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특강 : 제 7 강
2006-09-12 00:28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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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 보수를 망라하여 48권의 마가복음 주석서들을 대조 연구하며 집필한 필자의 \\'마가복음\\'(신약 주석 시리즈)을 매주 2회씩(주일저녁 또는 오후예배와 수요저녁예배)을 교인들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매주 2회 가르칠 분량을 올릴 계획입니다. 여기에 예화나 실화를 첨가해서 사용하시면 더 유익할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여기에 난하주나 헬라어나 문장 부호 등을 제대로 표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 7 강>>
Ⅱ
갈릴리 선교
(1:14-7:23)
예수님의 선교 활동의 준비 기간에 대해 기록해 온 마가는, 이제 예수님의 갈릴리 선교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 부분은 예수님의 선교의 시작(1:14-20),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들(1:21-45), 유대 교권자들과의 논쟁(2:1-3:6), 호수 가로 물러가신 예수님의 이적(3:7-12), 열 두 제자 선택(3:13-19), 예수께 대한 오해(3:20-35), 천국 비유(4:1-34), 여러 가지 이적들(4:35-5:43), 고향에서 배척받으신 예수님(6:1-6a), 열 두 제자를 파송하신 예수님(6:6b-13), 세례 요한을 죽인 헤롯 안티파스의 공포(6:14-29), 제자들의 선교 보고와 예수님의 이적들(6:30-56), 그리고 유대 교권자들과의 논쟁(7:1-23)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예수의 첫 선교[1:14-20]
갈릴리에서의 예수님의 첫 선교의 기사는 선교 활동 개시(1:14-15)와 첫 제자들을 부르신 일(1:16-20)로 되어 있다.
가. 예수의 활동 개시<1:14-15>
<비교 : 마 4:12-17, 눅 4:14-15>
예수님이 시험받으신 사건을 기록한 마가는, 이어서 예수님의 선교 활동에 대해, 【14】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라고 하였다.
공관복음에는 예수님이 세례받으신 때로부터 세례 요한의 투옥까지의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 또한 그 동안에 예수님이 어디서 어떻게 무슨 활동을 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다. 아무튼,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갈릴리에서의 예수님의 선교 활동을 그분의 선구자인 세례 요한의 투옥과 관련짓고 있다(마 4:12, 눅 3:19-20). “헤롯 안티파스에 의해 요한의 입에 재갈이 물린 것은 예수께서 전도를 시작하신다는 신호였다”(A. E. Sanner, E. H. Plumptre).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는 끊임없이 도전을 받지만, 그 어느 것에 의해서도, 그 누구에 의해서도 방해받거나 중지되지 않는다. 바울은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라고 단정하고 있다. 복음의 진보는 그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것이다.
그닐카(J. Gnilka, p. 78.)는 스미트(Schmidt, Rahmen, 34)와 헨혠(E. Haenchen, Weg, 74f)을 인용하여, “이 시간적인 교체가 역사적인 상황과 일치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여기서 역사(Historie)를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사적인 도식을 위해서 일어난 것이다.”라고 하였다.
특히, 요한이 잡힌 후의 수동태 동사가 ‘인도되다’, ‘넘겨지다’를 뜻하는 파라도테나이(παραδοθήαι)인 것은, 세례 요한이 관헌에 의해 구속된 사건 배후에 하나님의 의지와 계획이 있었음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이제 세례 요한은 하나님에게서 받은 선구자로서의 사명을 다 마친 것이다.
“공관복음 기자들은 예수께서 갈릴리를 자신의 선교 무대로 삼은 이유를 설명하지 않지만, 그 이유는 분명하다. 그 곳은 유대교의 본부가 아니었다. 그리고 사건들은 예수님의 역사가 공명하지 않은 믿음의 요새에서는 불가능했었으리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E. P. Gould).
갈릴리에 오셔서의 갈릴리는 예수께서 활동하신 주된 무대이었다.
