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제47강

2012-01-04 01:09 관리자 1095
오래 전에 마가복음 특강 제45강까지 연재하다 말았는데, 별 문제가 없으면 다시 마가복음 끝까지 연재할 생각입니다. 필자는 물론, 많은 교역자들이 해당 본문의 의미를 쉽게 이해시킬 수 있는 예화나 실화를 첨가하여 설교나 연속 성경 강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Ⅲ. 기타 지역 선교(7:24-8:30)

예수님의 갈리리 선교(1:14-7:23)에 대해 기록해 온 마가는, 이제 예수님의 기타 지역 선교(7:24-8:30)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 부분은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신 일(7:24-30),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치신 일(7:31-37),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8:1-10), 바리새인들의 표적 요구를 거절하신 일(8:11-13),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에 대한 경계(8:14-21), 소경을 고치신 일(8:22-26), 그리고 베드로의 신앙 고백(8:27-30)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수로보니게 소녀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심[7:24-30]

<비교: 마 15:21-28>

이 단화의 형성 과정은 다양하게 분석되고 있다. 그닐카(J. Gnilka, pp. 367-368)는 “로마이어는 예수와 여인의 대화가 기본을 이루고, 여기에 기적 설화가 첨가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케르텔게(Kertelge)는 기적 설화가 맨 처음에 있었고, 후에 대화가 첨가되었다고 본다. 비슷한 견해를 가진 브르킬(Burkill)은 복합한 단계적인 발전(처음에는 그림말인 27절 후반이 있었고, 그 다음에 28절, 그 다음에 27절 전반이 첨가되었다는 것이다)을 생각한다. 이 두 견해는 받아들일 수 없다. 이 단화는 처음부터 기적이 대화에 종속되어 있던 설화였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불트만(R. Bultmann)도 “여기서 이적은 이적 자체를 위해 보도되지 않으며, 오히려 대화에서 전개되는 예수의 태도가 중심 주제이다. 말하자면, 이 부분은 일종의 논쟁 대화인데, 그러나 이번에는 예수―그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않고―가 설복당한 자로 나타난다.”1)라고 하였다.
그닐카(J. Gnilka, p. 368)와 불트만(R. Bultmann)2)은 24절(불트만은 24절의 대부분)과 31절을 마가의 편집작으로 이해하며, 특히 그닐카는 그러한 이유를 들어 이 설화를 본래 유다 지방에서 일어난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 구절들이 마가의 편집작이라는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27절의 “먼저”란 마태복음에는 없는 것으로, “수년 후에 교회에 의해 지시된 이방인 선교에 관해 알았던 마가가 덧붙인 것 같다”(E. Schweizer).
마가는 이 단화를【24】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하나 숨길 수 없더라로 시작한다.
거기를 떠나의 거기가 집을 가리키는 것인지(7:17), 게네사렛 땅(6:53)을 가리키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전후 문맥상 후자를 취해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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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 Bultmann, op. cit., 368.
2) 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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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두로 지경으로 가서(ἀπηλθεν εἰς τὰ ὅρια τύρου)는 D, L, W, Δ, Θ 사본 등을 따른 것이고; א, A, B, K, X, Π, ƒ1 사본 등에는 “두로와 시돈······”(τύρου καὶ Σιδώνος)으로 되어 있다.1) 사본들의 가치를 따른다면 후자를 취해야 하지만, 31절을 보아 전자를 취해야 한다.
지경은 호리아(ὅρια)이며, “기본적으로 지역의 경계를 가리키고, 그런 다음에 그 지역은 그러한 한계 내에 포함된다”(E. P. Gould). 따라서, 기본적인 의미를 취해, 예수께서 두로 지역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수로보니게와 접하고 있는 갈릴리의 어느 지역에 가신 것이라고 하는 견해2)와 실제로 이방 지역인 두로에 들어가신 것이라고 하는 견해3)가 있다. 마가가 이 사건을 부정(不淨)의 문제 바로 다음에 놓았다는 점과 31절을 미루어 후자를 취해야 할 것이다.
두로와 시돈은 “베니게(Phoenicia)의 도시들이었다. 시리아의 일부인 베니게는 해안의 평지를 따라 카멜(Carmel)에서 북쪽으로 뻗어 있었다. 그 곳은 갈릴리와 해안 사이에 위치하였다. 요세푸스(Josephus)의 말대로, 베니게는 정말로 갈릴리를 에워싸고 있었다.
