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6
2010-03-13 09: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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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6.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군에서 제대를 하기 몇 달 전입니다. 저는 캘빈 총을 들고 부대 뒷산에 올라가 꿩들을 사냥한 적이 있었습니다.
산을 넘고 들판을 뛰어다니다가 꿩들이 닭들과 함께 어울려서 모이를 주워 먹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몸을 숙이고 다가가 장끼 꿩을 겨냥해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그러자 다른 꿩들은 모두 놀라서 날아가 버렸으나 닭들은 잠시 놀라는듯하더니 다시 모이를 주워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집에서 기르는 닭들과 야생의 꿩들 사이에는 이렇게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야생의 꿩들은 언제나 경계하고 조심하지만 가축들은 사람을 별로 겁을 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축들은 사람과 가까이에서 살았기 때문에 별로 겁을 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축들도 자신의 신분과 위치를 알지 못한다면 위험한 것입니다.
이솝의 우화 가운데 나귀가 강아지의 흉내를 내려고 주인에게 안기려고 했으나 오히려 놀란 주인에게 심한 매를 맞고 크게 봉변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도 이렇게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행동을 하다가 봉변을 당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과거의 죄악 된 멸망의 신분에서 구원의 반열에 서있는 성도들입니다.
성도로 부름을 받은 우리가 세속에 물들어 사는 것은 거룩한 신분을 망각하는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에서 성도의 신분으로 바뀌어 진이들에게 엄숙한 충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귀족의 신분을 모르고 천민의 행동으로 자학을 하는 사람에게 정신을 깨우쳐주는 것과 같은 충고입니다.
너희도
바울이 이렇게 부르면서 본서를 쓰는 것은 로마인들을 수신자로 상대하여서 편지를 쓰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로마서를 쓸 때까지 아직은 로마에 가보지도 못하였으나 앞으로 로마에 가보고자 하는 꿈을 안고서 본서 ‘로마서’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너희도........”라고 하는 것은 보고 싶고 만나고 싶은 로마인들을 향해서 부르고 있는 말입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들 곧 모든 민족 온 인류를 위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요 복된 소식입니다.
유태인들의 사고방식처럼 특정한 선민에게만 구원이 있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가까운데 있는 사람이나 먼데 있는 사람이나 지식인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문화인이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거나 모든 인류를 위하여 주신 선물입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도 유대인들의 아집과 편견을 깨뜨리시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으며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죽은 자들을 살려주셨습니다.
부활 후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사도들 중에 바울 사도는 이방인을 위해 택함을 받은 이방인의 사도입니다.
바울이 이방인에게 더욱 복음을 증거 하는데 힘쓴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 사명을 간당하기 위해서 바울은 죽기를 각오하고 생명을 걸고 수고와 애쓰며 직무를 감당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에 의하여 그리스도를 위해 은혜와 사도의 직무를 맡은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고난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전도하고 복음전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복종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왕께 복종시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유태인들의 사고적인입장에서 보면 이방인들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킨다는 것은 쓸데없는 일을 하는 행동으로 여겨졌습니다.
초대교회나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에게까지 이상한 감정을 주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 때문에 스스로 “나는 이스라엘 사람 중에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자랑하고 자부하였습니다(빌 3:5).
한 때는 바울도 유대인들의 편협 된 사고와 같이 기독교를 박해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죽이고 체포하는 일에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을 택하시고 부르시어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택하심을 받은 것처럼 로마인들도 모든 이방인들 가운데서 택하심을 받아 성도라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되었다고 하는 것을 상기시키려하고 있습니다.
로마인들이 구원을 받은 것과 바울이 구원을 받은 것은 모두 같은 맥락에서 보게 됩니다.
같은 처지이며 같은 입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방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도덕적으로 이미 떠난 자들입니다.
에베소서 2:1. “너희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5:19,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내는 것과 당 짓는 것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한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뜻을 거역하고 범죄 하는 무리들이 바로 이방인들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택하심을 받은 것은 로마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며 큰 은혜입니다.
