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특강 :제 42 강
2007-05-21 22:44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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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신약 주석 시리즈 완간/ 난해 성구 해설/ 형통의 기도/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Salvation Before Jesus Came/ 설교집 17권)
진보와 보수를 망라하여 48권의 마가복음 주석서들을 대조 연구하며 집필한 필자의 \\'마가복음\\'(신약 주석 시리즈)을 매주 1회씩(주일저녁 또는 오후예배와 수요저녁예배)을 교인들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매주 1회 가르칠 분량을 올릴 계획입니다. 여기에 예화나 실화를 첨가해서 사용하시면 더 유익할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여기에 난하주나 헬라어나 문장 부호 등을 제대로 표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 42 강>>
다. 물 위를 걸으심<6:45-52>
<비교 : 마 14:22-23, 요 6:15-21
이 전승을 디벨리우스는 “설화(■■공관복음서 문제■의 ‘디벨리우스의 견해’의 항)로 보며”(山口 昇), 불트만(R. Bultmann)은 기적 설화로 보고 있다. 슈바이처(E. Schweizer)는 “원래 이야기는 부활하신 주의 현현을 기술한 것으로 암시되어 왔다(cf. 요 21:1-14).”라고 했으며, “또한 상징적 설화라든가 경건한 전설”(데라)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다. 그러나, 보다 더 적합한 이해를 한 이로 그닐카(J. Gnilka, p. 340)를 들 수 있다. 그는 “실제로 이 전승은 제자들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유령을 보았다고 생각한 점에서, 또 예수가 그들에게 자기를 알려야 했다는 점에서 현시 설화들(특히 눅 24:37)과 주목할 만한 병행을 이룬다.■■■■■■이 현시가 이차적인 단계에서 기적 설화의 특징들을 지니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현시 설화와 기적 설화가 결합된 이 전승은 45, 48, 49절 등을 미루어 단순한 상상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사실에 기초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마가는 이 이야기를 【45】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로 시작한다.
그닐카(J. Gnilka, p. 340)는 “예수가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타게 한 것은 오천 명의 급식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 예수가 군중과 군중의 바람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했다는 요한복음 6:15의 해석을 마르코복음에 첨가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반대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즉, 예수께서 제자들을 재촉하사 신속하게 그리고 긴급하게(E. P. Gould) 보내신 이유를 요한복음 6:15의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에서 찾고 있다.
장정만도 오천 명이나 되는 군중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배불리 먹고는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오해하여 왕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이러한 열광적인 분위기 속에 제자들이 휩쓸릴까 보아 예수께서 자신이 군중을 보내는 동안에 제자들로 하여금 배로 건너편 벳새다로 급히 가도록 재촉하신 것이다. 십중팔구, 제자들도 군중과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지시를 받은 제자들의 목적지에 대해 그닐카(J. Gnilka, p. 340)가 잘 설명하고 있다. “제자들의 목적지는 여기서 처음으로 언급된, 베드로와 안드레아의 고향으로 알려진(요 1:44) 베싸이다이다. 이것은 겐네사렛 호수의 북동쪽에, 그리고 요르단 강의 동쪽, 요르단 강이 호수에 합류되기 직전의 자리에 놓여 있었다. 이 도시를 필립보가 아마 주후의 세기로 접어들기 전에 새로 세운 도시인 율리아스(Julias)와 동일시할 수 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추측해 볼 수는 있다(Scher II, 208f, Abel, Géographie II, 279f).” 고울드(E. P. Gould)와 빅켈스테트(E. Bickersteth)는 이 벳새다 외에 또 하나의 벳새다가 갈릴리 호수 서쪽 가에 있었다고 한다.
목적지에 대해 요한은 가버나움이라고 한다(요 6:17). ■“아마도 벳새다 광야에서 서벳새다에 상륙하고, 다시 출범하여 가버나움으로 갔을 것이다”(W. C. Allen).■(마 14:22의 주석).
예수께서 제자들을 서둘러 보내고, 군중을 돌려보내신 또 하나의 이유에 대해, 마가는 【46】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라고 하였다.
이 구절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1:35의 주석을 보라.
