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특강 : 제 13 강

2006-10-02 19:12 관리자 1244
최세창:풍성감리교회, 훼이스신학대학원 객원 교수. 저서:신약 27권 주석 외 다수. 426-3051)

진보와 보수를 망라하여 48권의 마가복음 주석서들을 대조 연구하며 집필한 필자의 \\'마가복음\\'(신약 주석 시리즈)을 매주 2회씩(주일저녁 또는 오후예배와 수요저녁예배)을 교인들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매주 2회 가르칠 분량을 올릴 계획입니다. 여기에 예화나 실화를 첨가해서 사용하시면 더 유익할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여기에 난하주나 헬라어나 문장 부호 등을 제대로 표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 13 강>>

라. 새벽 기도 및 순회 선교<1:35-39>
    <비교 : 마 4:23-25, 눅 4:42-44>

“흔히 학자들은 35-38절을 마르코 이전의 전승으로 보고(E. Schweizer, 25. Pesch. Tag. 261-271), 39절은 대체로 복음서 저자에게 돌리거나(Schmidt, Rahmen, 59[山口 昇]), 작은 요약문으로 파악했다(Taylor).”라고 소개한 그닐카(J. Gnilka, p. 110.)는, ‘나오다’(ἐξέρχομαι), ‘말씀을 전하다’(κηρύσσω), ‘갈릴래아’(Γαλιλαία)가 복음서 저자가 즐겨 쓰는 말들이라는 점, 특히 ‘가다’(ἀπέρχομαι)를 복음서 저자의 편집구에서 즐겨 사용한다는 점을 들어 35-39절을 마르코의 작성으로 이해하였다. 불트만(R. Bultmann) 역시 같은 견해를 표방하였다.

그러나, 낱말 사용만 가지고는 마가의 편집구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바로 앞의 기사와의 관계와 이 기사의 내용을 보아 베드로의 회상에 근거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베드로의 회상에 근거한 것으로 보는 학자들은 레인(W. L. Lane), “크랜필드(C. E. B. Cranfield), 데라 등이다”(山口 昇).

이 기사는 【35】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로 시작된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는 아직 완전히 날이 새지 않고 어둑어둑할 때(山口 昇)인 어둑새벽을 의미한다. 이 때가 32-34절의 밤에 이어지는 어둑새벽인지 아닌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따라서, 예수께서 주무셨던 곳도 베드로의 집이었는지 아닌지 확실히 알 수 없다.
마가가 중시하는 것은 예수께서 “가버나움에서 가까운 어느 외딴 곳”(E. P. Gould)에 가셔서 기도하셨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가버나움’(1:21의 주석을 보라.)에서의 성공적인 선교 활동으로 인해 대단한 존경을 받으셨고 인기를 얻으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자리에 안주하시는 대신에 하나님하고만 교통하실 수 있는 은밀한 시간과 은밀한 장소를 찾으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선교 활동의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기도를 통해 오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것도 잘 아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애에서 기도를 가장 우선적인 것으로 삼으셨다. 이는 기도야말로 하나님께로부터 생의 갱신과 새 능력을 받는 통로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기도의 교통이 없이는 참된 의미의 삶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 주신 것이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의 숨겨진 샘은 바로 예수님의 기도이다. 예수님의 기도를 떠나서 예수님의 활동을 이해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기도 없는 예수님의 활동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중대한 일이 있을 때마다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셨다(6: 41, 46, 눅 3:21, 6:12, 9:18, 28 등).
예수님의 기도 내용에 대해, 헨드릭슨(W. Hendriksen)은 이미 받으신 것에 대한 감사와 시작하려고 하시는 갈릴리 순회 선교에 필요한 힘을 요구하시는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기도들에서 순수, 친밀, 신뢰, 비이기성,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등의 특성을 추려 내었다.
바클레이(W. Barclay)는 “예수께 기도가 필수라면, 우리에게는 기도가 얼마나 더 필요한 것인가?” 하고 물었다. 우리는 사람이나 일 등의 방해를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하고만 만날 은밀한 시간과 장소를 가져야만 한다. 이 은밀한 만남이란 우리의 모든 삶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받는 기회인 것이다. 예수님은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6)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분주하다는 이유로 기도를 포기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 점에서는 제자들도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그 사실에 대해, 마가는 【36】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라고 하였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사라지신 예수의 뒤를 따라가(카테디옥산, κατεδίωξαν), 즉 예수님을 부지런히 그리고 열심히 찾아가 추적하였다.

그 제자들에 대해, 마가는 【37】만나서 가로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라고 하였다.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모든 사람 곧 가버나움 사람들과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주를 찾는다고 고했다.
제자들, 특히 베드로는 기도의 필요성 및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인기가 드높아 가는 이 때에 예수께서 취하고 계신 태도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가버나움으로 모셔 가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W. Hendriksen).
찾아온 제자들의 말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 【38】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라고 하였다.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의 마을들은 코모폴레이스(κωμοπόλεις)이며, 도시에 가까우나 성벽이 없는 마을과 도시 중간 규모인 어떤 단위 지역을 가리킨다(E. P. Gould).
새로운 지역을 향해 가자고 하신 점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사람들의 요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다. 또한, 예수님은 이적 행위자로서보다는 복음을 전하는 메시아로서 알려지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거기서도 전도하리니라고 하여 이웃 마을들로 가자고 하신 목적을 확실하게 밝히셨다.
예수님의 병 고침과 축귀 등의 이적 행위는 어디까지나 궁극 목적인 복음 전도를 돕는 보조 목적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님의 이적 행위가 예수님의 메시지를 확증하고, 또한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보여 주었다”(W. Hendriksen). 그러나, “때로 예수님은 이적 행위가 자신의 주된 과업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셨다”(F. C. Grant). 그런 경우에 예수님은 미련 없이 이적 행위를 멈추시거나, 그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복음을 전하러 가셨다.
그는 분명하게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사람들이 요구하는 이적 행위가 아니라, 복음 전파를 가리키는 것이다.
왔노라는 엑세레뤼타(ἐξελήλυθα)이며, ‘~으로부터 나왔다’라는 뜻이다. 이 말을 가버나움의 집에서 나오신 것으로 이해하는 학자들이 있으나, 병행구인 누가복음 4:43과 요한복음 1:11, 12, 6:38, 8:42, 13:3, 18:37 등을 보아 대다수 학자들의 견해인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신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세상에 나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복음 전파이다. 이 점은 특히 복음 설교가 아니라, 기사와 이적을 앞세워 사람들을 끌어 모으려고 하는 주님의 종들에게 충격적인 경고가 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곧 행위이며 성취이다(시 33:9). 이 점에 대해, 마가는 【39】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쫓으시더라라고 하였다.
갈릴리(1:14의 주석을 보라.)에는 각각 수천 명이 거주하는 마을이 이백 여 곳이나 있는,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이었다(Josephus). 그 지역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섞여 살았다.
회당은 1:21의 주석을 보라.
귀신들을 내어쫓으시더라는 1:24의 주석을 보라.
어드만(C. R. Erdman)은 “주님의 프로그램에는 편협한 것이나 지역적인 것이나 이기적인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자기의 교훈을 전연 듣지 못한 곳에서 전도하시고, 아직까지 생명을 얻을 기회를 가져 보지 못했던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그의 소원이었다.”라고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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