바로 로마인인 너희가 그러한 특권을 받았다는 것이 바울의 말하고자 하는 의도입니다.
그들 중에 있어
그들이란 바로 이방인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로마교회의 성도들도 대개는 ‘게르만민족들로’ 이방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살며 진노와 저주를 자초하며 살아가는 인간들이었습니다.
결국은 그들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서 살아갔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은 물욕에 대한 복종과 정욕에 대한 복종을 하며 죄에 대한 종이 되어서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로마교회의 성도들이 택하심을 받고 부르심을 받았던 것입니다.
마치 하란이라고 하는 죄악의 도시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불러내시고 선민의 조상이 되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로마교회의 성도들을 택하시고 불러내셨다는 것입니다.
430년 동안을 애급에서 노예로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모세를 택하시고 부르셔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신 것처럼 로마교회의 성도들을 택하시고 부르셔서 이방인들 가운데 모범교회로 삼으신 것입니다.
베냐민 족속 가운데서 사울을 택하셔서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삼으신 것처럼 로마교회를 택하셨으며 이새의 7아들들 중에서 막내아들 다윗을 택하셔서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으로 삼으신 것처럼 로마교회를 택하셔서 이방인들의 세계에서 모범교회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흔히 시사문제들을 논의하는 가운데 어려운 것을 찾아낸다는 뜻으로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다.”는 말을 합니다.
이처럼 이방인들 가운데서 택하심을 받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것”보다도 더욱 큰 특권입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복음을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얻게 됩니다.
마치 돼지우리 속에서 돼지들과 함께 지내던 탕자가 아버지에게 돌아갔을 때 초라하고 더러워진 행색들이 씻어지고 아버지의 아들로 회복되어서 귀한 아버지의 집에서 살게 된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것
이 말은 이방인들을 마귀의 소유물이던 입장에서 바뀌어져서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물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사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고 하면 영원히 마귀의 소유물로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것은 기독교가 없는 곳에는 마귀와 우상들이 우글거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현재도 그렇지만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는 우상을 섬기고 미신들을 섬기며 범죄로 들끓었습니다.
산신, 삼신, 집신, 성황당신, 칠성신, 바다해신, 용왕신, 도깨비, 등 등........
어떤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면 자신은 무종교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들도 우상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모두가 다 우상이며 마귀의 소유물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이지 중용이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고 성경은 말합니다(고후 6:14-16).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것이냐? 마귀의 것이냐? 둘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성도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것은 하나님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 가운데서 우리를 부르시고 “너는 내 것이다. 내가 너를 택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사 43:10, 신 4:37).
결혼이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각기 부모를 떠나서 한 몸을 이루어 가정을 꾸미는 것입니다.
결혼함으로 남자는 아내의 것이 되고 여자는 남편의 것이 되어 평생을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방인들 가운데서 택함을 받고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것이 된다고 하는 것은 결혼의 관계보다 더 정확하고도 깊은 것이며 분명한 관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예속되는 것은 선택을 받은 자들만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그들에게는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아 완전히 예수님의 것이며 그리스도의 소속이 되는 것입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부르셔서 자기의 제자로 삼으신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완전히 하나님과 떨어진 멸망의 사람 지옥의 사람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은 특권에 의한 외부적인 초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부르신 자의 뜻에 순종하게 되고 신자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합당한 자가 되게 하는 내적이고 유효적인 소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란을 떠나 갈대아 우르로 나왔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바로에게 보내어 졌습니다.
갈릴리 뱃사람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고 예수님 앞으로 나올 수도 없으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사랑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기독교는 부르심의 종교입니다.
과거에 범죄와 우상의 소굴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예수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영생도 예수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내세도 천국도 예수님의 것입니다.
부르심을 입은 우리는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부르심을 입은 우리는 믿기만 하면 됩니다.
만약 누군가가 노력으로 구원을 받는 다고 말을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 하는 것이며 우상의 종교일 뿐입니다.
기독교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그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자기는 예수를 믿고 싶어서 스스로 믿는 다고 말을 한다면 그것도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으며 우리는 부르심 안에서 참 신앙을 얻게 되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