{갈릴리 바다 곧 게네사렛 호수는 실제로는 물이 맑은 내지의 호수이다. 이 호수의 이름은 긴네렛(Chinnereth) 또는 긴네롯( Chinneroth)이었다(민 34:11, 수 11:2, 12:3, 13:27, 19:35). 마카비와 신약 시대에는 게네사르(Gennesar) 또는 게네사렛(Gennesaret)으로 불렸다(Ⅰ Macc., 11:67, 눅 5:1). 이 이름은 또한 게네사렛이라 불리는 마을과 평야 지역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마 14:34, 막 6:53). 2세기에는 디베랴( Tiberias) 바다로 널리 알려졌는데(요 6:1, 21:1), 이는 확실히 헤롯 안티파스에 의해 세워진 도시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요단강의 물줄기들이 흘러내려 이뤄진 이 호수는 팔레스틴 북부에 있는 담수호로 남북 20㎞, 동서 12㎞, 수심은 가장 깊은 곳이 60m나 되고, 호수면은 지중해의 해면보다 212m나 낮다. 이로 인해 기상이 돌변하는 현상이 자주 나타나서, 이른바 일진 광풍이 몰아쳐 쪽배에 탄 어부들을 당황케 하는 일이 흔했다.}(눅 5:1의 “게네사렛”의 주석).
{호수에는 물고기가 많아 어업이 성행하였으며, 막달라에서 소금에 절여진 물고기는 로마에까지 수출되었다. 당시의 어업이 얼마나 성행했는가를 알려주는 기록이 있다. “갈릴리의 지사였고, 위대한 유대 역사가인 조세푸스(Josephus)는 그때에 330척의 어선이 호수를 항해했다고 하였다”(W. Barclay).
이 호수 주변에는 고라신, 가버나움, 게네사렛 평야, 막달라(타리케이아), 디베랴, 벳새다 같은 마을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 일대는 예수님의 활동 무대가 되었다. 그리고 사람이 살지 않던 벳새다 지역, 즉 호수의 동쪽 가는 예수님이 무리를 피해 물러가시곤 하던 장소이었다.}(요 6:1의 주석).
갈릴리 지방은 {갈릴리 호수(디베랴 바다, 또는 게네사렛 호수.)의 서쪽 지역으로 사마리아를 가운데 두고 유다와 떨어져 있었는데, 당시에는 분봉왕인 헤롯 안티파스가 다스렸다(눅 3:1). 이 지역에는 “여러 가지(가나안 사람과 기타 외국 식민들) 피가 섞인 유대인들과 교양이 많은 외국 사람들 그리고 로마의 군인들이 섞여 살고 있었다.” 예수님이 이러한 지역을 활동 무대로 삼으신 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요 1:43의 주석).
{그 당시에는 어촌인 나사렛을 포함하고 있는 갈릴리도 경멸의 대상이었다. 플루머(Plummer)는 “모든 갈릴리인들은 교양의 부족과 멋이 없는 사투리와 이방인들과의 교제 때문에 멸시받고 있었다.”라고 하였다.}(요 1:46의 주석).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의 하나님의 복음(τὸ εὐαγγέλιον τού θεού)은 א, B, L, Θ, ƒ1, ƒ13 등을 따른 것이고 ; A, D, K, W, Δ, Π 등에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τὸ εὐαγγέλιον τής βασιλείας τού θεού)으로 되어 있다. 사본의 가치상 전자를 취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τὸ εὐαγγέλιον τού θεού)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복음이자 하나님에 관한 복음이라는 뜻이다. 복음(유앙겔리온, εὐαγγέλιον : 1:1의 주석을 보라.)이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인류 구원의 소식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복음(롬 15:19, 고전 9:12, 고후 2:12, 9:13, 10:14, 갈 1:7)이라고도 일컬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단순한 복음의 소유자나 전달자가 아니라 그 이상의 존재이다. 예수님은 복음의 핵심으로서의 전달자이시다. 따라서, 복음의 내용은 진리(갈 2:5, 골 1:5), 소망(골 1:23), 평화(엡 6:15), 하나님의 약속(엡 3:6), 불멸(딤후 1:10), 구원(엡 1:13) 등이다.
전파하여(케뤼스손, κηρύσσων)는 1:4의 주석을 보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이 아니라 유대인과 혼혈 유대인 그리고 이방인들이 뒤섞여 살고 있던 갈릴리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사실은, 배타적인 선민 의식에 젖어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 충격적인 사실을 미루어 예수께서 전파하신바 그 자신이 내용인 복음은 제한적인 것이 아니라 우주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마가는 예수께서 전파한 내용에 대해, 【15】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라고 하였다.
때는 카이로스(καιρός)이며 ‘때’(마 8:29, 11:25, 24:45, 막 1:14, 눅 21:8, 롬 3:26) 외에 ‘기한’, ‘시기’(행 1:7, 살전 5:1), ‘기회’(갈 6:10, 히 11:15) 등으로 번역되기도 하였다. 이 말(카이로스, καιρός)은 그냥 흘러가는 시간(‘때’ : 마 2:7, 막 2:19, 9:21, 행 1:6, 3:21, 갈 4:4. ‘기한’ : 눅 1:57. ‘오랫동안’ : 요 14:9, 행 14:3)을 뜻하는 크로노스(χρόνος)와 달리, 어떤 특별한 사건이나 황금 같은 기회 또는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는 시간이나 시대를 의미한다.
