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도의 세숫대
2010-03-08 09: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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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 감당해야 할 자신의 책임을 외면하고 피하는 일을, 우리는 너무 자주 저지르고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고 가능한 일을, 적은 노력만 기울이면 해결할 수 있는데도 체면을 생각해서 외면을 하고, 귀찮아서 모르는 체하며, 물질적 손해를 입을까봐 양심의 가책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런 잘못된 생각과 습관들이 우리의 삶과 영혼을 영원히 돌이킬 수 없게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거지 나사로를 외면한 채 무관심했던 부자가 그러했고, 예수님을 심문했던 총독 빌라도가 그러했으며, 바울을 재판한 아그립바와 베스도가 역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 중에도 빌라도는 저주의 대상이 되어서, 영원히 인류의 입에 오르내리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종교의 지도자들의 모함으로, 총독에게 재판을 받으시는 예수님을, 죄도 흠도 없으신 줄을 알면서도 석방하려고 하지 않고, 사랑하는 아내의 간곡한 요청도 외면을 하고 민중들이, “당신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닙니다.”고하며 강력하게 요구하자, 그들에게 위압당해 불법인줄 알면서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으라.”고 내어주고, 자신은 세숫대야에 물을 떠오게 하고 책임회피의 손을 씻은 자입니다.
여러분! 세숫대야에 손이나 씻는다고 책임을 면합니까?
손이나 씻는다고 무고한 사람을 죽이라고 불법 판결한 죄가 없어집니까?
불법의 피를 흘린 죄가 씻어집니까?
총독 빌라도는 책임회피의 손을 씻었지만, 그 순간의 행동은 불법의 사람, 저주의 사람, 증오의 사람, 진노의 사람으로 영원히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습니다.
순간의 무관심과 무책임한 행동이, 그를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할 수 있는 옳은 일을 피하고, 가능한 한 정의로운 일을 귀찮게 생각하고 외면한 채, 책임회피의 손을 씻은 것은, 양심의 손을 씻고 선의 손을 씻고 사랑의 손을 씻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의와 선과 사랑을 외면하는 행동이, 얼마나 두려운 죄인가를 본문을 통하여 살펴봅니다.
1. 빌라도는 진리 앞에서 손을 씻었습니다.
요한복음 14:6,에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에게 진리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빌라도는 진리를 자기 앞에 모셔놓고도, “진리가 무엇이냐?”고 우매한 질문을 하기도 했습니다.
진리는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역사가 변하고 바뀌어도 진리는 영원합니다.
이 진리를 인간의 사상에다가 억지로 꿰어 맞추려고 하여도 되지를 않고, 인간 철학으로 해석하려고 해도 되지 않으며, 사람의 학문이나 논리로도 종결을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많은 철학자들과 율법사들과 이론가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닌 사상과 학문과 이론에 위급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나사렛으로부터 혜성같이 나타난 예수라고 하는 전직목수였던 청년이, 지금까지 민중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누렸던 자신들의 종교적인 권위와 위엄을, 밑바닥까지 무너뜨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우둔하고 죄악 된 근본을 완전히 들어내어 버리고, 도전을 받게 하였던 것입니다.
오랫동안 갈고 닦았던 자신들의 권위와 학문의 전통이, 어처구니없게도 전통성도 없는 나사렛 목수 청년 앞에서 완전히 무너져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디서 이런 능력과 학문을 배웠느냐? 고 묻기도 하였고, 어디서 어느 선생에게 도와 권위를 얻었느냐? 는 질문도 해보았습니다.
때로는 자신들의 지혜와 능력을 총동원하여, 예수님의 권위를 침해시키려고 술수도 부려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방법과 수단으로서는, 도저히 예수님을 제어하지 못하였고, 아무 해결방법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오히려 더 큰 권위의 손상만 가져왔을 뿐입니다.
세상 법이나 전통으로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끝내는 동조자들을 규합하여 예수님을 모함하고 십자가에 처형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인간의 힘으로 십자가에 못을 박아도 죽지 않으며, 권력의 힘으로 무덤에 장사하려고 하여도 매장되지 않았습니다.
진리를 비 진리와 바꾸려 하여도 바꾸어지지 않았습니다.
보석을 진흙탕 속에 감춘다고 진흙이 됩니까?
황금을 쓰레기 더미 속에 묻었다고 썩습니까?
빛을 어둠 속에 매장한다고 숨겨집니까?
생명을 죽음으로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진리를 가리고 매장하려는 행동이 옳지 못하다고 하는 것은, 진리를 거슬리는 자의 아내가 먼저 알았습니다.
진리를 거슬리고 훼방하는 그의 가족이 먼저 알고, 두려움과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그 피해가 어떻게 임할 것을 알고 사람을 보내어 금하라고 충고하였습니다.
