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산과 심판
2010-02-28 09: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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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8:1-10, 마태복음 25:14-30.
기독교를 한 마디로 말한다고 하면 부활의 종교요, 생명의 종교요, 영생의 종교요, 재림의 종교입니다. 구원의 종교요, 은혜의 종교요, 축복의 종교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성도들은, 장차 재림하실 예수님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영원히 하나님 영광을 바라보며 살 것을 소망으로 삼습니다.
재림의 신앙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긍정적인 소망을 품게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셔서 승천하실 때, “내가 다시 오리라”고 말씀하시며, 각자의 재능과 능력에 따라 달란트를 맡겨 주셨습니다.
실제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5백여 성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그 때 흰옷을 입은 두 사람의 소리가 나기를,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시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올라가신 후, 기독교인들은 다시 구름을 타고 오실 예수님을 2천년의 오랜 세월을 지내도록 기다리며 사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의 3년 동안, 장차 재림하실 것을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달란트의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실 때도 재림에 대한 것을 언급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여러 가지 징조와 사건들이 일어나겠지만 반드시 모든 사람들에게 맡겨주셨던 달란트와 사명을 결산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에 종들에게 각기 달란트를 맡겼다고 합니다.
어떤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어떤 종에게는 두 달란트를, 어떤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얼마 후 다시 돌아온 주인은, 달란트를 맡겨준 종들과 결산을 하였습니다. 그 때 충성스럽게 일한 종들은, 칭찬과 상을 받았으나, 게으른 종들은 책망과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달란트를 맡긴 주인은 누구를 말합니까? 예수님 자신을 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타국에 갔다고 하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천국에 승천하셨다가 다시 재림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종들은 누구를 말합니까? 각기 믿음 안에서 소명과 사명을 받은 성도들을 말합니다. 달란트는 무엇입니까? 각자에게 맡겨주신 재능과 능력의 사명을 말합니다. 주인이 돌아오는 시기는 언제 입니까?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때를 말합니다. 결산을 한다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각자 믿음의 분량과 결과에 따라 심판하시겠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 달란트 비유의 말씀에서도, 예수님은 반드시 재림하신다는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쁨으로 영접하는 날까지, 충성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맡겨주신 달란트와 재림에 대한 사상을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주인이 종들에게 각기 달란트를 맡겼다는 의미를 살펴봅니다.
주인은 각 종들의 역량과 재능에 맞추어서, 달란트를 맡겨주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불공평하다거나 편견을 갖고 차이를 달리 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그릇에 따라 담겨주는 량이 많고 적음과 같이, 주인은 각 종들의 지혜와 능력에 따라 감당할 수 있는 분량을 맡겨주신 것입니다.
달란트는 최대의 화폐단위로 종들에게 맡겨주신 능력의 은사를 말합니다. 주인은 각 종들에게 은혜롭게 사용하도록 재능을 맡겨주신 것입니다.
