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특강 : 제 43 강
2007-05-29 03:38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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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신약 주석 시리즈 완간/ 난해 성구 해설/ 형통의 기도/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Salvation Before Jesus Came/ 설교집 17권)
진보와 보수를 망라하여 48권의 마가복음 주석서들을 대조 연구하며 집필한 필자의 \\'마가복음\\'(신약 주석 시리즈)을 매주 1회씩(주일저녁 또는 오후예배와 수요저녁예배)을 교인들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매주 1회 가르칠 분량을 올릴 계획입니다. 여기에 예화나 실화를 첨가해서 사용하시면 더 유익할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여기에 난하주나 헬라어나 문장 부호 등을 제대로 표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 43 강>>
라. 게네사렛에서의 치유<6:53-56>
<비교 : 마 14:34-36>
“이 부분의 작성 방식과 어휘들은 마르코의 편집임을 말해 준다”(J. Gnilka, p. 345). 그러나, 단순한 상상에 의한 편집이라기보다는 “신뢰할 만한 전승에 기초하여 정리한 것으로 생각된다”(山口 昇). 그렇게 추측할 수 있는 것은 53절의 장소에 관한 진술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 부분은 복음서의 다른 대목에 그 유사한 구절들이 나온다는 특징이 있다. 54절과 55절 전반은 많은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뛰어다녔다는 말에 의해 6:35을 다시 이어받고 있다. 환자들을 데려온 데 대해 언급하는 55절 후반은 1:32을 연상시킨다. 접촉에 의한 치유 방식이 5:28의 혈루병을 앓는 여인 설화에도 나왔다.
“여기서 마가가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의 치유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몰려온 사실이다. 즉, 엄청난 예수님의 영향력을 드러내는 반면에, 보다 더 기적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영적 맹목을 지시하는 것이다”(E. Schweizer).
마가는 이 기사를 【53】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로 시작한다.
오천 명에게 떡을 먹이시고, 그 후에 물 위를 걸어서 배를 타시고 바다를 건너 목적지에 도착하셨다고 하는 구성은 마태복음 14:15-34과 요한복음 6:1-25과 같다. 이것은 마태와 요한이 마가의 구성을 그대로 사용했다고도 생각되나, 그보다는 원래의 사건의 순서를 따라 전승의 단계에서 그와 같이 구성된 매듭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되어진다[된다](데라).
게네사렛에 배가 도착한 것에 대해 “몇몇 주석가들은 요 6:17을 근거로 배가 바람 때문에 가버나움, 혹은 심지어 벳새다에 상륙하지 못했으며(6:45), 남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정박할 수밖에 없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확실하지 못하다”(W. Hendriksen).
겐네사렛(게네사렛)은■보통 쓰이는 명칭은 겐네사르였다(I Makk 11, 67)■아마 세 개의 시내가 흐르는 충적지에 의해 비옥한 지대(El- guwer)로 되었던, 예수 당시에는 인구가 밀접해 있었던 호수의 서해안 북쪽 끝을 나타냈을 것이다. 그러나, 유다교 문헌에는 서해안 전체가 이 지명으로 불렸다.
헨드릭슨(W. Hendriksen)은 “게네사렛은 가버나움 남쪽에 있는, 인구가 조밀하고 비옥한 평원의 지명이다. 그 곳의 길이는 갈릴리 바다(게네사렛 호수 : 눅 5:1)를 따라 약 3마일, 넓이는 그 해변에서 약 1.5마일에 달한다.”라고 하였다.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유대 전쟁사■ III 516-521), 게네사렛 평원의 자연미와 토양의 비옥함이 극치에 달했다고 한다. 그는 “그 비옥한 토양에서 재배되지 않는 식물은 없었다.”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그 토양에서 생산되지 않는 식물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는 그 평원에서 호두, 종려나무 열매, 무화과 열매, 감람나무 열매, 포도 등이 생산되었다고 전한다. 이 게네사렛의 열매들은 유대의 랍비들에게 매우 인기가 좋았다. 그래서, 그 열매들은 축제 기간 중에 예루살렘에 반입시키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조치는 한 사람이라도 단순히 그 열매들을 즐겨 먹기 위해 축제에 참가하려는 유혹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려는 의도에서 취해진 조치였다.
이 게네사렛에서도 예수님의 소문이 자자하였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 【54】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라고 하였다.
게네사렛 주민들은 배에서 내리시는 예수님을 곧 알아보았다. 아마 그들 역시 예수님의 기적의 치유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방문하신 좋은 기회를 십분 활용하였다.
이 사실에 대해, 마가는 【55】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단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 채로 메고 나아오니라고 하였다.
침상(크랍바토이스, κραββάτοις)은 2:4의 주석을 보라.
예수님께 올 수 없는 환자들을 인도해 온 사람들은 아주 요긴한 사랑의 중개 역할을 다한 것이다. 직접 돕는 것도 귀한 일이나, 보다 더 귀한 일은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다.
“이 단락의 서술은 예수가 언제나 도상에 있었으며, 그가 어디에 있든지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는 인상을 준다. 편력(Wanderschaft)은 결코 도주가 아니다(이전의 저자들은 안티파스로부터의 도주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군중이 몰려드는 상황이 부가된다. 배에서 내리고, 군중이 몰려드는 것은 예수의 활동을 거의 선교자의 활동처럼 보이게 한다”( J. Gnilka, pp. 346-347).
마가는 군중이 예수님을 신뢰하여 거는 기대와 그 결과에 대해서, 【56】아무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마을이나 도시나 촌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라고 하였다.
시장(아고라이스, ἀγοραίς)은 도시 어귀에 있는 광장으로 관공서의 소재지이며, 많은 사람이 모여 상거래를 하는 곳이었다. 이러한 시장은 촌에는 해당되지 않으므로, D 사본에는 ‘거리’라고 하였다. 그러한 면에서 헨드릭슨(W. Hendriksen)의 “시장이란 단어는 너무 좁아서 실제로 시장을 마련할 수 없었던 마을의 빈터나 광장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라고 한 설명이 그럴듯하다.
예수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는 5:28의 주석을 보라.
치유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옷과 환자의 손의 접촉이 아니라, 예수님의 메시아적 능력과 믿음의 접촉이다. 물론, 이끌려 오긴 했으나, 불신 때문에 손을 대지 않은 자들은 치유받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설교에 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무리들의 강렬한 요구는 그들의 육신상의 필요를 넘지 못하였다. 예수께서는 좀더 깊은 필요를 충족시키기를 원하셨겠지만, 당장에는 그들의 육신상의 필요를 만족시켜 주셨다”(A. E. Sanner).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결국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들의 병을 고쳐 주시는 사람으로밖에는 보고 있지 않았다. 그 때문에 민중 사이에서 예수님의 명성은 점점 높아졌으나, 참 의미로서의 예수님과 민중의 관계는 차츰 멀어져 가는 것이 된다”(山口 昇).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사랑의 힘을 강력하게 발휘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