 니느웨 왕을 위시한 모든 백성과 가축까지 굵은 베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쓰고 금식하며 회개할 때 심판을 거두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시험적으로 던진 사탄의 낚싯밥에 걸려들어서는 안 됩니다.
예레미야 29:13,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하였고, 예수님은 마태복음 7:7,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들이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되면 되고 안 되면 말라는 따위의 반신반의하라는 배짱이 아니라 성의를 다하고 끈질긴 노력을 기울여서 반드시 쟁취하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여인의 간절한 믿음은 예수님께서 그의 신적 직무를 띄우고 하나님의 어떤 지시와 명령을 따르고 또 따라야 했던지 간에 고통 중에 있는 그녀를 도우려는 일과 모순 되지 않으리라고 그녀는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자기의 요구하는 것을 줄 때까지 조르거나 떼를 쓰듯이 예수님께 매어 달렸던 것입니다. 그러자 끈질긴 믿음의 간구에 마음 약하신 예수님은 이방인 여자의 애원을 끝까지 외면하지 못하였습니다.
귀를 막고 듣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칭찬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응답 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3, 멸시천대도 믿음으로 소화한 삶을 배웁시다.
그런데 이 이방 여인이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킨 한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이 여인의 믿음이 어떤 천대와 멸시도 불구하고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이 힘들고 어려운 관문을 통과했다 해도 이 마지막 관문인 천대와 멸시를 견디지 못하고 목적을 포기하거나 지금까지 쌓았던 신앙의 탑을 무너뜨리고 마는 것을 가끔 보게 됩니다.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은 응답의 시작단계입니다.
나의 간구 할 목적을 가지고 응답할 때까지 끈기 있게 구하는 것은 열심이요 충성입니다. 그러나 천대와 멸시를 받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자신을 부인하고 믿음으로 “아멘” 하여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순교의 각오와 정신이 따르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대답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면전에서 심한 모욕을 하셨습니다.
현대 기성교인들은 목회자에 대한 불평을 가끔 널어 놉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친절하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교인이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모두에게 친절해야하고 그들의 요구와 불평에 대하여 명확한 태도로 만족하게 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목회자의 가슴은 모든 성도들의 요구와 건의를 모두 받아들일 수 있도록 넓어야하고 수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추호라도 관심이 미달하고 수용할 능력이 모자란다면 그는 무능한 교역자요 정이 메마른 목회자라는 불명예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능하고 정이 철철 넘치는 훌륭한 목회자의 상은 모든 교인들의 손이 되고 발이 되고 요구하는 마음을 빨리 읽어서 얼러주고 다듬어주고 추켜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작은 교회나 개척교회에서 행여 교인들의 잘못이나 허물을 바로 잡아주고 믿음으로 키우려는 심정으로 시정하려다 보면 오히려 교인들의 비위를 건드린다는 불쾌감을 드러내고 삐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자기 기분대로 사는데 이래라 저래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신앙은 자기가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무어라고 해도 나는 듣지 않을 거야 내가 하고 싶어야 하지 누가 권한다고 듣는가 봐라 들을 겉 같으냐?
내 고집이 어떤데…” 그런데 본문의 수로보니게 여인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개”라고 하는 말로 멸시하셨는데도 이 여인은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하고 받아들였습니다. 본인에게 직접 개라고 멸시하고 취급을 해도 여인은 화를 내거나 반색하지도 않고 낙심하지도 않았으며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
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이방인들에게도 부정한 짐승으로 여겨지는 동물이고 가장 수치스러운 욕입니다.
그런데도 여인은 그런 멸시와 욕도 기꺼이 믿음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만일 우리 성도들 중에 목사가 “개”라는 욕하거나 “개” 취급하면 “아멘”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성도가 얼마나 될까요?
그런 욕을 먹고 멸시를 받아도 “아멘” 하고 받아들인다면 그는 아주 귀한 믿음의 성도일 것입니다.
영생을 구하던 부자청년은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키며 살았으나 마지막 한 가지 네게 있는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쫓으라고 하시는 말씀에 재물이 아까워 영생을 포기하고 근심하며 되돌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말씀을 듣고도 고집을 버리지 못하여 돌아간 청년은 영생을 영원히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순교란 무엇입니까?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뒤에 자기를 숨기는 것입니다. 나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예수님만 살고 나는 죽어서 없어지는 것이 작은 순교입니다.
꼭 피 흘리고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만이 순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육체적인 모욕이나 곤욕이라 할지라도 정신적인 고통이나 고민이라 할지라도 인격적인 모독이나 멸시라 할지라도 감수하고 참고 희생하는 믿음이야말로 고귀한 순교의 정신의 산물인 것입니다.
이 여인의 대답은 어느 모로 보아도 놀라운 믿음입니다.
이 여인은 하나님이 정하신 그의 메시아 적 사역의 배당이 전적으로 선택된 나라에 한정되어 있음을 말씀하신 것을 전심으로 받아 들였던 것입니다.
이에 대한 여인의 인정은 형식적이나 피상적이지 않습니다.
이 여인은 이해하고 인정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의문이나 반대의 생각은 없이 절대 복종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셨는지도 묻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신앙의 날카로운 두 귀는 자녀들과 그 자녀들의 개들에 관한 의미를 충분히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유대인들을 오히려 주인의 자녀들로 개들의 주인들로 호칭하여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적 언사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것을 수단으로 그녀의 신앙은 완전히 겸손하게 복종하며 구걸하였습니다.
마치 개들 중의 하나가 주인의 자녀들이 밥을 먹다가 무심코 마루 위에 떨어뜨리는 몇 개의 작은 부스러기들을 구걸하듯이… 여기서 겸손의 의미를 온통 신앙으로 나타냈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여인의 신앙을 보고 그녀의 기도를 응답하셨습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이 여인은 예수님께 칭찬을 받았습니다. “겨자씨만 한 작은 믿음이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저 바다에 던지라 하여도 그대로 되리라”하신 말씀대로 응답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여인의 간절한 믿음은 마침내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어떤 소원입니까? 자신의 생명보다도 귀한 사랑하는 딸에게서 귀신이 떠나가고 즉시 건강해진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