주인은 그 달란트들을 어떤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어떤 종에게는 두 달란트를, 어떤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겨주었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하라고 명령한다거나, 어떻게 사용하라는 방법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주인이 종들에게 권리와 의무를 모두 맡겼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종들의 자유의지에 맡겨 주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28-31,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도, 이렇게 각자의 지혜와 능력에 따라서 달리 세우시고, 각자에 따르는 은사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불공평하거나 편견에 치우쳤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에베소서 4: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모두가 사도가 될 수는 없습니다. 모두가 다 선지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모두가 다 복음 전하는 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건물을 세울 때, 모두가 기둥이 되고 모두가 들보가 되고 모두가 다 문지방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각기 다른 재료로 쓰임을 받고도 협력을 해야, 하나의 건물이 든든히 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들이 소유물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아서, 그 사람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소유물의 사용처를 보고, 그의 인격도 알 수 있습니다. 주인은 당신의 자본을 종들에게 맡길 때, 종들의 사업능력과 자질을 알았고, 다소간의 자본을 적절하게 운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느껴졌을 때, 재능과 능력에 따라 달란트를 나누어주었습니다. 기업을 하는 재벌들이 자녀들에게 재산을 상속할 때, 일정기간동안 기업운영에 대하여 훈련을 시키고, 기업을 물려줍니다. 아무런 기업의 운영방법도 모르는 신출내기들에게 기업을 맡겼다가는 파산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재능을 받은 사람들에게 똑같이 나누어주신 것이 아니라, 잘 감당하겠다고 여겨지고 이익을 낼 수 있을 만하다고 여겨졌을 때, 적당한 분량의 일을 맡겨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적은 일을 맡기고, 그 일을 잘 감당하면 조금 더 큰일을 맡기고, 그 일도 잘 감당하면 더 큰일을 맡겨 주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겨 주었을 때, 종들의 인간적인 기질이나 그 사람의 인격과 지성, 각 개인의 의지와 일할 수 있는 능력, 기회를 포착할 수 있는 지혜 등 다양한 것을 보고 맡겨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들의 기질과 재능과 능력들은 모두가 주인의 달란트를 맡는데, 참작이 되며 각자의 책임감들이 맡은 분량에 한정하여 결정하는 데 유리했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결론을 보면, 주인은 종들의 인격과 재능과 성실함을 잘 알아보고서 맡겨주었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많이 맡았던 종들은 말없이 충성하고 열심히 일하여 값 절로 남겼으나, 적게 맡았던 종은 자신의 게으름으로 허송세월을 보내고도, 부끄러움도 없이 주인에게 불평하고 비판하면서 자신의 게으름을 합리화하려고 한 것을 보게 됩니다.
2. 종들의 활동하는 시기와 때를 말해줍니다.
달란트를 맡은 종들이 충성할 수 있는 때와 시기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달란트를 맡은 종들이 주인 없는 곳에서 얼마나 충성스럽게 일을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보지 않고 간섭을 하지 않는 데서 얼마나 활동했느냐? 하는 것은 거짓과 참된 두 가지의 사실이 결과로 증명 될 것입니다. 활동하는 시기는 늘 언제나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기회와 시간은 제한이 되어있습니다.
전도서 3:1-8,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나이와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를 아니합니다.
본문의 설명은 주인이 오시기까지 활동의 기회와 시간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인생의 활동 시기는 황금 같은 젊음의 때와 시기에 해야 할 것입니다.
노년에는 하고자 해도 힘이 없어서 못합니다. 정신이 흐려지고, 기억력도 쇠해지며, 욕망도 식어지고, 정열도 식어집니다. 감각기관들이 마비되고, 능력도 떨어집니다. 세월과 시간은 쉬지 않고 흐르는 물처럼, 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신속히 지나갑니다. 그러므로 지혜롭게, 기회를 붙들고, 재능을 발휘하는 자들만이 시간을 이용할 수가 있습니다. “시간을 지배할 줄 아는 사람은 인생을 지배할 줄 아는 사람이다”고 에쎈바흐는 말했습니다. 시간을 허비하면, 시간을 소홀히 한, 어느 시기에, 그 시간의 앙갚음과 재앙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어진 시간을 곱으로 사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주어진 시간에만 사는 사람이 있으며, 어떤 사람은 주어진 시간을 헛되게 낭비하며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고 남을 위해 선행하며 사는 사람은 곱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사셨습니다. 33년의 짧은 생애를 사셨으나, 실제는 2천년 아니 수 만년을 사셨습니다. 아니 영원까지 사시는 분이십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바울도, 베드로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지금 우리들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충성하는 삶을 살 때, 갑절로 사는 삶 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자기만을 위해서 자기중심으로만 사는 사람은 그 시간을 채우는 사람일 것입니다.
구약의 에녹이라고 하는 사람은 969세를 살았으나, 그는 “살다 먹다 죽다”는 식으로 자기 생애만을 위해서 살다간 사람이기에, 그의 행적은 아무것도 세상에 남겨둘 것이 없었고, 이름만 기록되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주어진 자기의 시간을 육체의 향락과 쾌락에만 치우쳐서 욕심에 사로잡혀 산 사람들은, 시간을 낭비하며 산 사람들입니다.
