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밑의 도박꾼들
2010-03-08 09: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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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거리에서 나가면 많은 십자가들을 봅니다.
병원마다 십자가를 상징 마크로 사용하고 구급차와 봉사기관들도 십자가를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몸을 치장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목걸이도 하고 귀걸이도 하고 다닙니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양쪽 귀에 십자가를 귀걸이로 달고 다니는데 그들이 그 십자가의 의미를 알고 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원래 십자가는 중범 죄를 저지른 죄인들을 가장 잔혹하고도 참혹하게 죽이는 끔찍하고 무서운 사형 기구입니다.
처음 이 십자가의 사형방법은 폐르샤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폐르샤인들은 이 땅은 페르샤인들의 신인 올무즈(Ormuzd)에게 바쳐진 신성한 땅이기 때문에 중범 죄를 저지른 죄인들을 처형할 때 신의 소유물인 땅을 더럽혀서는 안된 다고 생각해서 중죄인의 시체를 땅에 닫지 않도록 높이 들어올리려고 한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 십자가의 처형 방법은 폐르샤에서 북 아프리카 칼타고로 건너갔고 칼타고에서는 다시 로마로 전해졌다고 합니다.
로마에서는 이 십자가의 처형기구를 반란자들이나 노예들이나 가장 극악한 범죄자들에게만 적용했습니다.
그러나 로마인이나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은 십자가의 형벌을 가하지 않았습니다.
재판관에게 사형 언도를 받은 죄인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형장까지 끌려가서 옷이 벌거벗겨지고 채찍으로 맞아 온 몸에 피투성이가 된 채 두 손과 두 발에 굵은 쇠못이 박혀서 높이 공중에 매달려 죽게 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린 채 피를 많이 흘린 사형수는 수분이 모자라 심한 갈증으로 목이 마르고 뜨거운 태양열에 몸이 그슬리고 피 냄새를 맡은 파리와 모기떼들은 상처를 빨고 물어뜯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며 사형수는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 저술가 “클라우스너”(Klausner)는 십자가의 처형에 대해서 “십자가 처형은 인간이 복음 복수의 수단으로서 지금까지 고안해낸 방법들 중에도 가장 지독하고도 잔인한 죽임이다”고 말했습니다.
키케로는 “가장 잔인하고 가장 가공할 처형이다”고 말했고. 타키투스는 “오직 노예에게만 적합한 처형”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런 처참하고 잔혹한 사형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잔혹하고 처참한 십자가의 사형틀은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인하여 그 비참한 십자가, 치욕의 십자가, 저주의 십자가가 오히려 용서와 사랑과 영광과 승리의 상징으로 바뀌었습니다.
십자가는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주는 대신 죄인들에게 죄 사함과 구원과 영생과 화해와 평화의 상징으로 여겨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기관마다 건물마다 병원마다 이 십자가의 상징을 자랑스럽게 사용하고 환자들을 운반하는 구급차들에게 이 십자가를 상징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멋으로 이 십자가를 목걸이도 하고 양쪽 귀걸이도 하고 다닙니다.
그것은 분명 그들이 십자가의 고통과 무게가 얼마나 무겁고도 힘든 것인 줄을 알지 못하고 달고 다닐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달려 죽으신 이후 그 참혹하고 무서운 중형의 십자가에 대하여 이제는 전쟁중일자라도 사상이나 체제가 달라도 십자가를 상징마크로 하는 구급차에게는 무기를 발사하지 않기로 조약을 맺어졌던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교파에서는 이 십자가의 상징 앞에 성호를 걷고 경건하게 대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성스러운 십자가의 상징물 아래에서 이상하게도 도박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도박꾼들입니까?
1, 종교적인 도박꾼들입니다.
당시의 대제사장과 율법사들과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장로들은 종교의 지도자들이며 시대의 양심적인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성전과 회당에서 민중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제사하고 영적 양떼들을 가르치고 올바른 신앙으로 인도하는 영적 목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 한 마디와 그들의 행동들은 모든 백성들에게 좋은 신앙적인 귀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이고 신앙적인 지도자들이 되지 못했습니다.
