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특강 : 제 5 강

2006-09-05 19:19 관리자 1681
최세창:풍성교회, 훼이스신학대학원 객원 교수. 저서:신약 27권 주석 외 다수. 426-3051)

진보와 보수를 망라하여 48권의 마가복음 주석서들을 대조 연구하며 집필한 필자의 \\'마가복음\\'(신약 주석 시리즈)을 매주 2회씩(주일저녁 또는 오후예배와 수요저녁예배)을 교인들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매주 2회 가르칠 분량을 올릴 계획입니다. 여기에 예화나 실화를 첨가해서 사용하시면 더 유익할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여기에 난하주나 헬라어나 문장 부호 등을 제대로 표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 5 강>>

3. 세례받으신 예수[1:9-11]
    <비교 : 마 3:13-17, 눅 3:21, 요 1:32-34>

세례 요한의 활동을 기록한 마가는 이어서 자신과 예수님과의 만남에 대해, 【9】그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라고 하였다.
그때에의 원문(ἐν ἐκείναις ταίς ἡμέραις)은 ‘그 날들에’를 뜻한다. 이는 물론 세례 요한이 회개의 운동을 전개하던 시기를 가리키는 것이다.
지명을 자세하게 나타내는 갈릴리 나사렛이란 이방인 독자들을 위한 마가의 의도적 표현이다. 이에 비해 마태는 갈릴리(마 3:13)로만 표현했고, 누가와 요한은 지명을 생략하였다.

나사렛은 북부 갈릴리의 고원이 남부 갈릴리의 평원으로 뻗치는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마을로, 감람원과 백향목이 무성한 평화로운 곳이었다. 이 곳은 해발 약 450m의 고지대로 알렉산드리아에서 다메섹으로 가는 대상(隊商)들이 늘 통과하는 지역이었다.

이 마을의 지명인 나사렛은 구약성경이나 탈무드(Talmud)나 미드라쉬(Midrash)나 역사가인 요세푸스(Josephus)의 글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사람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작은 마을은 예수님의 성장지(요 1:46)로 유명해졌다. 아닌게아니라, 예수님은 여러 곳에서 나사렛 사람으로 일컬어지고 있다(1:24, 10:47, 16:6, 14:67). 일반적으로 당시의 나사렛 사람들은 멸시와 경멸의 대상이었다(요 1:46, 7:52).

그와 관련하여 헨리(M. Henry)는 “이 세상에는 경멸의 흙먼지 속에 잃어 버려져 있어서 알려질 수 없거나, 또는 겸손의 베일 속에 싸여 알려지려 하지 않는 숨겨진 가치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그리스도의 경우처럼 조만간에 알려지게 마련이다.”라고 하였다.

요단강은 “팔레스틴의 북쪽에 있는 헬몬 산의 산록에 수원을 가지고 갈릴리 바다를 거쳐 사해에 이르기까지의 400㎞ 이상(직선 거리로는 약 217㎞)에 미치는 강으로 수심은 1m에서 3m가 된다”(山口 昇).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의 요단강에서의 원문(εἰς τὸν ’Ιορ-δάνην)은 ‘요단강 속으로’, ‘요단강 안으로’를 뜻한다. 따라서, 예수께서 요한에게 받으신 세례는 형식에 있어서 침례임을 알 수 있다(이상근, 마경일, E. P. Gould). 그러나, 형식의 절대성을 주장할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인 요한의 세례(1:4의 주석을 보라.)를 받으신 것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어 왔다. 간결하게 대담하고 생생한 표현을 즐겨 쓰는 마가는 이 곳에서도 그 문제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전후 문맥을 통해 그 의도를 추측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선적으로 우리는 마태의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5)를 떠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의”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예수께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인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하나님의 인류 구원 계획과 목적을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씀하신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1) 예수께서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의 세례 요한의 사업을 인정하신 것이다(C. R. Erdman).
(2) “고백할 죄가 없으신 예수께서 자신을 인간의 본성과 약함과 죄에 대해 동일시하신 것이다”(W. W. Wessel). 히브리서 기자는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히 2:17)라고 하였고, 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라고 하였다. 바울 역시 그와 비슷하게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라고 하였고, 또 더 자세하게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7-8)라고 하였다.
한 마디로 말해, 예수님의 죄인에 대한 동일시는 그분의 본질인 사랑에서 비롯된 죄인에 대한 구원 의지의 표명이다. 실상, 참 사랑은 보다 높은 자리를 고수한 채, 보다 낮은 자리에 대한 도움을 통해 자신의 존재 확인이나 우월 의식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다. 이는 그 상대에 대한 경멸이며 모독일 뿐이다. 참 사랑은 자신을 상대의 자리에 놓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의 죄인에 대한 동일시에서 우리는 그분의 사랑의 진실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
(3) 예수께서는 단순히 죄인에 대한 동일시로 그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심판을 받으신 것이다. 이는 그분의 사랑의 행위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라고 하였다. 바울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라고 하였고, 세례 요한도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 후반)라고 하였다.
(4) 성부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죄인에 대한 사랑을 이루려 하시는 결단의 표시이다.
(5) 율법의 백성이요 선민이라 자부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그에 따른 인간의 회개를 인정하시는 것이다.
(6) 지극한 겸손의 소치이다(참조 : 2:5-). “예수께서는 자신의 공생애를 지극한 겸손으로 시작하신 것이다”(C. F. D. Moule).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직후의 사건에 대해, 마가는 【10】그리고(원문에는 카이, καὶ가 있다.)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라고 하였다.
긴박감을 나타내는 곧(유튀스, εὐθὺς : 부사)은 본서에 41회(F. C. G- rant) 사용된 마가의 애용어이다.

