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특강 : 제 37 강
2007-04-10 03:05
관리자
2027
(저서:신약 주석 시리즈 완간/ 난해 성구 해설/ 형통의 기도/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영문, 한글/ 설교집 17권)
진보와 보수를 망라하여 48권의 마가복음 주석서들을 대조 연구하며 집필한 필자의 \\'마가복음\\'(신약 주석 시리즈)을 매주 1회씩(주일저녁 또는 오후예배와 수요저녁예배)을 교인들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매주 1회 가르칠 분량을 올릴 계획입니다. 여기에 예화나 실화를 첨가해서 사용하시면 더 유익할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여기에 난하주나 헬라어나 문장 부호 등을 제대로 표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 37 강>>
10. 열 두 제자를 파송하심[6:6 후반-13]
<비교 : 마 10:1, 5, 9-14, 눅 9:1-6>
이 이야기의 6절 후반과 7절 그리고 12-13절이 마가의 편집구라고 하는 점에 있어서는 거의 모든 주해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그렇다면, 8-11절에 나온 지시의 말씀은 복음서 저자가 이 장면에 삽입한 것임이 드러난다. 이로써 그는 역사적인 장면을 작성했으며, 다시 역사화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게 한다”(J. Gnilka, p. 303).
이 지시의 말씀은 마가가 예수님의 말씀의 전승(Q)에서 따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부란스감은 “이들 수 절에 의하여 기술되고 있는 사건은 예수의 생애의 활동을 보존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전승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더욱이, 슈바이쳐(E. Schweizer)는 “마가복음 6:8 이하도 예수님의 상황에 아주 적합한 형태로 Q에 나타난다. 즉, ‘스스로 얻지 말라......’(그러므로 그것은 가장 오래 된 형태<마 10:9-10 전반>로 나타난다). 게다가, 11절의 종말론적 긴장과 극도의 진지함은 예수님에게서 비롯됐을 수 있다(cf. 눅 10:11).”라고 하여, 이 전승의 역사성을 인정하고 있다. “데라, 크란필드도 이 전승의 역사성을 인정하고 있다”(山口 昇).
마가는 이 이야기를 열 두 제자를 파송한 이야기에 앞서, 【6 후반】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라고 하였다.
나사렛에서 배척받으신 예수님은 그 곳을 나오셔서 나사렛 근처의 마을들(E. P. Gould, J. Gnilka, p. 304)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셨다. 이어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교하도록 파송하셨다.
그 사실에 대해, 마가는 【7】열 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라고 하였다.
열 두 제자는 3:16-18의 주석을 보라.
둘씩둘씩 보내시며는 본서만의 기록이다. 둘씩 둘씩 보내는 것은 분명히 유대의 습관이었다(참조 : 11:1, 14:13, 행 13:2, 4, 16:40). 예수께서 그렇게 하신 목적은 그들의 증언의 진실성을 확증하기 위한 것(신 17:6, 19:15, 민 35:30, 마 18:16, 고후 13:1, 히 10:28)과 서로 격려하고 도움을 주고받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참조 : 전 4:9). 이 방법은 후에 선교사 파송의 관례가 되었다(행 13:1-3, 15:39-40, 17:14, 19:22).
레인(W. L. Lane)은 “열 두 제자를 파송한 것은 유대교의 법 시행에 충분한 배경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권위 있는 개인들에 의해 실천된 행동의 공적 성격을 인식했다. 가장 단순한 형태로 요약하면, 율법의 인식은 ‘보냄받은 사람은 그를 보낸 사람과 같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 공식은, 그 용어의 법적 의미에서 예수님의 임명된 대표들로 보냄받은 열 두 제자들의 사명 배후에 놓인다.”라고 하였다.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는 3:15의 주석을 보라.
제자들을 파송하시는 예수께서 선교 여행 준비를 위해 주신 명령에 대해, 마가는 【8】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라고 하였다.
지팡이가 여기서는 허락되었으나, 마태복음 10:10과 누가복음 9:3에는 허락되지 않았다. 지팡이는 여행자가 짚고 다니는 것인데, 때로는 무기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山口 昇은 “데라와 크란필드는 엄격한 마태와 누가의 것이 원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차라리 거꾸로 예수님은 여행자로서 소지해야 할 최저의 것을 허락하셨다고 보아야 할 것으로, 마태와 누가가 사용한 전승이 과장하여 지팡이까지도 가지고 가서는 안 된다고 명하신 것 같이 변경시켜 버렸다고 생각된다(■스위트).”라고 하였다.
양식은 아르톤(ἄρτον)이며, 직역하면 ‘빵’이다.
주머니는 페란(πήραν)이며 ‘바랑’, ‘부대’, ‘큰 자루’ 등을 뜻하는데, 주로 여행자들이 물건을 담는 데 사용하였다(마 10:10, 눅 9:3, 10:4, 22: 35-36).
전대의 돈의 돈은 칼콘(χαλκόν)이며 ‘구리’, ‘놋쇠’ 등을 의미하며, 여기서 ‘동전’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위에 언급된 것들을 갖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계속된 명령에 대해, 마가는 【9】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라고 하였다.
