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라

2010-03-07 09:00 관리자 176
너도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라
누가복음 24:13-35.




  사람들은 모두 제각기 인생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다만 그 길이 어떤 길이냐 하는 것의 차이뿐입니다.
  희망과 꿈이 부푼 아침 길을 달려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괴로움과 고난의 고갯길도 있을 것이고, 유혹과 위험의 비탈길도 있을 것이고, 실망과 좌절의 석양 길을 걷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이 모든 길들이 순 간, 순 간 다른 모습으로 접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이 모든 길들을 시시각각으로 경험하며 걸어가기도 합니다. 굴곡 많은 인생길을 살아온 뒤에야 삶의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운명론을 내세우며 위로 받기도 하지만, 사람이 한 평생을 살아갈 때 굴곡이 없이 지나간다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등산을 할 때에도, 많은 굴곡과 변화 있는 자연의 형태에서 감상하고 찬사를 하게 되고 기분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평탄한 길뿐이라면 등산의 묘미가 없을 것입니다.
  올라가는 길도 있고, 내려가는 길도 있고, 거친 길도 있고, 평탄한 길도 있고, 위험하기도 하고, 안전하기도 할 때, 변화 많은 등산을 마치고 돌아오면 등산했던 기분이 한결 흐뭇하고 마음이 툭 트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우리 인생이 길에도 실패와 성공, 고난과 역경, 위험과 안전한 삶들이 교차되어질 때 한평생 살아온 삶이 의미가 더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이 나이가 많아져서 늙으면 이마에 주름이 많이 생기고 피부가 늘어지는 것은 그 많은 인생의 굴곡을 보여주는 것만 같습니다.
  한 평생을 살아온 수많은 사연들이 희비가 교차되어 흘러갈 때, 남겨주는 것은 얼굴에 주름이 아니겠습니까?
  한번 패여 진 세월의 굴곡은 더욱 깊어지고 굳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보여주고 있는 엠마오 길의 두 청년의 모습은 마치 우리 인생길의 단막극을 보여주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꿈을 안고 도시를 찾았던 그들은 실망한 채 시골로 향했습니다.
  돋는 해를 보며 올라갔던 그들은 석양을 보며 내려갑니다.
  열광적인 환호와 찬사를 보며내 예수님을 따랐던 그들은 예수를 잊고 갑니다.
  조국의 광복을 기대했던 그들은 포기한 채 내려갑니다.
  하나님의 일을 모든 백성들 앞에서 능력으로 행하실 것을 기대했던 그들은 허무하게 끝날 일들에 못내 아쉬워하며 내려갑니다.
  그때 이들에게 인생의 새로운 전기가 시작되었으니, 나사렛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도 놀랍고 감탄할 일대 전화기였습니다.
  그러면 이들의 변화된 그때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1. 실망의 석양 길에 예수님은 위로의 동반자가 되어주셨습니다.
  대망의 아침도, 약진의 한나절도 실속 없이 끝나버린 석양 길에, 실망과 좌절을 안고 내려가는 나그네들은 어느 곳이나, 누구에게나 위로를 받을 곳이 없었습니다.
  이들의 시야 앞에서 꿈을 품게 하였던 예수님은 원수들에게 체포되었고, 그들의 혁명적 지도자였어야 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이 박혀 죽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걸었던 소망, 예수님께 걸었던 꿈이 골고다에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들의 눈앞에서, 어떤 변화 있는 큰 사건을, 능력 있게 행하여 주기를 기대했던 예수님이 너무도 연약하게 죽어버리는 것을 볼 때, 실망은 컸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믿음이 아니라, 어떤 표적이나 이적을 기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갈릴리의 분봉 왕은 예수님의 소문을 일찍이 듣고 있었으나, 예수님을 보고 기뻐한 것은, 무엇이나 이적을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도 예수님에게서 표적을 보여주시기를 기대하고 요구하였습니다(마 12:38).
  그러나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병 고침의 이적, 부자가 되는 표적, 재수가 좋아지는 능력을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요즈음 신앙의 상태는 차츰 기복신앙으로, 인본주의로, 세상 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마 11:7-8)고 예수님은 나무라십니다.
  (현대적인 의미로 보면, 광야는 (교회), 바람은 (세상풍조), 갈대는 (애급인 입니다.)(왕하 18:21).
  이방, 우상숭배인 왕궁은(헤롯궁), 사도 요한은 이렇게 권고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또 어떤 사람들은 세상의 지위나 명예를 노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는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마 20:21)하고 요구했습니다.
  예수님을 이용하여 정치적 야망을 가지고 찾는 사람입니다.
  벳세다 광야의 모인 사람들이나, 그 후에 주를 찾는 사람들 중에는 떡을 염려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책망하셨습니다(마 16:8).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다른 목적을 가지고 찾아옵니다.
  신령한 영적인 목적을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라, 온갖 세상 적이고, 육신 적인 목적을 위해서입니다.
  표적과 이적을 기대하고 찾기도 하고, 병고치고, 부자 되는 목적을 두고 찾기도 하고, 인간적 사귐을 위하여 찾는 사람도 있고, 정치적인 목적을 두고 찾기도 합니다.
  극히 동물적 본능인 떡을 찾아 따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실망하게 됩니다.
  엠마오의 두 청년과 같이 실망하고 슬퍼하며 석양빛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두 허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찾고 얻어야 할 것을 그들이 잘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찾고 얻으려 한 것은, 모두가 동물적인 것이고 본능적인 것이고 세상 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두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는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들이 실망하고 근심하며 하향하는 길에 찾아오셔서 그들과 동행하여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속고, 실망하고 근심하며 슬퍼하는 무리들에게 위로 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그들의 꿈과 기대가 모두 사라져버리게 되자 슬퍼하고 근심하며 내려가던 무리들에게 예수님은 위로 자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를 잃어버리고, 죽은 예수를 슬퍼하며 석양을 향해 걸어가던 이들에게 하늘에 속하신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과 동행하여 주신 것입니다.
  땅만 내려다보며 세상만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팔레스타인의 나사렛 예수, 그 이상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 세상의 것에만 집착하던 이들에게는,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의 모습이상은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육신의 일에만 몰두한 이들에게는, 죽은 예수님의 불쌍한 것 이상은 알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좀 더 높고 거룩하고 신령한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2. 슬픈 저녁 길에 만난 예수님은 가슴을 뜨겁게 말씀했습니다.
  로마의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긴 이스라엘 민족들은, 언제나 다시 나라를 찾아 독립국이 되는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하고 열광적으로 따랐던 무리들은 기대하는 바가 컸고, 무리들은 늘어갔습니다.
  로마의 학정에 시달리며 고난을 겪고 있는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경제적 가난에 굶주렸던 사람들이, 두 차례나 떡과 고기를 얻어먹고 배부른 시간을 못 잊어 찾아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거기에 약삭빠른 경제 자들은 예수를 민족의 지도자로 세우면, 모든 경제문제들이 풍부해지리라고 생각하고, 따르는 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형식만 남은 종교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영적인 기갈과 기근에서 예수를 알게 되었습니다.
  정신적인 지도자요, 영적인 랍비로 따르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모든 종교의 지도자들은 무너진 성전을 회복하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집례 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정부와 결탁하여 개인 치부에만 힘썼고, 성전 안에까지 도적과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영적 고뇌에 빠진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가르침은 형식적 율법주의가 아닌 진실 된 삶의 방법과 영적 생동감 있는 태도를 알게 하였던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통하여 이상에 그리는 새로운 시대를 기대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품위에서 느끼는 온유함과 말씀에서 듣는 새로운 가르침, 능력에서 나타나는 이적과 기적, 조용하고 평화로우면서도 담대함은 소리 없이 힘 있게 전진하는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이상향의 세계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기대를 걸 수 있을 만큼 풍족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모두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최고의 종교 지도자들이 그들의 모든 꿈을 깨뜨려 버린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율법사들이 모든 백성들과 무리들을 현혹하여 예수님을 처형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종교의 지도자들은 역사의 흐름을 끊어버린 비정한 사람들로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속한 나라보다는 천국을 가르치셨고, 이 땅에 속한 일보다는 하늘에 속한 일을 힘쓰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 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그런데 사람들은 여기에 속한 나라를 잃어버린 것에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나라를 회복하려고 하면서도 실제 회복하여야 할 하늘에 속한 나라는 마귀에게 구속당하여 잃어버리고서도 회복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육신이 살기 위한 이 땅에 속한 나라도 귀하지만, 영혼이 영원히 살게 될 하늘에 속한 나라는 더욱 귀한 것을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육신의 나라가 귀한 것처럼, 하늘에 속한 나라는 더욱 귀한 것입니다.