예수님은 메시아답게 사람들의 환호와 갈채에 안주하시지 않았고, 또한 그러한 것을 즐기시려고 하지도 않았다. 지도자들을 비롯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환호와 갈채에 안주하느라 자신과 자신의 인생을 상실하는지 모른다. 이러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본받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환호와 갈채보다도 하나님 아버지와의 고독한 기도의 교통을 더 중시하셨다(1:35, 6:41, 46, 눅 3:21, 5:16, 6:12, 9:18, 28, 11:1, 22:41). 예수님은 자신의 선교 활동의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기도를 통해 오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도 잘 아셨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의 숨겨진 샘은 바로 기도이었다. 기도는 생의 갱신과 새 능력의 방편이다.
그때의 상황에 대해, 마가는 【47】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라고 하였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지시를 복종하여 노를 저어 가고 있는 중이고, 예수님은 홀로 남아 기도하시는 중임을 나타낸다.
저물매는 군중을 먹이신 때를 “저물어 가매”(6:35)라고 한 것을 보아 해가 이미 저문 때를 가리키는 것 같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는 밤에 예수님과 떨어져 있는 제자들이 탄 배가 바다 가운데 있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마가와 마태는 예수께서 밤에 홀로 계셨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E. Bickersteth).
요한은 그때의 상황에 대해,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요 6:18)라고 하여, 바다 가운데 있는 제자들의 어려움을 나타내고 있다. 유의해야 할 것은 주님의 지시대로 순종하는 인생 항로에도 풍랑이 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어려움에 처한 제자들과 멀리 떨어져 계신 예수님의 행동에 대해, 마가는 【48】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라고 하였다.
마태복음 14:24에는 그 배를 저어 가는 제자들이 파도로 인해 고난을 당하고 있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제자들 중에는 본래 어부들도 있었으나, 그들 역시 바람의 힘을 어찌하지 못했다”(山口 昇). 자연 앞에 무력한 전문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고통을 보시고, 그들을 구하시기 위해 바다 위로 걸어 오셨다.
예수님은 홀로 떨어져 기도하셨지만, 마음속에는 제자들이 있었다. 우리는 몸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마음은 늘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또한, 우리가 위기에 처할 때에는 반드시 우리를 찾아오시는데, 그 길을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米田豊은 “이 광경은 마치 우리들의 신앙 생활과도 흡사하지 않은가?■■■■■■주님은 지금 하늘에서 기도하고 계시는데, 인생의 항해에 있어서 역풍이라든가 격랑이 우리를 괴롭힌다. 사람의 경험이라든가 기량, 재능으로는 이것에 대처해 나갈 길이 없다. 이러한 때는 고요히 주님을 대망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밤 사경 즈음에는 구약성경이 밤 삼경밖에 모르고 있었으므로, 밤을 사경으로 구분하는 로마의 계산법이 고려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로마의 계산을 따르면, 오후 6-9시, 오후 9-12시, 오전 12-3시, 오전 3-6시로 구분된다. 그러므로 밤 사경은 오전 3-6시를 가리키는 것이다.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에 대해, ■파울루스(Paulus)와 테일러(Taylor)는 단순히 해변을 걸어서 온 것이라고 합리적인 해석을 하였다. 이 해석은 “논리학, 해석학, 훌륭한 의식, 그리고 정직에 대한 우스꽝스러운 모욕이다.”라고 한 라베이터(Lavater)에 의해서 올바른 비판을 받았다. “어떤 사람들은 봄에는 헤르몬(헐몬) 산에서 흙이 흘러내려 쌓이기 때문에 갈릴리 바다의 안변은 얕은 여울이 되는데, 예수님은 거기를 건너가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합리적 설명은 조금도 쓸모가 없다”(山口 昇). 또, 그러한 부류의 합리적 해석에 대해 웨셀(W. W. Wessel)은 “합리화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짓이다.”라고 비판하였다.
마가의 의도는 예수님에게서 자연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이, 특히 제자들에게 나타난 사실을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이다(참조 : 시 89 :9, 사 51:10, 15, 렘 31:35). 따라서, 우리는 그와 같은 초자연적 특성을 나타내는 기적에 대해 섣불리 이성적 관점으로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만물 창조 자체가 유한한 인간의 이성적 관점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러한 기적이 예수님에게서 나타난 신적 능력의 산물이라는 점을 내세우는 복음서 기자들의 의도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는 성령(고전 2:10. 참조 : 고전 2:11, 12:3)을 받음으로써(눅 1:15, 41, 67, 행 2:4, 고전 2:12, 엡 5:18. 참조 : 요 3:5-8) 가능해지는 것이다. 즉, 영의 일에 관한 것은 영적 이해가 필요한 것이다(고전 2:13-14).