예레미야 9:8, “그들의 혀는 죽이는 살이라 거짓을 말하며 입으로는 그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나 중심에는 해를 도모하는 도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훈계하면서도 자신들은 성전에서 로마 돈을 이스라엘의 돈과 바꿔주며 양과 비둘기를 팔아서 치부하는데 힘썼으며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 거룩한 성전을 강도들의 굴 혈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중하게 여긴 것이 아니라 장로들의 유전을 중하게 여겼고(마태복음 15:1) 말로는 가르치면서도 실제 생활에서는 자신들의 가르침과는 상반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들’이라는 책망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길 가실 때에 따르든 제자들이 시장하여 밀 이삭을 비벼 먹었다고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한다고 시비를 걸었으며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들을 치유하시면 안식일을 어기는 자라고 비난을 하였고 죄인들의 죄를 사하는 선언을 하시면 참람하다고 비소를 퍼부었습니다.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었다고 수군거렸고 소외 받은 죄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해주면 죄인들과 자리를 같이 했다고 비판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민중들을 대할 때 자신들의 종교적 권위를 실추시켰고 자신들의 잘못 지도한 율법을 능력 있게 모범을 보이자 자신들의 체면과 인기에 도전 받게 됐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떨어지는 자신들의 권위에 당황했고 그들은 재물과 재산을 모으는데 방해되고 걸림이 되는 예수님을 미워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레미야 8:12,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책망합니다.
그러던 대제사장 가야바를 위시한 종교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제자 가롯인 유다를 매수하여 은 30에 예수님을 넘겨받을 약속을 흥정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들은 군병들과 폭도들을 매수하여 밤중에 예수님을 붙잡아 대제사장 가야바의 저택 뜰까지 끌고 오는데 성공하였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자신의 종교적 권위를 손상 받은 불만을 자기 집 뜰에 끌려온 예수님으로부터 트집을 끄집어내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아무런 죄와 허물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먹은 가롯 유다는 그래도 눈곱만한 양심의 가책이라도 받았는지 받은 돈을 다시 되돌려 주려 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목을 매어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도 가야바의 뜰에서 작은 계집종에게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다가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밖으로 뛰어나가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회개 할 줄 모르는 종교의 지도자들은 스데반을 돌로 쳐죽였고 야고보를 목베어 죽였으며 베드로도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바울도 죽이려고 했습니다.
사람을 살리고 영혼들을 잘 지도해야 할 교계의 지도자들이 자기들의 비위에 맞지 않고 자기들의 권위에 맹종하지 않는 다고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무지한 군중들을 충동시켜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게 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알지 못하고 진정한 종교의 의미도 모르는 채 십자가를 높이 세우고 그 십자가 아래에서 종교 도박을 즐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오늘날에도 십자가를 걸어놓고 종교적 도박을 즐기는 지도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신령하게 입으로는 잘 가르치고 설교는 곧잘 하면서도 종교 감투에 눈이 어두워 높은 자리만 탐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3:2-1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 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 자는 높아지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현대판 종교적 도박꾼들도 있습니다.
십자가를 상징으로 그 밑에서 겸손한 것이 아니라 서로 높은 큰 감투를 쓰려고 혈안이 되어 온갖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밑에서 겸손하기보다는 십자가를 이용해 출세의 도구로 이용해 높은 감투를 쓰는 수단으로 삼는 것입니다.
권세를 잡고 교단을 움직이려 한다는 것입니다.
2, 정치적인 도박꾼들입니다.
빌라도는 당시 로마 정부에게 돈을 많이 주고 유태인의 총독의 자리를 위촉받은 사람입니다.
로마 정부의 권한으로 유대인의 총독이 된 그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죽을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권세와 권력을 가졌습니다.
요한복음 18:28-32, “저희가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청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저희는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청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저희에게 나가서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 하니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일러라” 대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빌라도는 심문하는 과정에서 예수님은 아무 죄도 흠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세 번씩이나 고소 자들에게 예수님은 무죄하다고 증명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사랑하는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어제 밤 꿈 이야기를 하면서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무리를 충동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죽이라고 아우성을 치자 소란한 군중들이 민란이라도 일으킬까봐 양심에 꺼리는 부정판결로 예수님을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옳은 것을 옳게 볼 줄 모르는 정치인, 정의를 구현하지 못하고 불의와 타협하고 불협화음에 두려워 아첨하는 정치인, 그가 두려워 한 것은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종교의 지도자들이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아우성치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라고 떠드는 폭도들이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민란이 나고 폭동이 일어 날 것이 겁나는 것도 아닙니다.