19절에 그의 아내는, 남편 빌라도에게 지난밤 꿈에 그 진리를 훼방한 죄로 자신이 꿈속에서 심히 고생했노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절대 그 사람을 간섭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빌라도는, 아내의 충고를 듣지 않았습니다.
양심이 괴롭고 마음이 두려운데도 불법에 가담하고 말았습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사주를 받은 사람들이 억지를 부리는 요구에, 인심을 얻어 보려고 진리를 채찍질했으나,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당신이 만일 예수를 십자가에 못을 박지 않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닙니다.”고 하며 폭동이라도 잃어 킬 것처럼 협박을 하며 외치자, 총독의 자리를 잃어버릴까봐 겁이 나서 그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은 예수님을 만약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로마의 가이사 황제에게 사람을 보내어, 유대인의 총독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달라고 요구하겠다는 위협이 섞인 말이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얼마나 많은 돈을 주고 유대인의 총독 자리를 샀습니까?
그런데 권력과 치부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황금의 자리를 두고 쫓겨날 것입니까?
어떻게 하던지, 빌라도는 진리를 거슬릴지라도, 유대인들에게 아첨을 해서라도 유대인의 총독자리를 지키려고 하였지만, 전설에 의하면 이 불법을 저지른 후, 그는 즉시 총독자리에서 쫓겨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빌라도의 어리석은 행동은, 오늘날 우리들도 자주 범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진리인줄 알면서도 진리를 거슬리고, 참인 줄을 알면서도 자신의 의사와 맡지 않는다고 하는 이유로, 감정이나 고집으로 무시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위나 체면이나 입장 때문에 외면을 하고, 불법과 동조하는 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옳은 일인 줄을 알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만 무시하면서, 무관심한 채, 힘 있는 반대자들과 합세하여 죄와 잘못을 저지를 때가 많은 것입니다.
자신의 양심을 속이고 옳은 일인 줄 알면서도 반대자가 많고 우세하면, 힘 있는 편에 붙어서 약자를 죽이려고 하는 박쥐와 같이 간사한 무리들이 그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리를 거슬리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진리를 못 박지 마시기 바랍니다.
진리를 정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진리를 훼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진리를 외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고, 진리를 경시하다가 영원히 후회하는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됩니다.
진리는 속이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외면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지키고 진리를 사수해야 합니다.
진리를 행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진리는 부정과 불법과 싸우는 것입니다.
진리는 거짓과 위선과 싸우며 하나님과 가까워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거스르고 싸우려는 자는 심판을 받고 망할 것입니다.
진리는 하나님 편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니체는 어려서 기독교의 가정에서 종교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으나, 진리를 거슬리고 싸우다가 나중에는 미쳐서 죽었다고 합니다.
진리를 거슬리는 것은 자신의 양심이 충고하고 심판을 합니다.
2. 빌라도는 생명 앞에서 손을 씻었습니다.
생명이 귀하고 중하다는 것은 다시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다 아는 일입니다.
그러나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이건만, 그 생명을 창조하신 생명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내어주고도, 빌라도는 책임회피의 손을 씻었던 것입니다.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무시하는 죄를, 하나님은 죄 없다고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 국법으로도 죽어 가는 자를 외면하고 죽도록 내버려두면 살인방조 죄로 여기고 벌을 받습니다.
하물며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을 죽게 하는 죄는 더 무서운 죄악 입니다.
그런데도 빌라도는 예수님이 진리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죄도 흠도 없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불법 자들과 합세해서 돌이킬 수 없는 살인에 동조하였던 것입니다.
자신이 불법 자들과 합세하면, 예수님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죄와 동조하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남은 그의 양심으로도, 그의 권력의 힘이라면 얼마든지 석방할 수 있었는데도, 죄 없이 심문을 당하고 고난과 수치를 당하시는 죄인 아닌 죄수인 예수님을 죽이라고 부정판결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부당한 심문을 받으심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총독이라는 권력의 힘으로, 얼마든지 예수님을 석방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의 통치권을 쥐고 있는 그의 수하에는 잘 훈련된 막강한 군사들이 있었습니다.
만약 어떤 경우를 당하면, 얼마든지 군사력으로 치안을 다스리며 예수님을 보호 할 수도 있습니다.
유대인의 총독 빌라도는 로마의 정치적 배경으로, 식민지 유대인들을 얼마든지 진압할 수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판결 권이 있음으로, 얼마든지 소신대로 무죄를 선언하고 생명을 구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권력을 가진 자가 무리들의 말을 듣고 따랐다고 하는 것은, 그가 얼마나 수없이 무죄하고 약한 자들을 억울하게 죽였을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는 또 자기의 뜻이 아닐지라도, 적어도 옳은 사람에게 아무상관도 하지 말라고 하는 사랑하는 아내의 충고도 한 번쯤은 생각해 보았어야 합니다.