지나가려고 하시매에 대해 (1) 제자들에게 기쁘게 배로 맞아들일 기회를 주시기 위한 것이라는 설(“Meyer”, W. Hendriksen), (2) 예수님의 어떤 의도가 있은 것이 아니라, 단순히 제자들이 받은 인상을 나타낸 것이라는 설(D. W. Burdick, “Cranfield”, 이상근), (3) 제자들의 믿음을 시험하시려는 의도라는 설 등이 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오셨으면서 제자들 곁으로 그냥 지나가시려고 하신 것을 미루어 많은 학자들의 견해인 (3)설을 취해야 할 것이다.
이 구절(40절)에 대한 교부들의 해석은 매우 흥미롭다. 제롬(Jerome : 347?-420? 라틴어역 성서 완성)은 “밤 사경은 마지막이다.”라고 하였고, 어거스틴(Augustine : 354-430)은 거기에 덧붙여, “그의 교회를 본 이는 마침내 밤 사경, 즉 세상 끝에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기 위해 오신다. 그 때, 죄와 악의 밤은 끝난다.”라고 하였다. 테오필락트( Theophylact)는 “그의 제자들이 인내를 배울 수 있도록 위험으로 인해 지칠 때까지 두신다. 그리고 아침까지는 오시지 않는다, 견딤과 믿음을 배울 수 있도록.”이라고 하였고 ; 힐라리(Hilary)는 “일경은 율법 시대, 이경은 선지자의 시대, 삼경은 복음의 시대, 사경은 영광의 재림 시대이다. 그 때, 그는 적그리스도와 세상의 풍랑에 의해 타격을 받은 교회를 찾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배 안에 그를 받아들임과 그로 인한 잔잔함은 재림 후의 교회의 영원한 평화를 예시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예수님의 의도는 제자들의 미성숙한 믿음이 드러나는 결과가 되었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 【49】제자들이 그의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지르니라고 하였다.
그 동안 예수님의 많은 이적을 본 제자들이 정상적인 믿음이 있었더라면, 파도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이내 알아보았어야 했다. 이 세상에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이가 있다면, 예수님밖에 더 있겠는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제자들은 풍파를 만난 자기들을 돕기 위해 풍파 위를 걸어오신 사랑의 주님을 유령으로 여겨 소리를 질렀다. “밤에 유령이 재앙을 가져온다는 대중 신앙은 탈무드에 보존된 전승에 의한 것이다”(W. L. Lane).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유령이 가끔 해상에 나타나 풍랑을 일으킨다고 생각하였다. 그렇다고 하면, 제자들은 아직도 미신적인 대중 신앙을 버리지 못했고, 또한 유령을 제압하시는 주님의 권능을 제대로 믿지 못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구주로 보는 대신에 유령처럼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제자들이 소리지른 것에 대해, 콜(R. A. Cole)은 “의도적으로 예수를 향해 소리지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소리는 그의 즉각적인 응답을 얻기에는 충분하다. 주의 응답 능력은 우리의 요청의 부적절성에 제한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종종 우리가 고려해야 할 부적절성에 대해 주도적 응답으로 승낙하신다.”라고 잘 설명하고 있다.
마가는 제자들이 소리지른 이유에 대해, 【50】저희가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더불어 말씀하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시고라고 하였다.
“모두가 그를 보았다는 삽입된 언급은 그리스도의 현시가 실제로 일어난 것임을 확고히 해 놓으려는 것이다”(J. Gnilka, p. 343). 제자들은 도우러 오신 예수를 보고 유령으로 여겨 놀랐다.
“원문에서 갑작스런 공포와 불안을 느끼는 이러한 상황을 시사해 주기 위해 사용된 동사(에트라크테센, ἐτράχθησεν)는 그 의미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마 2:3에서, 그 동사는 ‘유대인의 왕’의 출생에 관한 소문을 들었던 헤롯 대왕의 공포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 동사는 능동태로서 ‘용기를 잃다’, ‘동요되다’, ‘고통스럽다’, ‘마음이 흔들리다’ 등의 의미가 있다.■■■■■■또, 그 동사는 상징적인 의미로 마음과 생각을 뒤흔들어 놓음으로써 당황하게 하고, 불안감에 빠지게 한다는 능동의 뜻을 지니는 동시에 이처럼 공포에 사로잡히거나 깜짝 놀랐다(마 2:3, 14:26, 눅 1:12, 24:38, 요 11:33, 12:27, 행 15:24, 갈 1:7, 5:10, 벧전 3:14)는 수동의 뜻도 지닌다”(W. Hendriksen).