동생 아벨을 시기하여 살인한 가인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학대하였던 애급의 바로나,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베들레헴에서 두 살 아래의 사내아이들을 모두 살해한 헤롯이나,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먹고 배반한 가롯 유다나, 불법 재판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폭동자들에게 내어 주었던 빌라도는, 성경과 역사에서도 영원한 죄인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귀중한 기회와 시간을 영원히 낭비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믿음의 충성을 보여드릴 기회를 주심과 동시에,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주인이 오면, 때는 이미 지나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오시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기회는 끝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재능과 능력에 따라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예수님께 보답하기 위하여, 성실하게 충성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재능의 다소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의 모든 재능을 바쳐서 예수님을 섬기고 봉사하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눅 12:48).
그와 반대로 적게 맡긴 자에게는 적게 요구할 것입니다. 멍에는 어깨에 맞추어 지워집니다.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각자 달란트를 맡은 종들은 충성을 했습니다. 두 달란트 맡은 종과 다섯 달란트 맡았던 종은 가서 열심히 일하여 값 절로 남겨서 주인에게 칭찬과 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가서 숨겨두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주인에게 “당신은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고 심지 않은 데서 거두는 사람이기에 가서 숨겨 두었나이다.”하고 말합니다. 자기의 게으름과 무능함을 후회하거나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주인을 비판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잘못된 심사를 감추려고 선수를 친 것입니다. 그러자 그 종은 주인에게 그의 말한 대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3. 충성의 비중을 살펴보겠습니다.
달란트를 맡았던 종들이 충성하였다는 증거의 비중은, 그들이 남긴 실제적인 결과로 증명을 합니다.
학생들이 공부를 한 결과는 시험지에서 나타나고, 목수들의 일한 결과는 건축에서 나타나고, 종들의 충성한 결과는 주인에게 보고할 때 나타납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흔히 행함의 열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제 아버님께서 한 때는 밤나무 과수원을 운영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밤을 딸 때가 되어서 인부를 사서 잡초를 베는 작업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잡초를 베러온 인부를 아무리 찾아보고 살펴보아도 보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인부를 찾아도 인부를 찾지 못하고 포기하였습니다. 그런데 해가 질 무렵에 인부가 나타나더니 풀 베는 시늉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인이 볼 때에는 일하는 척하다가, 주인이 안 보이는 곳에 가서는 하루 종일 다른 곳에 가있다가 저녁이 되니까 나타나서 일하는 척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일한 것인지 안한 것인지는 작업의 흔적들을 통해서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주인이 보면 일하고 안보면 일하지 않고 놀았던 것입니다.
충성을 하고 안하고는 그 일한 결과로 측정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신자의 표적이 들어 나게 됩니다. 충성하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 해를 부르고 맙니다. 그런 종은 주인이 다시는 써 주지 않을 것입니다. 신실한 사람은 주인의 이익을 위해서 많은 노력과 헌신을 합니다. 진실하고 부지런하게 일을 하면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일한 것만큼 결과가 나타나서 소득을 얻게 됩니다. 능력이 많고 적고 가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나 열심히 노력을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에 따라서 결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맡았던 종과 두 달란트 맡았던 종은 주인을 위해서 자본을 두 배로 늘여서 주인에게 드렸습니다. 주인은 그들을 칭찬하였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았던 종은 다섯 달란트를 남겼고, 두 달란트 받았던 종은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달란트를 숨겨 두었다가 그대로 한 달란트만 가져 왔습니다. 충성한 자는 갑절로 남겼으나, 불 충성한 사람은 본전만 가져 와서도 오히려 주인을 신랄하게 비판하다가 책망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세상 끝 날에도 일한 것만큼 결과를 가지고 나와서 내어놓고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충실하다고 하는 것은 노동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볼 때, 더욱 넓은 분야에서 보는 것보다 크게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그리고 비록 보잘것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잘 이행하면 자신과 이웃을 위해서 값을 따질 수 없을 만큼 영적인 이득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달란트의 차이만으로 보상이 구별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의 달란트를 최대한으로 발휘한다면 힘쓴 만큼 결과가 나타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는 무엇일까요?
말 잘하는 어떤 이에게는 전도하는 달란트를 주셨을 것입니다.