그러나 양심의 가책도, 아내의 충고도 무시하고, 죄도 흠도 없는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죽이도록 부도덕한 무리들에게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했습니까?
그 불법의 책임을 벗으려고 대야에 물을 떠다가 손을 씻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생명을 해한 책임이 씻어졌나요?
손이나 씻는다고 그가 불법을 저지른 죄가 씻어졌나요?
손이나 씻는다고 해서 그가 무죄한 자가 되었나요?
죄인이 손을 씻어서 죄가 사해지고 책임을 벗는다고 하면 얼마나 편리하겠습니까?
그렇게 쉽게 죄가 씻어지고 책임을 벗는다고 하면, 법이 왜 필요하고 감옥이 왜 필요하며, 죽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손을 씻어서 죄가 없어진다고 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왜 필요하고 믿음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손을 씻어서 죄가 없어진다고 하면, 회개하고 자복 할 일도 없을 것이고,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실 필요도 없었을 것이며,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비둘기나 양이나 소나 염소의 피로 죄를 씻어보려 했어도 모두 허사였습니다.
그런데 빌라도가 세숫대야에 물을 조금 떠다가 손을 씻는 것으로 책임을 면하려 했나요?
그러나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오히려 크리스천의 입으로 신앙고백을 할 때마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라는 불명예의 고백은 끊임없이 외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거지 나사로는 부자의 문간에 누워서 헌데를 앓고 있을 때, 개들이 상처를 핥는 고난을 받으며, 부자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들을 주워 먹고 살았습니다.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무시하고 외면하며 무관심했던 부자는 죽어서 음부로 들어가 고통을 받았다는 것을 성경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한 생명을 귀하게 여길 줄 모르고, 죽어 가는 생명을 외면한 채, 굶주린 생명 앞에서 자신의 부요만 치부하는 일이 얼마나 무서운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굶주리는 생명이,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죽어 가는 생명이 나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모르는 체하는 죄가, 심판 주 앞에서는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 없는 줄을 알면서도, 십자가에 달아서 죽이라고 난동을 부리는 무리들을 진압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과 동조하여 불법에 가담하고 말았습니다.
부당한 행동에 가담하여 죄 없는 사람의 생명을 죽이고, 사람의 소리를 순종하여 하나님을 처형하는 일에 찬성하였던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마귀가 꼬이는 말에 순종하였다가, 선악과를 따먹고 인류에게 죄와 사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빌라도는 양심과 아내의 말을 듣지 않고, 불법의 무리들의 말에 동조하였다가 창조주 하나님을 처형하도록 불법에게 내어주어 영원한 진노와 멸망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3. 빌라도는 자신의 영혼구원 앞에서 손을 씻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동정을 받아야 할 사람, 구제를 받아야 할 사람, 사랑을 받아야 할 사람,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법에 얽매이고 무리에게 멸시를 당하고, 친구들에게 배반을 당하고, 권세에게 눌린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생의 기반을 잃고, 절망과 기아에서 허덕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우리가 전도해야하고 영혼을 구해야 할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정의가 불의로 가리어지고 진리가 비 진리에게 눌려진 채, 고통을 당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생각이 있어도 나타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그들은, 조소와 경멸과 시기에 붙들려 있습니다.
강한 자들에게 아첨하고 알랑대며, 약한 자들을 핍박하기도 합니다.
죄가 없어도 죄인으로 취급당하고, 이유 없이 죽임을 당하며, 예수님보다 바라바와 같은 폭력 자가 선대를 받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사랑도 긍휼도 동정도 매 마른 것입니다.
구제도 봉사도 구호뿐이고, 형식적인 행사로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인간 구원은 아 에 군중들의 폭동과 함성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습니다.
책임을 져야 할 자들은, 힘도 쓰지 않으려 하고, 노력도 하지를 않으며, 그들 앞에서 손을 씻으며 책임을 벗으려고만 합니다.
영혼이 멸망을 받을 목전에서 외면을 하고 방관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감정에만 치우쳐서 영혼의 미래를 생각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군중들은, 그 살인의 책임을 자신과 자신의 후손들에게 와도 좋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십계명에서는 “네 이웃을 해하려고 거짓 증거하지 말라”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웃을 해하고 자신의 부귀와 영화를 얻으려만 합니다.
우리의 주위에는 가난하고 어려움 당하는 영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을 외면하고 나의 부와 나의 풍요만 채우며 사는 것이 행복입니까?
굶주린 자가 빵을 훔쳤다고 해서 죄인이라고 엄하게 다스려야만 합니까?
추위로 얼어 죽을 위기에 있는 사람이, 옷을 훔쳤다고 재판에 넘겨야 하나요?
자신은 그런 가난과 굶주림에도 양심을 지킬 수 있을까요?
크리스천은 굶주린 자를 책망하기 전에 동정이 앞서야 하는 것이 도리입니다.