물에서 올라오실쌔는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가 침례의 형식이었음을 시사해 준다. 그런데 예수님의 온몸이 물 속에 잠겼었다는 암시는 없다. 山口 昇은 “적수례(適水禮)라고 일반적으로 불리는 수세자의 머리 위에 물을 붓는 형식은 이미 2세기 전반의 ‘12사도의 교훈’(ㅡ제3권 ‘신약성서와 사도 교부’)에 보여진다. 그러나 신약 시대의 세례는 형식으로는 침례가 행해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ㅡ행 8:38).”라고 하였다.

하늘이 갈라짐과......보시더니에 대해, 크란필드(C. E. B. Cranfield)는 예수님의 내적 체험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일부 현대 학자들도 예수님의 심리적 과정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였다(E. Schweizer). 다가와(田川)는 교단에 의한 각색이라고 주장하였다. 데이비스(J. N. D- avies)도 “이 장면을 기록함에 있어서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께 대한 시적이며 상징적인 표현을 실제적 사실 중 하나로 바꾸었다.”라고 하였다. 불트만(R. Bultmann)도 예수님의 전기적 전설이며, 예수께서 메시아로 헌신하신 것을 보여 주는 전설로서 근본적으로 사실이 아니라고 하였다. 따라서, 보시더니도 예수께서 환상을 보신 것이라고는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다가와(田川)도 같은 견해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마가는 그런 점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는 그 장면을 예수님만이 보시고 들으신 체험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슈바이처(E. Schweizer)는 “그에게는 예수 이외의 누가 보았거나 들었는가 함은 중요하지 않다. 그 결정적 요인은 성부와 성자 사이의 사건이 누구도 간파할 수 없는 궁극적 비밀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를 다른 모든 인간과 떼어놓는 것이며, 또한 그에게 독특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늘이 갈라짐의 갈라짐은 현재 분사인 스키조메누스(σχιζομένους)로서, 마태복음(ἠνεῲχθησαν)과 누가복음(ἀνεῳχθήναι)과 요한복음(ἀνεῳγότα)의 표현인 “열리고”보다 더 박진감을 준다.
이사야 64:1의 반영으로 보이는 하늘이 갈라짐, 또는 “하늘이 열림”이라는 표현은 주님의 강림(사 64:1), 하나님의 계시(겔 1:1), 성령 강림(본절, 마 3:16, 눅 3:16, 요 1:51. 참조 : ‘12족장의 유훈’ 유다서 24:2, 3), 신비한 영적 체험(행 7:56) 등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이다. 한 마디로 말해, “하나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것이며”(J. Calvin), 하나님의 결정적인 개입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은 예수께서 두 번째로 보신 모습이다(참조 : 눅 3:22). 이 비유적 표현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다. “아가 2 :12에 대한 탈굼(Targum : 아람어로 번역된 구약성경)은 비둘기의 소리를 구원에 관한 성령의 소리로 이해하고 있다.” 슈바이처(E. Schweizer)는 “아마도 이 표현은 유대교에서 성전에서의 하나님의 소리, 후에는 성령의 소리가 비둘기의 구우구우하는 소리에 비유된다는 사실의 빛에서 더욱 쉽게 이해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히브리 문서들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 ‘비둘기와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과도 일치된다.”라고 하였다.

다음으로, 많은 주해자들은 창세기 1:2 후반의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의 관련지어, 그 동사가 새가 하늘을 날며 도는 것을 뜻하고 있으므로 성령이 비둘기로 상징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견해는 보다 먼저 랍비들에게서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창세기 1:2을 비둘기의 활동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았으며(Ben Zoma : 주후 90년경), 따라서 성령의 강림을 새 창조를 의미하는 것......후기 전승에서는 창세기 1:2의 성령을 이스라엘 민족이 회개를 통해 준비될 때까지 보류되는 메시아의 영(Spirit)과 동일시하였다(TB Hagigah 15a, Gen. Rabba 2, Yalqut to Gen. 1:2). 드물기는 하나 랍비들은 비둘기를 성령의 상징으로 이해하였다. 보다 더 자주 랍비들은 공동체의 상징으로서 비둘기를 언급하였다”(W. L. Lane).

