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64강: 이혼에 관한 교훈(10:1-12) a

2012-05-04 04:06 관리자 1209
Ⅴ. 베뢰아 선교(10:1-52)

앞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방문 길의 선교(8:31-9:50)에 관해 기록해 온 마가는, 여기서는 예수님의 베뢰아 선교(10:1-52)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이 부분은 이혼에 관한 교훈(10:1-12), 아이들을 축복하신 예수님(10:13-16), 부자와 천국(10:17-31), 세 번째 수난 및 부활 예고(10:32-34), 세베대의 아들들의 야심(10:35-45), 그리고 소경 바디메오를 고치신 예수님(10:46-52)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이혼에 관한 교훈[10:1-12]

<비교: 마 5:31-32, 19:1-12>

“이 단화는 독립된 것이며, 다음에 이어지는 단화는 이 단화에 의존하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 언급을 간략한 요약 보도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Schmidt, Rahmen, 238). 마르코가 이 언급의 작성자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대문자 사본에서만 의미가 있는 이 단화의 의도―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가까이 간다―에서 알 수 있다” (J. Gnilka, 하권, pp. 95-96).

슈바이처(E. Schweizer)와 불트만(R. Bultmann)1)은 마가(마르코)가 교회 논쟁의 전통적인 자료를 인용한 것이라 하고, 그닐카(J. Gnilka, 하권, p. 97)는 “우리는 여기서 이미 알려진, 예수가 제시한 해결에 관한 논쟁에 직면해 있다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는 유다교 적대자들, 어쩌면 경우에 따라서는 회의적인 교인들과 이 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 대화는 유다-그리스도교적 교회 공동체에서 생겨났다. 그리스어로 번역된 성서(칠십인역)가 인용되므로 헬레니즘적 유다 그리스도교에서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라고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불트만(R. Bultmann)은 “3절 이하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적들의 말이었을 것이다.”2)라고 하는데, 꼭 그렇게 볼 것은 아니다. 또, 그는 “4절의 표현은 전혀 불가능하다. 실제 토론에서라면 여기에 이혼 조건이 제시되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조건이 결여된 이유는 이 말이 예수님은 이혼을 전적으로 반대한다는 견해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데 있다.”라고 하지만, 적들의 의도가 정확한 이해가 아니라 예수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을 보아, 오히려 그 조건을 제시하지 않은 것이 더욱 그럴듯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닐카(J. Gnilka, 하권, p. 96)처럼, 이 단화의 핵심 부분인 2-9절을 복음서 저자가 이렇다 할 개정 없이 받아들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가는 이 단화를【1】“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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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 Bultmann, op. cit., p. 29.
2) Ib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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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곧 가버나움(9:33)에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으로 가시니의 여행 경로에 대해 필사자들이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W. W. Wessel).

“이 말에 대한 또 다른 해석에 의하면, ‘요단강 건너편의 유대 지경으로 가시니’라는 번역도 가능하다. 유대의 행정 구역이 요단강 건너편(즉, 동편) 지역까지 포함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든, 또는 복음서 기자가 예수께서 베뢰아 지방, 또는 ‘유대에 접한’ 요단강 건너편 지방으로 가셨다는 사실을 나타내려고 그러한 표현을 썼다고 해석하든, 그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우리는 주께서 제자들과 함께(10절) 요단강 동편, 베뢰아를 통과하여―그래서 베뢰아 사역이라고 한다―남쪽으로 가셨으며, 또한 여리고로 가시면서(10:46) 다시 요단강을 건너오신다는 사실을 볼 수 있는 것이다”(W. Hendriksen).

늘 그런 것처럼, 예수님이 계신 이곳에 무리가 모여들었고, 또한 예수님은 늘 하시던 습관대로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러나 본절에서 무리를 가르치셨다는 말을 하기는 했지만, 은둔 사역의 특징이었던(9:30 이하) 열두 제자에 대한 집중적인 가르침과 훈련이 베뢰아 사역 중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10:10-12, 14, 15, 23-27, 29-31, 32-34, 38-45).

예수님은 무리에게 구원의 복음을 가르치시는 일에 열심이신데, 바리새인들은 그 예수님을 넘어뜨리는 일에 열심이었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2】“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하였다.

바리새인들은 2:16의 주석을 보라.

“시험하여”(페이라존테스, πειράζοντες)는 1:13의 주석을 보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여 질문한 내용, 즉 “사람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는 몰라서 질문한 것도 아니고, 알지만 예수님의 견해를 알고 싶어서 한 것도 아니라, 매우 간교한 의도로 한 것이다. 사실상, “동시대의 공적인 유다교에서 거의 모든 경우에 이혼이 가능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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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며, 이혼이 법적으로 규정되어 있었으므로[신 24:1-3], 예수는 율법에 항거하도록 도전을 받게 된다”(J. Gnilka, 하권, p. 98). 그뿐만 아니라, 율법대로 긍정한다 해도 묘한 궁지에 빠지게 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바클레이(W. Barclay)가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당시의 유대의 이혼관을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론상으로는 유대인의 결혼의 이상보다 고상한 이상은 없었다. 정절은 모든 덕 중에서도 아주 중요한 덕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이 부정의 죄 이외의 죄에 대해서는 오래도록 참고 계셨던 것을 안다.” “부정은 하나님의 영광을 떠나보냈다.” “모든 유대인들은 우상 숭배, 살인, 간음죄를 범하기보다는 차라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이 낫다.” “남자가 젊은 날에 얻은 아내와 이혼하면 제단조차도 눈물을 흘린다.” 이상은 이와 같았으나 실행은 거기에 미치지 못하였다.