배를 삼킬 듯한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 그것도 기진맥진한 상태로 유령을 만난 줄 알고 두려워 떨던 제자들에게, 내니 두려워 말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메시아적 선언보다 더 큰 위로는 없다. 따라서, 인생의 풍랑 속에서 예수님을 볼 영안이 없고,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영의 귀가 없다는 것은 얼마나 큰 비극인지 모른다.
안심하라는 타르세이테(θαρσείτε)이며 “신약에 일곱 번 사용되고 있으나(10:49, 마 9:2, 22, 14:27, 요 16:33, 행 23:11), 10:49을 제외하고는 어느 것이나 예수님 혹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의해 말해지고 있다”( 山口 昇).
특히, 내니(에고 에이미, ἐγώ εἰμι : ‘나는 ~이다.’)는 요한 문체의 두드러진 특징이다(요 10:49, 8:12, 18, 10:7, 9, 11, 14, 11:25, 14:6, 15:1, 2 ). 예수님이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시는 경우에는 대체로 신적 권위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닐카(J. Gnilka, pp. 343-344)는 “자기를 확인하는 문구 이상의 것이다. 이것은 구약성서적인 계시의 공식인데, 칠십인역을 거쳐 예수의 입에서 신약성서적 계시의 진술이 된다. 여기서 하느님의 자기 진술인 ani hu(내가 그다 : 특히 제 2이사야서에 나옴)가 칠십인역에서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로 번역된 사실이 중요하다. 구약성서에서 다양하게 적용될 수 있는 하느님의 자기 진술을, 여기서는 하느님이 자기 존재를 계시하는 공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런 계시 공식에서 볼 때에 호수 위를 걷는 것에 대한 단화는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라는 말이 없는 부활절 현시 설화와 구별된다”(J. Gnilka, pp. 343 -344).
두려워 말라(μὴ φοβείσθε)는 신적 현시에 속한 말이다(16:6, 마 28:5, 눅 1:13, 30).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위기에 처한 인간에게 예수님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라는 말씀보다 더 큰 위로와 힘이 되는 것은 없다. 따라서, 위기 중 위기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귀가 없는 것이다.
마태는 이 때쯤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베드로에 관한 일화를 기록했지만(마 14:28-31), 마가는 생략한 채, 【51】배에 올라 저희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라고 하였다.
山口 昇은 “바람이 그친 것은 이적에 의한 것이었는지 어떤지 분명하지 않다. 바람이 그친 원인은 아무것도 이야기되고 있지 않으므로, 아마 자연히 그친 것일 것이다.”라고 하지만, 예수께서 배에 올라 저희에게 가시자 바람이 그친 것을 미루어 예수님의 기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 기적은 예수님이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다는 점을 빼면, 4:39의 기적과 같다(4:39의 주석을 보라). 이제 모든 위기와 고통은 사라지고 주님의 평화가 깃들었다.
마음에 심히 놀라니의 놀라니는 1:22의 주석을 보라.
제자들이 심히 놀란 까닭에 대해, 마가는 【52】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라고 하였다.
마가에게 있어서 제자들의 놀람은 그들의 영적 몰이해와 영적 몰지각을 나타내는 것이다. 黑崎幸吉은 “만일 빵의 기적을 보고 예수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그를 하나님으로 경배할 마음이 되어 있었다면, 이럴 때에 그들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아직 빵의 기적의 의의를 충분히 깨닫지 못했었다. 예수를 육으로 아는 자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닫기가 쉽지 않다.”라고 하였다.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마음이 둔하여졌다.
마음(카르디아, καρδία)은 2:6의 주석을 보라.
둔하여졌음이러라(페포로메네, πεπωρμένη)에 대해, 산너(A. E. Sanner)는 “굳어짐으로써 마음에 새겨지지 않음을 뜻한다. 겉으로는 그들이 자주 놀라고 경탄하지만, 그 놀람은 일시적이며 깊이가 없었다. 다시 영적 지둔에로 되돌아가는 경향은 육적 마음의 가장 깊은 경향의 하나이다. 오순절 이후에는 그런 재발이 없었다. 새 언약에 속하는 중심 언약의 하나는 ‘내가 너희 육신에게서 굳은 마음을 제하리라’(겔 36:26)라는 말씀이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제자들의 마음의 둔함은,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의 냉담이나 무감동과는 다른 것이다. 전자는 믿음이 적은 결과이고, 후자는 불신앙과 증오의 결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