“초기의 정경이 아닌 복음서들 중 하나는 성령을 예수님의 어머니로 묘사했는데, 이는 확실히 마가의 견해는 아니다”(F. C. Grant).

성령께서 예수께 임한 의의는 앞의 언급과도 밀접하게 관련된다.
(1)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재확인하는 것인 동시에 그 직무의 완성을 위해 준비시키신 것이다(사 42:1-4, 61:1. 비교 : 행 2:1-4). 칼빈(J. Calvin)은 “성령께서 그리스도께 나타나시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볼 수 있는 육적 또는 지상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성령의 왕적인 능력 아래 신적 인간으로서 하늘에서 오신 것을 가르친다. 우리는 그가 육체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그의 천적 능력은 또한 그의 인격(His Person) 곧 그의 인간적 본성 안에서 사역자로서 생각된다는 것을 안다.”라고 하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께서 초자연적 능력을 받는 순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F. C. Grant).
(2) 예수님의 세례의 의미를 지시하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세례를 가리켜 성령을 주시는 세례라고 하였다(막 1:8).
(3) 특히, 성령께서 비둘기의 형태로 임하신 것은 예수님의 품성 및 사역의 특성인 온유와 평화와 순수와 도덕적 순결을 상징하는 것이다.
(4) 랍비들은 자두 비둘기를 이스라엘 공동체의 상징으로 언급하였다. 따라서, 성령께서 비둘기 같이 임하신 것은 예수님이 성령으로 인해 창조된 새 이스라엘의 유일한 대표임을 지시하는 것이다(W. L. Lane). 그와 동시에 예수님의 사역이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인간을 살리시는(엡 2:1) 재창조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 점을 깨달은 바울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하였다.

이 네 가지 의의는 【11】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로 뒷받침된다.
하늘은 우라논(οὐρανών)이며 {‘보이지 않는 세계’, ‘영원한 영역’을 의미한다(F. B. Mayer), 이 점에 대해 블레이키(W. G. Blaikie)는 “그리스도의 영화된 몸이 존재할 수 있는 하늘의 한 장소ㅡ성부의 영광의 현현과 접촉하는ㅡ임에 틀림없다.”라고 하였다.}(엡 1:20의 주석). 또한, 이 말은 “절대적인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개념이기도 하다”(Traub).

소리가 나기를(참조 : 9:2, 요 12:28)은 육성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예수의 자의식이라고만 하는 것도 오해다(마경일).

랍비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바트 코올(bat gôl), 즉 ‘소리의 딸’인 메아리가 먼 지상에 들린다고 가르쳤다(W. Barclay, W. W. Wessel).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직접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셨으나, 말라기 이후에는 그와 같은 일이 없어졌으므로 그 대신에 바트 코올을 듣는 일이 허용되었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예수님의 경우가 유대인의 ‘소리의 딸’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 직접 들으셨다는 점이다. 이는 군중이 들을 수 있는 공적인 선언이 아니라, 예수님의 개인적 체험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 소리의 첫 번째 내용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이다. 이 말씀은 시편 2:7을 반영한 것으로 변화산 위에서 다시 들렸다(9:7). 본래 시편 2장에는 왕으로서의 메시아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여 주고 있다.
여기의 사랑은 영원부터 영원에 이르는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들(휘오스, υἱός)은 1:1의 주석을 보라.

두 번째 내용은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이다. 이 말씀은 이사야 42:1의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에 기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기뻐하노라는 부정 과거형인 유도케사(εὐδόκησα)이며 “성자에게서 얻는 성부의 영원한 기쁨이 아니라, 예수의 지상 생애 동안에 예수에게서 기쁨을 얻게 된 역사적 과정을 지시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아들이라는 호칭은 바울이 디모데를 자기 아들이라고 한 것처럼(딤전 1:2), 하나님에 의해 특별한 사랑과 호의로 받아들여진 자를 지시하는 것이다”(E. P. Gould).

위의 두 내용을 담은 하늘의 소리는 기독론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메시아인 동시에 하나님의 종이시라는 것이다. 이 메시아의 왕권이란 유대교의 메시아관인 정치적 지배가 아니라, 사랑의 섬김과 고난을 통해서 행사되는 것이다.
끝으로, 이 부분은 신약성경의 위대한 삼위일체에 대한 문장 중 하나이다. 여기서 성령과 성부는 성자를 증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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