전체적인 상황을 해친 근본적인 원인은, 유대의 율법에는 여자가 물건으로 간주된 것이다. 여자는 어떠한 법적 권리도 없었다. 여자는 남자 가장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이었다. 그 결과로 남자는 거의 어떠한 조건으로도 아내를 버릴 수 있었다. 반면에, 여자가 이혼을 청구할 수 있는 조건은 극히 적었다. 여자는 겨우 남편에게 이혼해 달라고 부탁할 정도의 권리뿐이었다. 여자는 자신의 의사 여하에 관계없이 이혼당한다. 그러나 남자는 그의 의사에 의해서만 이혼한다. 여자가 이혼을 요구할 수 있는 조건은 그녀의 남편이 나병에 걸렸거나, 구역질나는 가죽 만드는 직업을 가졌거나, 처녀를 겁탈했거나, 결혼 전의 죄를 잘못 고소했을 때뿐이었다.

유대의 이혼에 관한 율법은 신명기 24:1에 소급한다. 이 구절은 모든 문제의 기초이며 논쟁점이었다. 거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최초의 이혼장은 다음과 같이 극히 간단한 것이었다. “이것은 당신이 원하는 어떠한 남자와도 결혼할 수 있도록, 내가 당신에게 주는 이혼 문서이며, 또 퇴거의 편지이며, 해방의 증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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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에는 이 증서가 좀 더 정성스럽게 작성되었다. “이 강의 연안에 있는 OO읍에서 사용하는 계산법에 기인한 OO년 OO월 OO주 OO일, 나, A. B.의 아들 C. D.는, 또 이 땅에서 불리는 나의 어떤 이름에 의해서도 오늘 이것을 수여한다. 누구의 강제도 없이 나의 자유 의사에 의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어떤 이름으로 불렸던 간에 나의 아내였던, G. H.의 딸인 당신 E. F.과 이혼하여 당신을 집으로 돌려보낸다. 나는 지금 G. H.의 딸인 E. F.를 떠나 보낸다. 그런고로 당신은 자유이며, 당신이 원하는 대로 당신의 소원에 따라 결혼할 수 있으며, 누구도 그것을 방해할 수 없다. 이것은 모세와 이스라엘의 율법에 의한 이혼 문서이며, 이혼 법률이며, 이혼 증서이다.”

신약 시대에 와서는 이 문서를 숙련된 랍비가 쓰게 되어 있었다. 그 후에는 세 사람의 랍비가 법정에서 승인하도록 하였고, 다시 산헤드린에 제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결국 이혼 수속이 아주 쉬운 것은 여전했으며, 이혼은 아직 남자의 완전한 자유 재량에 맡겨져 있었다.

그러나 문제의 진정한 요점은 신명기 24:1에 있는 율법의 해석이었다. 거기에는 여자에게서 수치되는 일이 발견되면, 남편이 그 아내와 이혼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어떻게 해석되었을까? 이 문제의 해석에 두 학파의 견해가 있었다.

하나는, 샴마이(Shammai) 학파였다. 그들은 이 문제를 매우 엄중하게 해석하였다. 수치되는 일이란 오직 간음뿐이었다. 여자가 비록 아합 왕의 처 이세벨과 같이 악하다 할지라도, 간음만 범하지 않았다면 이혼할 수 없었다.

또 하나는, 힐렐(Hillel) 학파였다. 그들은 그 구절을 여러 가지로 자유롭게 해석하였다. 그들은 아내가 소금을 너무 많이 넣어 음식물을 먹지 못하게 만들었거나, 머리에 너울을 쓰지 않고 거리를 걸어갔거나, 거리에서 모르는 남자와 말을 했거나, 남편이 듣는 데서 시부모에게 멸시하는 말을 했거나, 싸움을 좋아하거나 말썽꾸러기라고 생각될 때, 그녀의 남편은 이혼해도 된다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심지어 랍비 아키바(Akiba)는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이란 말을, 만일 남편이 보다 더 매력적인 여자를 발견하면 자기 아내와 이혼해도 좋다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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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성상 일반적으로 보급된 것은 보다 더 느슨한 해석이었다. 그 결과 지극히 사소한 이유로, 혹은 아무런 이유 없이 이혼당하는 비극이 흔한 일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 당시에는 결혼 생활이 안정되지 못했으며, 여자들이 결혼을 주저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위와 같은 시대적 상황 때문에, 예수께서 이혼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실 경우에는 율법을 무시하는 자라는 비난을 면치 못하실 것이다. 어쩌면 베뢰아를 관할하는 헤롯 안디바스, 즉 그의 이혼과 재혼을 비난한 세례 요한을 죽인 자의 손에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 반면에, 모세의 율법의 규정을 따라 이혼하는 것이 옳다고 하실 경우에 엄격한 해석을 한 샴마이 학파의 견해를 지지하시면 개방적인 힐렐 학파의 추종자들의 반감을 사시게 되는 반면에, 개방적인 힐렐 학파의 견해를 지지하시면 엄격한 샴마이 학파의 추종자들의 반감을 사시게 될 것이다. 또한, 둘 중 어느 학파의 견해를 따르시든 간에 이혼하는 것이 옳다고 하실 경우에는 죄인들과 교제하시며, 함께 음식을 들기까지 하시는 예수님 자신의 행동과 모순된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의 비난을 면하실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함정들을 생각해 낸 바리새인들에게서 우리는 놀랍도록 간교한 지혜와 영적 어리석음의 표본을 보게 된다.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절기 설교집 외 20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T. 426-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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