민란이 나면 그는 유대인의 총독으로 얼마든지 로마 군인들을 동원하여 폭도들을 진 앞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두려워 한 것은 무리들이 외친 한 마디 말입니다.
“만일 당신이 이 사람을 죽이지 않고 놓아준다면 당신은 가이사의 충신이 아닙니다”(요한복음 19:12).
그 말은 “만약 당신이 우리가 지금 고소하는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지 않으면 우리는 로마의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에게 사람을 보내 상소해서 유태인의 총독을 당신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바꾸게 하겠다”는 협박입니다.
빌라도는 그 말에 가슴이 철렁하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로마 정부에 얼마나 많은 돈을 주고 산 유태인의 총독자리인데 죄수 하나를 죽이지 않는 다고 하루아침에 총독의 자리를 빼앗기게 된다니 이것은 생각지도 못할 일입니다.
그래서 그는 죄 없는 죄인리라 할지라도 이들이 요구하는 예수님을 죽여서라도 자신의 정치적 권좌를 지키려고 생각 한 것입니다.
자신의 총독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억지쓰는 종교의 지도자들의 요구에 비위를 맞춰야겠다고 생각 한 것입니다.
지도자들에게 고소당해 재판 받는 죄 없는 사람을 죽여서라도 총독자리를 지키고 싶었습니다.
약하고 힘없어 보이는 저 유태인 한 사람을 죽여서라도 자신의 권좌를 지키는데 도움이 된다면 양심에 좀 거리끼지만 그는 퍽 다행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너 죽고 나 출세하자”는 심보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죄 없는 예수님을 죽이고 유태인 총독 자리를 지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는 아마 30년 전 베들레헴에서 헤롯이 두 살 아래의 사내아이들을 다 죽여서라도 유태의 왕 좌를 지키려고 살인만행을 저지른 사건을 잘 알고있었을 것입니다.
그 헤롯에 비하면 자신은 죄 없는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니 그보다는 낫다고 생각하였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어떻게 하던지 총독의 권좌를 지키는 것이 그의 꿈이요 야망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랑하는 아내의 충고도 무시하고 양심의 가책도 어겨가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는 부당한 판결을 내린 것입니다.
빌라도는 군중들에게 아첨이라도 하려는 듯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예수님을 채찍으로 쳤습니다.
그의 무지하고 미련함은 진리 앞에서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의 잔인하고 혹독함은 군병들에게 예수님을 조롱받도록 내어 주었습니다.
왕 같은 예수님의 권위와 위엄 앞에 위압되어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 패를 써서 십자가에 달기도 했습니다.
죄도 흠도 없는 생명을 자신의 정치적 도박의 수단으로 삼은 그의 남은 양심의 행위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죄 없는 사람을 죽였다는 양심의 가책을 면하고 자신의 책임을 벗기 위해 세숫대야에 물을 떠다가 손을 씻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세숫대야에 손이나 씻는다고 책임을 면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고 신앙고백을 합니다.
정의와 공의를 무시하고 그는 불법판결로 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라고 군병들에게 내어 준 정치도박을 한 것입니다.
이솝의 우화 가운데 개구리들이 살고 있는 평화스러운 호수에 어린아이들이 심심풀이로 돌을 던져 개구리를 맞추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개구리들은 돌을 던지는 소년에게 항의를 하였습니다.
“너희들은 재미로 돌을 던진다마는 우리 개구리들은 그 돌에 맞으면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잃는다”고 책망했습니다.
양심의 가책보다 권위를 중하게 여기는 정치 도박꾼, 죄 없는 사람을 죽여서라도 권세 높은 자리에 오래도록 군림하려는 정치 도박꾼, 아내의 충고와 양심의 가책도 아무 상관없이 자신의 권좌를 지키기 위해 살인을 행하는 정치 도박꾼,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지만 인기를 얻기 위해 힘있는 무리들에게 아첨하며 살인을 행하는 도박꾼인 것입니다.
3, 물질적인 도박꾼들입니다.
군인들은 국가로부터 급료와 옷과 병기들을 공급받습니다.
그들은 국방의 의무를 감당하며 일정기간을 국가와 국민의 재산을 지키며 국경을 지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조롱하고 멸시한 군병들은 로마 정부를 배경으로 한 막강한 군의 권력으로 사람들을 강폭하고 무소하며 착취를 했습니다.
