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특강 : 제 10 강
2006-09-18 20:2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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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 보수를 망라하여 48권의 마가복음 주석서들을 대조 연구하며 집필한 필자의 \\'마가복음\\'(신약 주석 시리즈)을 매주 2회씩(주일저녁 또는 오후예배와 수요저녁예배)을 교인들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매주 2회 가르칠 분량을 올릴 계획입니다. 여기에 예화나 실화를 첨가해서 사용하시면 더 유익할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여기에 난하주나 헬라어나 문장 부호 등을 제대로 표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 10 강>>
예수님의 권세 있는 교훈에 회당의 뭇사람이 놀랐던 때에 있었던 일에 대해, 마가는 【23】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라고 하였다.
마침으로 번역된 원문(καὶ εὐθὺς)의 정확한 뜻은 ‘그리고 이내’이다.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ἄνθρωπος ἐν πνεύματι ἀκαθάρτῳ)은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을 뜻한다. 어드만(C. R. Erdman)은 “그는 완전히 그 귀신의 세력에 사로잡혀서 지배받고 있었다. 그는 단지 육체적 혹은 정신적 병을 앓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악마에게 사로잡혔다. 그렇지 않았다면 예수께서 공연히 연극을 하여 사람을 속인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는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꾸짖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유대인들과 모든 옛 사람들은 귀신과 악마를 확고히 믿었다. 하르낙(Harnack)이 말하는 것처럼, 온 세계와 둘러싸인 대기는 귀신들로 가득하였다. 단순히 우상 숭배가 아니라 삶의 모든 형세‧형태가 그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그들은 옥좌에 앉았고, 요람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지구는 글자 그대로 지옥이었다”(W. Barclay).
귀신의 출처에 대해 어떤 이들은 창조 만큼이나 오래 되었다고 믿었고, 어떤 이들은 죽은 악인들의 영들로서 여전히 악한 일을 행한다고 믿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귀신을 창세기 6:1-8(비교 : 벧후 2:4-5)에 있는 옛 이야기와 관련지었다.
“특히, 유대인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죽을 운명을 가진 여인들의 아름다움에 매력을 느껴 하나님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온 두 천사 아사엘과 세막사이가 있었다. 그들 중 한 천사는 하나님께로 돌아갔고, 다른 천사는 이 세상에 남아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켰다. 그리고 그가 낳은 자녀들이 귀신들이었다.
귀신들에 대한 집합 단어는 마지킨(Mazzikin), 즉 ‘해치는 자들’을 뜻한다. 귀신들은 인간을 해치는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악의 있는 중간 존재들이다.
유대인들은 귀신들이 먹고 마실 수 있으며, 자식을 낳는다고 믿었다. 귀신들은 엄청나게 많다.■■■■■■그들은 불결한 장소, 즉 무덤과 더러운 물이 있는 곳과 그들의 소리가 들려질 수 있는 사막에 살았다.■■■■■■소경 귀신‧나병 귀신‧마음의 병 귀신이 있었다. 그들은 인간에게 악한 선물을 주었다.■■■■■■그들은 어떤 동물들, 즉 뱀‧황소‧당나귀‧모기 등과 함께 역사한다.■■■■■■남자 귀신은 세딤(shedim), 여자 귀신은 릴린(lilin) 또는 후에 릴리트(lilith)로 알려졌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믿든지 안 믿든지는 문제가 아니다. 즉,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요점 밖이다. 요점은 신약 시대의 사람들이 그렇게 믿었다는 것이다”(W. Barclay).
우리는 위의 이야기들을 그대로 다 믿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귀신의 존재를 부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 귀신들이 사로잡아 지배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귀신들을 쫓아내셨고(마 4:24, 8:16, 28-34, 9:32-34 등), 또한 제자들에게도 그러한 능력을 주셔서 귀신들을 쫓아내게 하셨다는 것이다(마 10:1, 8, 막 6:13 등). 이는 예수께서 귀신들의 존재를 인정하신 것이 된다. 또한, 예수께서 귀신들과 대화하신 것으로 보아 귀신들이 영적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귀신들의 왕초는 사단(마귀)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성경, 특히 복음서 곳곳에는 귀신 들린 자와 병든 자가 따로 기록되었고, 또한 예수님과 제자들은 귀신 들린 자에게서는 귀신을 쫓아내 주었고, 병든 자는 고쳐 주었다. 제자들, 특히 예수님이 일반적인 병과 귀신 들려 마음과 정신과 육체의 고통을 당하는 것을 분별하지 못하셨을 리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 모두가 영적 존재인 귀신을 실재하는 것으로 인정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폴크스(F. Foulkes)는 “인격적인 마귀에 관한 사상은 오늘날 모든 분야에서 거론되지 않는다.■■■■■■그러나 우리는 영적 생명과 그 싸움이 언급된 성경적 용어를 조급하게 거부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우리는 물질 세계에 관해 광범위하게 증가된 지식이 필수적으로 우리의 영적 의식을 증가시킨 것이 아니며, 오히려 퇴화시켰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관해 사도들과 성육하신 그리스도보다 더 현명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라고 하였다.■(엡 6: 13의 주석). 빅켈스테트(E. Bickersteth)는 “이 더러운 영의 인격성에 대해 합리적인 의심이 있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귀신들은 거룩하지 못한 인간들을 사로잡아 주님을 믿지 못하게 하고, 번뇌케 하며, 죄를 범하도록 충동질한다(삼상 16:14, 18:10, 11, 19:9, 요 13:2 등).