  굶주린 사람들이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에게서 보리떡을 먹고 찾아오면서도, 신령한 생명의 양식은 찾으려 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영적인 기근과 기갈에 처해 있으면서도, “양식이 없어 기근이 아니요, 물이 없어 기갈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기근과 기갈”임을 알지 못하고 동에서 서에까지 비틀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종교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형식적인 종교행상에 외면당하는 것을 시정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께 증오로 대신 갚으려고 불법재판으로 처형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을 예배하고 신앙의 본을 보여야 할 지도자들이 십자가에 처형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에 능하신 선지자를 백성을 지도하며 모든 일에 협력해야 할 장로들이 오히려 처형하는데 앞장서고 있으니,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선하게 의를 이루신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끌어가야 할 율법사들이 죽이는데 앞장섰으니,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옳은 일을 감당하신 왕을 처형하도록 사형판결에 넘겨준 관원들을 볼 때,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은 슬퍼하며 석양빛을 보며 내려가는 두 사람에게 접근하셔서, 이 모든 일들은 선지자들의 예언된 글을 이루신 것임을 말씀으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두 사람이 지금까지 본 것은, 죄 없으신 예수님은 종교의 지도자들이 무참하게 죽여 버린 사건에 대하여 슬픔과 분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선지자들의 예언된 것이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두 사람의 마음이 뜨겁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두 사람의 마음에 쌓인 슬픔의 빙산을, 한꺼번에 녹아내리게 하였던 것입니다.

