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8
2010-03-23 04:49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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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가 양떼들을 잘 먹이고 기르면 양들이 목자에게 주는 보상은 매우 크게 돌아온다.
그러나 양떼들을 잘 먹이지도 않고 기르지도 못하면서 젖만 짜내려고 하면 양들은 마르고 병이 들고 말것이다.
목회자는 성도들을 얼마나 영적으로 잘 지도하고 성장 시키느냐에 따라서 돌아오는 보상은 매우 클것이다.
세상적이고 인위적인 양식만 먹이고 비판적이고 배타적인 꼴만 먹이면서 순하고 착한 양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크게 오산이다.
다시 말해서 너무 정치적인 설교에 치우치면 모두 정치가들로 변하고 경제적인 면에 치우치는 설교만 하면 인색한 교인들로 만드는 것은 당연지사다.
비판적인 설교만 하면 결국 목회자에게 비판 밖에는 받을 것이 없다.
그러므로 사랑의 설교를 많이 하고 남을 배려하고 베푸는 설교를 많이 하라!
그러면 사랑으로 풍성해지는 교회와 성도들이 될 것이다.
부모가 자식들을 기르면서 어떤 본을 보였느냐에 따라서 자녀들의 성장에 많은 영향이 미치는 것이다.
받고 싶으면 먼저 베풀라! 그러면 베푸는 많 큼 100배나 받을 것이다.
심는 종류대로 수확하고 심는 분량에 따라서 거두게 되는 것이 진리이다.
팥심은데 팥나고 콩심은데 콩나는 것은 불멸의 법칙이다.
양들은 꼴을 먹으면 되새김질을 하듯이 성도들도 목사의 설교를 들으면 되새김질을 한다.
오늘 들은 설교는 은혜가 있엇다 없었다가 아니라 설교중에 들었던 예화를 가지고 시비거리로 삼고 비약하여 이렇게 설교하는 의도가 무엇인가?
누구에게 들으라는 설교인가? 하는데까지 생각하기도 한다.
은혜롭게 넘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목사에게 설교의 말꼬투리를 잡아 항의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예화는 설교의 묘미를 더하게 하는 활력소도 되지만 반격의 조건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어떤 금주운동가가 술주정꾼들 앞에서 지렁이를 물컵에 담아 지렁이가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여주고 이번에는 건져서 술컵에 담아 지렁이가 꾸물거리다가 술에 녹아 버리는 것을 보여주면서 “보세요 여러분들은 이것을 보고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한 사람이 손을 들고 대답하는 말이 “예 술을 먹으면 우리 몸속에 있는 기생충들이 모두 죽는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예화를 들어 설교를 했더니 어떤 이는 설교의 묘미를 주는 재미있는 예화라고 생각하는 이가 있었는가 하면 어떤 이는 술을 먹지 말라는 경고구나 하고 들었고 어떤 이는 “아 나에게 하는 설교구나?”하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예화는 어떤 것이든지 설교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예화도 성경에 있는 말씀으로 하면 시비 거리는 되지 않는다.
그것은 세상적인 예화는 어떤 것이든지 시비의 요지가 있음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비판하는 사람들과 같이 시비를 따지고 말대꾸를 하면 불화는 더 커지게 마련이다.
오히려 어른답게 대인답게 철없는 어린애들이 어린양을 부리는 짓이려니 생각하고 여유롭게 넘겨버리는 아량도 있어야 할 것이다.
시간이 가고 세월이 지나다 보면 시비 거리도 모두 회석되어지기 마련이다.
바다의 조개는 작은 아픔의 요소가 들어와서 전신을 괴롭게 하여도 즉시 제거하여 버리지 않고 오히려 그 아픔을 자신의 몸에서 진액을 내어 포용함으로 아름답고 귀한 진주가 탄생하듯이, 목회자는 양떼들이 행여나 뿔로 받고 머리로 받을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참고 인내하며 받아 주는 아량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종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얼굴에 침 뱉음을 받고 뺨을 맞고 채찍으로 맞고 십자가에 못이 박혔어도 대항하거나 저주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도고의 기도를 하셨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 하소서 저들이 알지 못하고 하는 짓이니이다.”
충성하는 종은 상전의 의도를 알고 따라야 하는 것이 충성된 종의 도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