두로는 가버나움에서 북서쪽으로 40마일 떨어진 곳이었다. 그 지명은 반석을 의미하는데, 그렇게 불린 이유는 물가와 떨어져서 길이가 삼천 피트 되는 산마루에 붙어 있는 두 개의 거대한 반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두 개의 거대한 반석은 자연적인 방파제를 이뤘다. 두로는 매우 이른 때부터 아주 위대한 천연 항구의 하나이었다. 반석들은 방파제를 이뤘을 뿐만 아니라 방어물이 되었다. 두로는 유명한 항구일 뿐만 아니라 유명한 요새이었다”(W. Barclay).
{전자는 주전 2750년경에, 후자는 주전 1400년 이전에 건설된 후에 번창한 이방의 상업 도시들이었는데, 사악함 때문에 예언자들의 빈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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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K. Aland, et al., ed.
2) J. A. Bengel, “Fritzsch”(in 이상근), “Meyer”(in 黑崎幸吉), 마경일.
3) E. Bickersteth, D. W. Burdick, E. P. Gould, W. L. Lane, “Bruce”(in 이상근), W. W. Wessel, W. Barclay, W. Hendriksen, “Lange”(in 黑崎幸吉), 黑崎幸吉, 山口 昇,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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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탄핵의 대상이 되었고,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었다(암 1:9-10, 사 23장, 렘 25:22, 47:4, 겔 26:3-7, 28:12-22).1)}(눅 10:13의 주석).
한때는 두로의 왕들이 다윗 왕 및 솔로몬 왕과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두로에는 이스라엘이 필요로 하는 재목인 백향목과 잣나무가 있었고, 능숙한 기능공들이 있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두로에 필요한 곡물을 히람과 그 후의 통치자들에게 배로 보내 주었다(왕상 5장, 행 12:20). 후에 두로는 하나님의 경고를 받기도 하고(사 23장, 욜 3:4-6), 또 다른 이웃 민족들과 더불어 메시아 시대의 복을 나눌 것이라는 말씀도 받았다(시 87:4). “이 예언은 이 지방 백성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그리고 병과 귀신들린 상태에서 깨끗해지기 위해 갈릴리로 왔을 때에 성취되기 시작하였다(3:8, 마 4:24-25, 눅 6:17)”(W. Hendriksen). 또, 예수님이 이들 지역에 오신 것도 그 예언의 성취의 일환이었다.
예수님이 바로 이 이방 지역인 두로에 가신 것이다. 그 목적에 대해서는 (1) 휴식을 위한 것이거나 유대 교권자들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J. D. Stevens, J. N. Davies), (2) 보다 더 효과적인 활동 무대를 찾기 위한 것이라는 설(J. W. Russel),2) (3) 헤롯 안티파스의 추격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부란스감, 존손”,3) 山口 昇), (4) 혼자 계시기 위한 것이라는 설(데라, 크란필드),4) (5) 그때까지의 상황에 따른 복합적인 것, 즉 악의를 품고 죽이려고 하는 헤롯 안티파스(6:14, 16, 눅 13:31)와 유대 교권자들(3:6)을 피하시기 위한 것이며, 자신의 메시아로서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백성들을 떠나 잠시 쉬면서 제자들을 훈련하시기 위한 것이라는 설5) 등이 있다. (5)설이 가장 그럴듯하다.
마가가 예수께서 이방 지역인 두로에 들어가신 사건을 여기에 둔 것은, 유대의 구전법과 의식적 정결 예법을 깨뜨린 앞의 사건에 따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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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조: I. H. Marshall, A. Plummer, 이상근.
2) in W. Hendriksen.
3) in 山口 昇.
4) 상동.
5) 참조: C. R. Erdman, C. E. G. Swift, W. Barclay, 黑崎幸吉, 마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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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자연스런 결과인 것 같다. 즉,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땅과 이방인들을 부정하게 여겨 그 곳 또는 그들과 접촉하는 것을 할 수 있는 한 피하였다. 그 이유는 부정한 것과의 접촉은 부정해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랑곳없이 두로에 들어가신 것이다. 이로써 예수님으로 인한 하나님의 통치는 이방 지역에까지 미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유대인들에 의한 복음의 거절은 이방인들의 기회가 되었다.1) 물론, 예수님이 두로에 오신 직접적인 목적은 이방 선교가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랑은 이방인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마 4:24, 눅 6:17. 참조: 시 87:4).