어떤 성도에게는 기도하는 달란트를 맡겨 주셨을 것입니다. 어떤 성도들에게는 청소하는 달란트를, 어떤 성도들에게는 접대하는 달란트를, 어떤 성도들에게는 가르치는 달란트를 맡겨 주셨습니다.
찬송으로, 감사로, 봉사로, 주신 달란트에 따라서 충성을 해야 합니다.
무엇이 부족하고 불편해서 못한다는 핑계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고린도후서 8:12,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 하시리라”고 바울 사도는 말했습니다. 충성하거나 게으름을 부리는 것은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그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말씀입니다.
잠언 6:6-11,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관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눕자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 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고 하였습니다. 충성하지 않고 성실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먼저 손해가 많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인도에는 청소부 성자가 있다고 합니다. 그 청소부는 항상 비를 들고 다니며, “몬지 없이 티 없이 몬지 없이 티 없이 몬지 없이 티 없이”라고 외치며 날마다 온 거리를 쓸고 다녔습니다. 그가 지나간 거리는 언제나 어디에나 깨끗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를 미친 사람이라고 여겼으나, 그의 성실함과 끈질긴 노력을 보고 차차 인정을 하게 되고 후에는 성자로 추앙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주인에게 충성하는 마음을 가지느냐? 에 따라서 그 결과는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4. 최종 결산의 보답입니다.
주인은 두 달란트 받은 종과,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이 값 절로 남겨서 가져왔을 때, 그 종들에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것으로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지어다”하고 칭찬하였습니다. 잘했다고 하는 칭찬은 그 종들이 성실했다는 것입니다.
잘했다고 하는 칭찬은 그 종들이 열심히 일을 했다는 말씀입니다.
잘했다는 칭찬은 주인의 마음에 들게 했다는 뜻입니다.
칭찬은 책망과는 정 반대로 비교할 수 없는 기쁜 말입니다. 더욱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착하고 선하며 충성했다고 하는 영광스러운 칭찬을 받았습니다.
내면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충성 된 종은 열심 있는 종입니다. 신임할 수 있는 종이라는 말입니다. 외면적인 행실이 인정을 받은 종이란 말입니다.
충성된 종에게 돌아갈 상은,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지어다”는 칭찬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한 종에게, 주인은 쉬라거나 놀라고 하거나 잠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더 크고 많은 일을 맡겼습니다. 적은 일에 충성한 종은 더 크고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있는 종이기 때문입니다. 적은 일에 충성한 종들에게 주인은 더 크고 힘든 일을 맡겼습니다. 더 많은 일을 맡겼습니다.
어떤 이는 천국은 일하는 자들이 거하는 곳이나, 지옥은 일하지 않고 노는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군에서 제대를 하고 여섯 달을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았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때가 제 일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였던 것 갔습니다.
놀기가 얼마나 어렵고 힘이 드는지, 노동하는 것보다도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생각은 힘써서 노동하는 사람들보다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울지, 참으로 불쌍하고 애처롭게 보여 집니다. 그래서 저는 수입이 있든지 없든지 가 문제가 아니라, 출퇴근을 하려고 집을 나서는 사람들이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 합니다.
천국의 백성은 언제나 끊임없이 일을 해야 합니다. 천국에 들어갈 주인공들은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영광을 받았습니다. 게으른 종은 주인의 즐거움에 함께 참여하지 못하고 쫓겨났습니다. 세상에는 충성하는 종들도 많지만, 충성하지 않는 종들도 많습니다. 불 충성하는 종들은 게으릅니다. 불 충성하는 종들은 이유와 핑계도 많았습니다. 불 충성하는 종들은 생각하는 것도 악하고 상대방을 비판하기도 잘합니다. 불 충성하는 종들은 생각부터 먼저 비뚤어 져 있기 때문입니다. 불 충성하는 종들은 오히려 자신을 믿고 신뢰하는 주인까지 비판했고, 인색하였습니다. 그러나 충성된 종들은 범사에 감사하고 기뻐합니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평화를 존중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순종하고 충성하는 종들이 다 되어서 예수님께 칭찬과 상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