예수님의 귀신 축출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의미하는 사건 중 하나이다(마 12:28, 눅 11:20). 헨드릭슨(W. Hendriksen)은 “예수님은 종족과 국적을 따지지 않고 모든 사람을 고치셨다. 진실로 그분은 세상의 구주이셨다(요 4:42, 요일 4:14).”라고 하였다.
귀신들에 의해 지배받고 있었으므로 “예수께로부터 배우거나 치료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이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에 맞서고, 반대하며, 또한 사람들이 그를 믿는 것을 방해하러 회당에 들어왔던”(M. Henry)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의 반응에 대해, 마가는 【24】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하였다.
이 소리는 그리스도와 대면하여 존경하고 믿고 소망을 갖는 것이 아니라, 고민하고 쫓겨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귀신들(약 2:19)이 사로잡은 사람의 입을 도구 삼아 저항한 말이다.
나사렛(1:9의 주석을 보라.) 예수는 본서에 네 번 나타난다(10:47, 14: 67, 16:6. 참조 : 눅 18:37, 24:19). 출신지를 같이 소개하는 것은 유대인의 관용법이었다. 예수님을 나사렛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언제나 또는 반드시 경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예수께서는 그 용어를 자신과 관련지어 사용하시기까지 하셨다(행 22:8). 또, 천사도 그분을 가리켜 나사렛 예수라고 하였다(막 16:6).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의 원문(τί ἡμίν καί σοί)의 문자적인 뜻은 ‘우리와 당신에게 무엇입니까?’이다. 모페트(Moffatt)는 “당신이 우리에게 무슨 볼 일이 있습니까?”라고 해석하였다.
구약성경에서 이 표현은 전쟁 또는 재판 상황에 있어서 공식 표현인 방어적인 질문이다(삿 11:12, 삼하 16:10, 19:22, 왕상 17:18, 왕하 3: 13, 대하 35:21, 사 3:15, 22:1, 렘 2:18, 호 14:9).
여기의 우리는 귀신의 수가 많은 것을 나타낸다. 베데(Bede)는 “우리 주께서 오신 것을 알아차린 악령들(귀신들)은 곧 심판을 받을 것을 믿었다. 그들은 쫓겨나는 것이 고통의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므로 그것을 면하기를 바랐다.”라고 하였다.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는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 질려서 한 말이다. 웨셀(W. W. Wessel)은 “귀신들은 회당에 있는 회중보다 더욱 확실하게 예수님의 선교에 있어서 심판의 역할을 인식한다.”라고 하였고, 고울드(E. P. Gould)는 “귀신들은 예수께서 자기들을 쫓아내러 오셨을 뿐만 아니라, 지옥의 고통으로 돌려보내는 것을 두려워하였다.”라고 보다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반즈(A. Barnes)도 “예수님은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셨으므로(요일 3:8) 사로잡힌 자를 해방시키시고, 그를 사로잡은 자를 벌하신다.”라고 하였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의 아노니는 오이다(οἶδα)이며 ‘초경험적으로 안다’, ‘영감으로 안다’, ‘관념적으로 안다’ 등을 뜻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ὁ ᾅγιος τού θεού)는 병행구인 마가복음 1:24 외에는 요한복음 6:69의 베드로의 고백에서만 나타난다. “칠십인역 바티칸 사본 판관기 16:17에 의하면 삼손이 같은 칭호로 일컬어졌다. 칠십인역 시편 105:16에 아론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로 일컬어졌으므로, 여기서 많은 해석자들은 예수님의 대사제적 신분이 표시되고 있는 것으로 보려고 한다. 이들은 벨리알(악마)을 사로잡을 과제가 메시아적인 대사제에게 부여되는 레위의 유훈서 18:12을 전거로 내세운다. 그러나 에티오피아 에녹서(thHen) 55:4에 의하면 선택된 자(여기서는 사람의 아들)와 같은 기능을 맡고 있다”(J. Gnilka, p. 100).
구약성경에서는 경건한 자(칠십인역 시편 15:10), 이스라엘 백성(신 7:6, 14:2, 21, 26:19 등)도 거룩한 존재로 불렸다. 엘리사 선지자는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왕하 4:9)으로, 엘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 (왕상 17:18)으로 불렸다.