찼고는 페플레로타이(πεπλήρωται)이며 ‘완성되었다’, ‘성취되었다’, ‘채워졌다’ 등을 의미한다.
그닐카(J. Gnilka, p. 79.)는 “때가 찼다는 표현은 예언자적-묵시 문학적 언어에 일치한다. 이 표현의 배후에는 하느님이 각 시대를 확정짓는다는 지식이 놓여 있다(단 7:22, 겔 7:12, 애 4:18, 계 1:3, 벧전 1: 11, 납달리의 유훈서[Test. N] 7:1).”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때가 찼고란 타락한 인간들로 하여금 율법‧양심‧종교‧윤리로 구원받을 수 없음을 체험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구세주인 자기 아들을 보내시기로 미리 정하신 시간이 다 되었다는 뜻이다(갈 4:4, 엡 1:9. 참조 : 사 9:1). 시대의 대 전환이 종말의 시대가 예수님의 출현으로 시작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라고 외치신 것이다.
하나님 나라(βασιλεία τού θεού)는 예수님의 교훈의 기본 주제이다( W. W. Wessel, H. E. Luccock).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가 구약성경이나 외경에 나타나지 않으나, 그 사상은 양쪽에 풍부하다. 구약성경에는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 무궁하시도다”(출 15:18),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시 103:19),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시 29:10),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자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사 43:15),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사 52:7),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시 145:13)와 같은 진술로 가득 차 있다.
그러한 문장들에 대한 고찰은, 주님의 왕권이 현재적 실재(하나님은 지금 자기 권한을 행사하신다)와 미래의 소망(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통치하실 것인데, 그 때에 그분은 자신의 통치를 거역한 모든 것을 진압하실 것이다) 둘 다임을 드러내 준다(W. W. Wessel).
현재(마 12:28, 눅 11:20, 17:21)와 미래(마 13:41-43, 20:21, 막 9:1, 47, 14:25, 눅 22:16, 18, 요 14:2, 18:36, 고전 15:50, 고후 5:1, 갈 5:21)로서의 하나님 나라 사이의 긴장은 예수님의 교훈 속에도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그 성격에 있어서 새로운 것이었다. 즉, 유대교 개념처럼 육적이며 현세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이며 영원한 나라이었다(E. Schweizer). 하나님 나라는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의 통치이다. 이 통치는 주권자이신 하나님과 개인 사이의 인격적 관계이다. 하나님의 통치 원리는 죄인을 구원하시는 사랑이며, 이 실제적 구현이 곧 예수님의 인격과 교훈과 생애이다. 따라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라고 하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통치에 의해 인간의 마음과 생각과 행동이 움직여져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라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이 선언은 도드(C. H. Dodd)의 ‘실현된 종말론’을 위한 결정적 구절이 되었다.
가까웠으니는 과거 완료형인 엥기켄(ἤγγικεν)이며 번역하기가 어려운 말이다. 그 낱말은 ‘가까이 다가오다’, ‘당도하다’, ‘미치다’, ‘이르다’(욘 3:6) 등을 의미하는데, 이 완료형인 엥기켄(ἤγγικεν)을 임박한 것으로 이해하는 학자들과 현재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학자들이 있다. 문맥상 후자를 취해야 할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예수님의 출현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 곧 하나님의 통치의 본격적인 시작인 것이다. 그러나, 그 나라의 완성은 마지막 때인 것이다. “그 때에는 마르코에게도 우주적 사건이 된다. 그 통치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 사람들이 들어가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하느님의 왕국으로 확장된다. 현재 돌입해 오고, 완전한 하느님의 왕국(Gottesreich)에로 치닫고 있는 하느님의 통치는 결단을 요구한다. 이 결단은 돌이킴(Umkehr)과 믿음을 포함한다”(J. Gnilka, p. 81).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의 회개하고(메타노에이테, μετανοείτε)는 1:4의 주석을 보라.
믿으라는 피스튜에테(πιστεύετε)이며 “알고 동의하고 신뢰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W. Hendriksen). 인간의 믿음의 결단은 하나님의 주도적인 은혜의 역사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마 16:16-17, 고전 12: 3, 엡 2:8).
회개하고 복음을 믿음으로써 우리는 천국의 삶인 성령 안에서의 의와 평강과 희락의 삶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롬 1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