3. 좌절의 밤길에 만난 예수님은 사명으로 올라가게 했습니다.
  두 사람은 동행하시며 말씀을 가르쳐주시는 분이 누구신줄 알지 못했지만 날이 저물고 어두워지자 길을 지나쳐 가시려는 예수님을 강권하여 자기들의 거처로 인도합니다.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 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예수님은 그들을 따라 거처로 들어가셔서 저녁식사를 함께 하시게 됩니다.
  부활 후 첫 번째 식사입니다.

  예수님은 떡을 가지 사 축사하시고 떼어 두 사람들에게 주실 때에, 저희들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
  결코 그 떡이 눈을 밝게 할 능력이 있는 게 아닙니다.
  아마 예수님의 식사분배방법은 특징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벳세다 광야에서 5천명을 먹이실 때에나, 4천명을 먹이실 때에나, 성경에 기록되지 아니한 식사 때에도 예수님께서 식사 분배하시는 모든 절차에 예수님만의 특징이나 분위기가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의 손으로 주시는 떡을 받고 그들의 눈이 열려지고 밝아진 것입니다.

  엘리사의 기도로 계하시의 눈이 밝아졌고(왕하 6:17), 변화 산에서 베드로의 눈이 밝아졌으며(막 9:5), 예루살렘 성문 앞에서 죽어가던 스데반의 눈이 밝아졌고(행 7:55),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울이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고 눈이 밝아졌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다 같은 지체를 가졌으나, 신령한 능력을 받지 못하며, 귀로 듣지 못하고, 눈으로 보지 못하고, 입으로 증거하지 못하는 것뿐이요, 결코 신령한 음성이 없는 것도 아니요, 신령한 세계가 없는 것도 아니요, 신령한 증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나의 죄악 됨과 허물됨과 부족함 때문에 영계의 어두움이 가득한 것뿐입니다.
  엠마오의 두 사람은 예수님의 손으로 주시는 떡을 받고, 예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죽으셨든 예수님이 부활하신 모습입니다.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의 시야에서 떠나셨습니다.
  아마 좀 더 머무르고 계셨더라면 변화 산에서의 베드로처럼, 그 곳에 머물러 살자고 했을 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에 땅에 계시는 동안, 많은 사람을 만나시고,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결코 한 곳에 오래 머물러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 때 두 사람은 지금까지 길에서 있었던 일들을 회상하며, 마음이 뜨거웠던 것을 기억하고, 즉시로 그 밤에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갔습니다.
  그들은 실망과 슬픔과 좌절의 길을 새로운 사명을 안고 올라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시고 자기들에게 보여주신 모습을 증거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임한 사명입니다.
  그 밤에 자기들이 느끼고, 보고, 체험한 것을 증거 해야겠다는 염원, 그것이 사명이 아니겠습니까?
  상상하지도 않았던 놀라운 사실을 알았을 때, 그것을 증거 해야겠다는 뜨거운 열정, 그것이 사명이 아니겠습니까?

  천동설이 지배하던 그 시대에 지구 공전 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 목사는 사형을 받은 것이 그 사명 때문이고, 그리스의 수학자 아르키메데스가 아네쿠도트의의 금관의 부피를 재는 방법을 발견했을 때, 목욕탕에서 벌거벗고 뛰어나와 거리를 돌며 “알았다. 알았다.”하고 소리친 것도 그 사명 때문이었고, 바울이 “내가 복음을 증거하지 않으면 화가 임할 것이다”고 한 것도, 그 사명 때문입니다.

  두 사람은 그 밤에 즉시 예루살렘으로 달려 올라가, 11사도들과 함께 한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과연 살아나셨고, 자기들이 만났었고, 같이 걸었으며, 말씀하셨고, 떡을 주셨다고 증거 하였던 것입니다.
  사명의 사람은 정지하지 아니합니다.
  사명의 사람은 실망하지 아니합니다.
  사명의 사람은 포기하지 아니합니다.
  두 사람이 사명을 받았을 때 즉시 증거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사명의 사람이 되십시다.
  엠마오의 길은 변화 많은 길이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는 예수님을 찾는 희망과 꿈의 길이었으나,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보았을 때는, 내려가는 석양 길이 실망의 길이요, 좌절의 길이요, 슬픔의 길이었으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그 밤에는, 사명에 불타는 담대한 가슴으로 어둠도 뚫고 달려 올라가는 생명의 길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기회를 가집시다.
  주안에서 사명에 불타는 뜨거운 가슴이 열려지는 날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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