굶주린 여자가 자기의 몸을 팔아서라도 살아가려고 할 때, 가난을 모르고 살아온 부한 사람들은 현장을 덮쳐서 여자를 잡아다가 예수님 앞에 끌고 와서, “이런 자는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핏발 서린 눈빛을 번뜩거리는 모습과 무엇이 다릅니까?
정상을 참작하기보다는 약한 죄인들을 엄하게 다스리려고 할 때, 영혼구원은 누가 할 것입니까?
남의 무딘 양심을 비웃기 전 자신의 양심을 돌아보고, 남의 어린 신앙을 비웃기전에 자신의 양심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남의 단점을 꼬집기 전에, 자신의 잘못을 먼저 돌아보아야 합니다.
군중심리에 흡수되어서 영혼을 망치지 말고, 감정에 치우쳐서 영혼을 무시하지 말고, 인색함으로 영혼을 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육체는 잠시 세상에 머물다가 가지만, 영혼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빌라도의 순간적인 무관심은 자신의 영혼뿐만 아니라, 폭동의 무리들의 영혼까지도 망치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빌라도의 순간적인 진리의 외면이, 많은 후손들의 영혼들 까지 망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육체에 치우치고 세상일에 치우치다가보면, 영혼의 문제를 망각하는 어리석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영혼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을 누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를 외면하지 말고, 생명을 무시하지 말고, 영혼을 무관심하게 여기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성경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기독교의 황금률입니다.
남에게 관심을 갖는 것 많 큼 자신에게도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으며, 내가 사람들을 사랑하는 많 큼, 자신도 사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기주의가 아닙니다. 독선주의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사랑과 봉사와 협력을 중하게 여기는 종교입니다.
내가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것 많 큼, 하나님은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십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일을, 사소한 감정과 세상일로 인해 가리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4. 영생의 삶에서 손을 씻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오래 살고 싶어 합니다. 남보다 많이, 남보다 큰 것을, 남보다 좋은 것을 갖고 싶어 합니다.
삶에 대한 애착도 큽니다. 그 삶은 이 세상만 아니라, 영원에 대해서도 같습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그 영원한 것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어려서부터 율법을 모두 지킨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영생을 얻는 길을 구하였으나, 재물을 모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너는 나를 쫓으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실망을 하고 되돌아간 그가, 혹시 회개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었을는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빌라도는 마지막 기회마저 잃어버린 저주의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창조의 주, 생명의 주, 영생의 주를 십자가에 처형을 하게하고, 책임회피의 손을 씻었으니, 빌라도는 스스로 영원히 멸망 받을 저주와 진노를 자청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영생의 기회, 회개할 기회를 손을 씻어서 스스로 포기했습니다.
영생의 삶을, 손을 씻음으로 멸망을 자초한 것입니다.
천국의 시민권이 될 수 있는 자격을, 불의와 동조하는데 찬성하는 편에서 손을 씻어 버렸으니, 지옥의 저주를 끓어 들이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세수 대는 어떻습니까?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남의 허물과 죄를 씻어주는 일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한 것과 같이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 총독과는 아주 정 반대로, 은혜와 사랑을 베푸신 세수 대였습니다.
참새 알을 얻기 위해서 타조 알을 버리고, 보석을 주고 무가치한 돌과 바꾼다고 하면 누구나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을 할 것입니다.
빌라도는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육신적으로 세상에 잠깐 거하며 누릴 유대총독의 권세와 권력을 지키려고, 진주보다 값지고 황금보다 귀한 영혼의 생명이 되시는 예수님을 포기했으니, 참으로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런데도 지금도 빌라도의 행위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주일을 범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생명의 말씀을 듣기보다는, 잔치 집을 찾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에 바쁜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꼬여 범죄케 한 사탄 마귀가, 믿음의 양심과 생명의 보루를 무너뜨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처럼 사탄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고 이겨야 합니다.
강원도 평창군에 고 명균 목사님의 친척 중에, 고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주일날 아들이 강에서 수영을 하다가 빠져 죽었습니다. 사람들이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권사님에게 알렸으나, 예배를 마치기까지 나가지를 않고, 예배를 마친 후에 강으로 나가서 죽은 아들의 거적을 들치고는, “이놈아 잘 죽었다 주일날 예배드리지 않고 수영하다가 죽었으니, 죽어도 싸다 싸,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런 놈을 더 속 썩이지 않게 일찍 데려가시니 감사합니다.” 하고 감사의 기도를 하고 나서 통곡하며 울더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고 권사의 모범적인 신앙은 평창군에 널리 감동적으로 많이 알려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천 날보다 예수님께 나아가 예배드리는 한날이 귀합니다.
귀한 것을 잃어버리고 만 빌라도 같은 어리석은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순간 때문에 영원한 것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이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순간보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믿음으로 지켜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