여기서는 이 칭호가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뜻하는지, 아닌지(Ale- xander, Cranfield)가 문제되나, 대개 전자를 취하고 있다(1:34, 5:7, 마 8:29 등). 이 점에 대해, 칼빈(J. Calvin)은 “다른 모든 사람과 분리된 자, 유일한 은총이 부여된 자, 그리고 모든 교회의 머리이신 메시아에게 주어진 칭호이었다.”라고 하였고, 헨드릭슨(W. Hendriksen)은 “예수께서는 그 자신이 죄가 없으시고 덕으로 충만하다는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특히 지극히 고귀한 과업을 수행하도록 기름 부음을 받아 구분되고 분리됐다는 의미에서 거룩한 자이다.”라고 하였으며, 반즈(A. Barnes)도 “예수님은 뛰어나게 순수하시고,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기름 부음을 받았거나 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인 메시아의 일을 위해 구별됐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시다.”라고 하였다.
더러운 귀신들은 예수님에 관한 뛰어난 지식(영적 인식)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그 인식은 신앙 고백이 아니라, 개인 또는 영의 정확한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그를 이기는 것이라는 당시의 일반적 관념을 따라서 예수님을 지배하기 위한 방어적 시도이다”(W. L. Lane).
더러운 귀신 들린 자의 입에서 나오는 귀신들의 소리를 들으신 예수님의 반응에 대해, 마가는 【25】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라고 하였다.
꾸짖어는 에페티메센(ἐπετίμησεν)이며 ‘경계하다’, ‘책하다’를 뜻한다( 눅 4:39, 9:25). “헬라어 성서가 야훼의 능력 있는 꾸짖음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말이라는 점이 주목되어야 한다(J. Gnilka, pp. 100-101).
잠잠하고는 피모테티(φιμώθητι)인데 인간으로 하여금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강력한 주문의 수단에 의해 인간을 속박하는 것을 표현하는 헬라의 마법에서 사용한 전문 용어이다(J. N. Davies).
이 명령을 ‘악령 추방의 주문의 형’이라고 하는 견해가 있다(다가와). 즉, 고대의 악령 추방에 있어서는 주술자가 주문을 외어 ‘잠잠하고’라고 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정식적인 표현을 취하기보다는 더러운 귀신의 애원을 예수님이 거부하셨다고 취하는 편이 자연스럽다(山口 昇). 또한, 이 명령을 통해 예수께서 귀신들(악령들)이 자신의 정체에 대해 떠드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막 1:34).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는 명령은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들에 대해 절대적 권위를 가지고 계셨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명령 곧 말씀은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은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더러운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서 나온 것으로 알 수 있다.
그 점에 대해, 마가는 【26】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명령에 대해 더러운 귀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이란 오직 한 가지, 즉 ‘즉각적인 순종’뿐이었다. 그들은 마지못해 쫓겨나는 마당에도 여태껏 괴롭혔던 그 사람에게 마지막 고통을 주고, 그의 입술을 이용해서 큰 소리를 질렀다. 이 행티는 귀신들(악한 영들)의 악랄함을 여지없이 드러낸 것이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상하지 않았다(눅 4:35).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예수님의 축귀는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다(마 12:28, 눅 11:20).
예수님의 축귀에 대한 청중의 반응에 대해, 마가는 【27】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라고 하였다.
바로 앞서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놀랐던 무리(22절)는, 이제는 예수님의 이적에 놀랐다. 사람들은 더러운 귀신들이 예수님의 말씀 곧 명령에 복종하여 나가는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의 말씀이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신적인 권세와 능력임을 알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라고 탄성을 발하였다.
권세는 엑수시안(ἐξουσίαν)이며, ‘행동의 자유’를 의미한다(고전 9:5). 여기서부터 다른 사람과 관련하여 ‘권위’, 일반적으로 ‘위임된 권세’를 뜻하게 되었다(유 25).
새 교훈이로다의 새는 카이네(καινὴ)인데 시간적인 의미인 네오스(νέ-ος)와 달리, 질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다.
뱃속에서부터 율법을 듣고 배워 온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가르침은(주로 율법 해석) 질적으로 전혀 새로운, 권세 있는 교훈이었다. 예수님의 교훈은 예수님만의 것이었다. 그것은 정치적‧교권적 권위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내적‧신적 권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분의 몸인 교회의 강단에서는 세상에서 들을 수 있는 일반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교회만이 줄 수 있는 새 이야기가 선포되어야 한다. 설교자는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신문이나 방송 등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또 듣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들을 수 없는 하늘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는 것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도 우리의 인생에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이적의 결과에 대해, 마가는 【28】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라고 하였다.
온 갈릴리 사방에 대해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한 부근 지역이라고 하는 학자들(M. Henry, F. C. Grant, “Schmidt”이 있으나, 대다수 학자들은 ‘가버나움’(1:21의 주석을 보라.)을 중심으로 한 갈릴리 일대로 이해하고 있다.
어드만(C. R. Erdman)은 “제일 중요한 것이 예수의 교훈이기는 하지만, 그의 사명을 증명하고 그의 교훈을 믿게 하는 데는 그의 이적도 말할 수 없이 귀중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마가는 이 이적을 매우 강조했으며, 거기 대한 마가의 기록은 독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에 대한 깊은 인상을 준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