예수님이 두로의 회당이나 광장이 아니라,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라고 한 마가만의 설명은, 그 자신의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메와 요단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허다한 무리가 그의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3:8)라고 한 말과도 어울린다. 즉, 두로 사람들이 이미 예수님과 접촉한 적이 있었고, 또 예수님에 관해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한동안 알려지지 않은 채로 계실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헨리(M. Henry)의 “예수께서 자신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두로와 시돈의 접경 지역으로 들어가신 것이다.”라고 한 말은 옳지 않다.
예수님이 자신을 숨기실 수 없는 이유, 즉 “자신이 발견되는 것을 허용하신 이유는 죄인들에 대한 크신 사랑 때문이라 할 수 있다”(W. Hendriksen).
마가는 예수님이 자신을 숨기실 수 없는 직접적인 이유에 대해서,【25】이에(원문에는 이유를 나타내는 가르, γὰρ로 되어 있다.) 더러운 귀신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리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더러운 귀신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의 더러운 귀신(πνεύμα ἀκάθαρτον)은 1:23의 주석을 보라.
이 여인은 귀신들린 어린 딸로 인해 말로 다할 수 없는 심신의 고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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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조: W. Barclay, W. W. Wessel, E. Bickerste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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겪으면서,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온갖 노력을 다한 끝에 절망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을 때에 믿음이 생겼고(롬 10:17), 그 즉시 예수님께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렸다. 그녀의 엎드림은 겸손, 존경심, 순종, 간절한 열망, 그리고 제정신을 잃어버려 남의 눈총을 받는 쓸모없는 어린 딸에 대한 강렬한 모성애를 나타내는 것이다.
마가는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린 여인과 그 목적에 대해,【26】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헬라인(헬레니스, Ἑλλμηνίς)이란, 유대인이 막연히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행 18:4, 19:10, 롬 3:9, 10:12). 즉, 유대인들은 “모든 이교도, 혹은 우상 숭배자들”(A. Clarke), 그리고 “헬라어를 사용하는 헬라 문화에 속한 이방인들”(山口 昇)을 헬라인이라고 일컬었다. 아무튼, 유대인이 아니라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수로보니게 족속이라의 수로보니게는 로마의 속주인 수리아에 속하는 베니게라는 뜻으로, “북아프리카의 리비아 지방의 베니게 곧 리보베니게와 구별하기 위한 명칭이다”(黑崎幸吉).
그 여인의 목적은 자기 딸을 귀신에게서 해방시켜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다. 더할 나위 없는 불행한 문제란 예수님을 만날 더할 나위 없는 기회이다.
그닐카(J. Gnilka, p. 371)는 “이 설화가 엘리야 전통과 공통적인 것은 같은 지역에서 일어난다는 것과 한 여인이 하느님의 사람이 도와야 할 병든 어린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문학적인 의존성을 말해 주는지 의심스럽다. 더욱이, 사렙타 과부의 아들은 죽기 때문이다. 엘리야 전승은 죽은 자의 소생에 관한 설화를 이야기한다.”라고 하였다.
어린 딸을 위한 여인의 애절한 간구를 들으신 예수님은 뜻밖에 거절 의사를 표명하셨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27】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라고 하였다(비교: 마 15:24에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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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냄받았다고 한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는 이방인들에 대한 거절이 아니라, 반드시 유대인 다음에야 이방인이 구원을 받게 된다는 구원의 순서를 나타내는 것이다(사 2:2-4, 42:6, 55:3-5, 49:6). 유대인들이 구원사적으로 우선권이 있다는 것은 바울의 견해와도 일치하는 것이다(롬 1:16. 참조: 마 22:1-10, 행 13:44-48, 18:6). 여기서 주목해야 할 말은 먼저이다. 헨리(M. Henry)와 고울드(E. P. Gould)는 “이 말은 개들로 비유되고 있는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때가 오고 있다는 암시를 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는 “거절 의사를 담은 표현이기는 하나, 결정적 거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M. Henry). 이것은 예수님이 표현하신 개들(퀴나리오이스, κυναρίοιςσ: ‘작은 개’, ‘강아지’)이 한 집에서 자녀가 먹고 남은 찌꺼기를 얻어먹고 산다는 점(28절)으로 뒷받침된다.