누가복음 3:14, 세례 요한은 그들을 책망하고 잘못을 지적합니다.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광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그 중에는 유태인으로 로마 군병에 속한 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받는 봉급에 만족하지 않고 불쌍하고 힘없는 백성들을 폭력으로 위협하며 착취했고 고혈을 빠는 치안 통치자들이었습니다.
티끌 만한 조건만 있으면 권력으로 얽고 무력으로 묶어서 사람들에게 강폭하고 권세를 남용했습니다.
자기들의 비위에 맞지 않고 눈에 그슬리는 자들이면 어떤 조건이나 이유를 걸어서 라도 무소하고 괴롭히며 난폭하는 자들입니다.
신분이 높은 사람과 상전들에게는 아첨하고 굽실대면서 하류층에 속하는 사람들에게는 거만하고 무례하게 행패를 부리는 맹종 자들입니다.
약한 자들에게는 권력을 이용해 고통을 주고 희롱하면서 자기 만족을 찾고 좋아하는 파렴치한들입니다.
그들은 지금 죄도 없고 흠도 없는 목수 출신의 동족 예수라는 사나이를 쇠망치로 내리쳐서 십자가에 못 박고 선지피를 흘리며 몸부림치며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며 몸부림치는 죄 없는 젊은이의 죽음 앞에서 아무 동정이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으며 벗긴 사형수의 옷을 서로 한 가지씩 차지하고도 모자라 통으로 짠 옷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주사위를 던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국민의 세금으로 녹을 받으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할 군인들이 백성들을 괴롭히며 광포한 행동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힘있는 정치인들의 그릇된 명령이라도 맹종하였고 그들의 오만한 행동 앞에서도 무조건 따르며 녹을 받아먹는 자들입니다.
죄야 있던지 없던지 그것은 그들에게는 문제가 아닙니다.
억울하게 죽던지 살던지 그것이 그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죄 없는 한 사람이 죽음으로 자신들에게 돌아올 소득이 있다면 그들은 무엇보다 대 찬성입니다.
남이야 죽던지 살던지 자신의 치부에 늘어나는 재물만 있으면 그기에 만족하고 관심을 가지는 자들입니다.
“너 죽고 나 수입 잡자‘는 심보입니다.
그들은 십자가 밑에서 도박의 주사위를 던지며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진정한 신앙적인 면으로 살펴 볼 때 군병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창세기 14장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모습을 통해 처세를 살펴봅니다.
아브라함은 그돌라오멜과 그와 동맹한 왕들이 소돔과 고모라를 쳐 재물을 빼앗고 사람들을 끌고 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318명을 이끌고 단까지 추격하여 그들을 치고 빼앗겼던 재물과 사람들을 모두 되찾아 데리고 옵니다.
소돔 왕은 사웨 골짜기까지 마중 나와 사람들만 보내고 재물들은 모두 아브라함에게 가지라고 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내가 치부하였다 하는 말을 듣지 않겠다”고 하며 빼앗은 재물들까지 모두 되돌려 보냅니다.
이것이 진정 믿음을 가진 군병의 자세요 양심을 가진 사람의 행동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쳤을 때 아간은 시날 산 외투와 은 200 세겔과 금 50 세겔을 숨긴 죄로 아이성과의 싸움에서 이스라엘은 크게 패망을 당합니다.
결국 그 죄는 드러나 아간과 그의 가족들은 아골 골짜기에서 돌무더기에 쌓여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십자가 밑에서 자기의 치부를 위해 주사위를 던지는 도박꾼들은 없나요?
십자가를 걸어놓고 그 십자가 밑에서 자신의 물욕과 치부에 치우쳐 도박하는 자들은 없나요?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돈을 바꿔주고 비둘기를 파는 자들의 상을 둘러엎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장사꾼들을 쫓아 내셨습니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구실로 십자가 밑에서 경건을 가장해 물욕에 치우쳐 재물을 치부하는 도박꾼들을 주님은 추방하셨던 것입니다.
학개 1:9,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하고 책망하십니다.
십자가를 높이 세우고 그 밑에서 신앙을 가장해 재물을 축적하며 물질도박을 하는 자들의 수입을 하나님은 불어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주신 것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정직하게 사는 삶이 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