{오늘날 개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동물이지만, 그 당시의 동양에서는 개란 주인이 없이 거리와 들을 떠돌아다니면서 쓰레기통 속을 뒤지고 찌꺼기 따위를 주워먹고, 서로간에 그리고 사람들에게 으르렁거리며 물고 싸우는 동물이었다.1)
그러므로 개라는 말은 불결하고, 불경건하고, 뻔뻔스럽고, 탐욕적이고, 오만하고, 불평 잘하고, 다투기 좋아하고, 물고 늘어지기 좋아하는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한 마디로 말해, 개란 지독한 경멸과 혐오(신 23:18, 삼상 17:43, 왕하 8:13, 시 22:16, 20, 사 56:10, 11, 마 7:6), 그리고 버림받은 자(계 22:15)의 대명사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라고 불렀고, 모하메드 교도들은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을 개라고 불렀다”(A. Barnes). 특이한 것은, 바울이 유대의 율법주의자들을 가리켜, 개라고 일컬은 적이 있다는 점이다.}(빌 3:2의 주석).
여기의 문제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경멸할 때 쓰는 용어를 예수님이 사용하셨다는 사실이 격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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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조: 왕상 14:11, 16:4, 21:19, 눅 19:21, J. B. Lightfoot, W. Barclay, A. Bar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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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는 (1) 단순한 비유라는 설(Weiss),1) (2) 단순한 풍자라는 설(E. P. Gould), (3) 그 여인에 대한 시험이라는 설(J. D. Stevens), (4) 그 여인의 열심을 자극하고, 열정을 부채질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J. Calvin) 등이 있다.
그러나 바클레이(W. Barclay)의 견해가 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
(1) 예수님은 일반적인 말로 사용하시지 않았다. 그분은 거리의 들개들을 지시하신 것이 아니라, 집의 작은 애완견을 묘사하는 지소어를 사용하셨다.2) (2) 틀림없이 그분의 목소리는 전혀 달랐다. 같은 말은 목소리에 따라서 결정적인 모독이 될 수도 있고, 애정 표현이 될 수도 있다.······예수님은 그 말에서 모든 독소를 빼셨다. (3) 어떤 사건에서도 그분은 문을 닫지 않으셨다. 먼저 그분은 자녀를 먹여야만 한다고 하셨다. 단, 먼저 집의 애완견들을 위해 남겨진 고기가 있다.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이든지 여인에게는 거절이나 모독으로 들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분노나 항의 대신에 아주 놀라운 지혜로 응대하였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28】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하였다.
주(퀴리에, κύριε)는 1:3의 주석을 보라.
이 여인의 놀랍도록 지혜로운 대답은 예수님을 주로 신뢰하는 믿음과 어린 딸에 대한 모성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여인의 믿음과 사랑 그리고 그로 인한 지혜로운 말은 실질적으로 예수님의 속뜻에 일치했으며, 따라서 모든 불행한 상황을 반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복음이 먼저 이스라엘에게 전해져야 한다는 이스라엘의 특권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거기서 넘쳐 나오는 부스러기를 원하는 겸손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 여인의 말에 큰 감동을 받으신 예수님은 ‘원격 축귀’라는 놀라운 사랑의 권능을 나타내셨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29】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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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E. P. Gould.
2) J. Gnilka(p. 372)도 유사한 견해를 표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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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는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 15:28)라고 하였다. 그렇다고 하면, 예수님은 여인의 말에서 큰 믿음을 보신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을 주로 신뢰하여 딸을 고쳐 주실 것을 확신한 여인은,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30】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라고 하였다.
“마르코의 기적 설화 가운데 여기서만 침대(클리네, κλίνη)라는 말이 나오고 있으므로(다른 곳에서는 침상: 크라바토스, κράβατος), 어쩌면 그녀의 보다 나은 경제적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J. Gnilka, p. 373).
누웠고(완료 수동태인 베블레메넨, βεβλημένην)는 쫓겨나가는 귀신의 발악(1:26, 34, 3:11)에 의해 침상(침대)에 던져진 상태를 의미한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행하신 원격 기적은 왕의 신하의 경우(요 4:46-53)와 백부장의 하인의 경우(마 8:5-13, 눅 7:1-10)에도 나타났다. 시편 기자는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 33:9)라고 하였다.
제 정신을 귀신에게 빼앗겼던 딸은 자기를 고치기 위해 겪은 어머니의 모든 고통과 수고와 수모를 알지 못하고 있다.

저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 난해 성구 사전 I, II/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형통의 기도/ 절기 설교집/ 설교집 19권/ 영성의 나눔 I, II. Ⅲ/ 영성을 위한 한 쪽/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T. 426-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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