신만 신고의 신은 산달리아(σανδάλια)이며 “가장 간단한 신의 일종이다”(黑崎幸吉). “이 신은 발등을 보호하는 신과 대조되는 것으로, 밑바닥은 나무나 가죽 또는 풀 뭉치로 되었고, 거기에 가죽끈이 달려 있어서 발에서 벗겨지지 않게 되어 있었다”(W. Hendriksen).
누가복음 10:4과 병행구인 마태복음 10:10에는 신도 금지되어 있다. 이 경우도 예수님의 명령을 더욱 엄격하게 하기 위해 과장한 것으로 여겨진다.
두 벌 옷도 입지 말라의 옷은 복수형인 키토나스(χιτώνας)이며, “걸쇠로 어깨에 걸쳤던 것으로 대부분 양모나 아마포로 만들어진 속옷이다.
선교 여행을 위해 주신 예수님의 명령의 요지는 여행에 필요한 것을 일절 갖지 말라는 것이다. 이 명령은 제자들에게 선교 실습이라는 특별한 상황에 주신 일시적인 것이지 항구적인 것은 아니다. 이 점은 제자들이 예수께 선교 보고를 한 사실(6:30, 눅 9:10)과 나중에는 예수께서 선교 여행 장비를 갖추도록 권하신 사실(눅 22:35-38)을 보아 알 수 있다.
어드만(C. R. Erdman)은 “열 두 제자에게 주신 특별한 교훈은 실제적이기는 하나 청빈을 나타내거나 무슨 특별한 곤란을 꼭 맛보게 하려는 것은 아니다.......그들은 대규모적인 준비로 지체해서는 안 되고 불필요한 행장으로 짐이 무거워져도 안 되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해 주고 평안을 갖다 주면, 그것을 받는 사람들에게서 대접을 받으리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참 사자는 언제나 민속하고, 항상 일할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하며, 이 세상 일로 과도한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되며, 그 사업에서 보수를 받아야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문제는 별로 어려울 것이 없었다. 고대의 동양에서는 환대가 신성한 의무이었다. 나그네가 어느 마을에 들어갔을 때, 환대는 그 마을의 의무였으므로 굳이 환대를 구할 필요가 없었다. 더욱이, 선교사에 대한 교인의 중요한 의무 중 하나는 그들을 대접하는 것이었다(요삼 1:5). 그러므로 제자들이 반드시 갖춰야 할 선교 여행의 태도는 필요한 때에 필요한 것을 어떤 식으로든지 채워 주시는 하나님께 대한 궁극적 신뢰라 할 수 있다.
제자들이 어느 집에 들어갔을 때의 처신에 대하여 주신 예수님의 충고에 대해, 마가는 【10】또 가라사대 어디서든지 뉘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라고 하였다.
선교 실습을 나가는 제자들이 머무르려는 집을 결정하는 방법에 대해, 마태는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마 10:11)라고 하였다. 아무튼, 일단 머무를 집이 결정되면, 그 집의 대접에 만족하면서 그 집을 복음 선교의 기지로 삼으라는 것이다. 만일에 대접에 불만을 품고, 보다 더 좋은 대접을 받기 위해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겨 다니게 되면, 처음 집의 주인에게 무안과 불쾌감을 주게 되고, 또한 복음 선교에도 지장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제자들이 배척받을 경우의 처신에 대해 주신 예수님의 충고에 대해, 마가는 【11】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치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라고 하였다.
유대인들에게는 이교도의 지역을 통과하는 여행을 한 후, 다시 유대 땅 곧 성지에 들어오기 전에 신과 옷에 묻은 먼지를 떨어버리는 관습이 있었다. 그 까닭은 이방인의 땅을 부정한 곳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취지는 제자들을 배척하고,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지도 않는 곳을 이방의 땅과 같이 부정한 장소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개인적인 분노나 악의를 표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지방 사람들과 아무 관계도 없음을 나타내는 태도”(黑崎幸吉)를 표하라는 것이다. 복음 선교에 있어서 복음을 받지 않는 사람들과의 구별은 꼭 필요한 것이다.
“여기 증거의 개념에는 (1) 하나님께 대하여 그분의 은혜와 그분의 사자들을 거역한 자들에게
닥칠 심판에 대한 증거, (2) 관여된 사람들에 대하여 경계와 회개를 촉구하기 위한 증거, (3) 최후의 심판 때에 그들 앞에 갖출 증거, 즉 경계는 벌써 주어졌으나 그들이 불응했다는 사실 등이 포함될 것이다”(Cranfield).
후에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의 유대인 구역에서 노골적인 박해로 쫓겨나게 되었을 때, 자기들의 발에서 티끌을 떨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갔다(행 13:50-51).
마가는 제자들의 활동에 대해, 【12】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라고 하였다.
회개하라(메타노에소신, μετανοήσωσιν)의 명사형과 전파하고(에케뤼스손, ἐκήρυσσον)는 1:4의 주석을 보라.
회개하라 전파하고는 제자들의 주요 업무가 회개를 촉구하는 선포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예수님의 경우와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1:15).
이어서 마가는 【13】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라고 하였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받은 권세로 많은 귀신들을 쫓아내었다. 그러나, 항상 성공한 것은 아니다(9:18). 그들은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시는 권세를 제외하고는 무기력하였다. 이 사실은 어째서 기도가 우리에게 중요한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또한, 제자들은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쳤다. 사실상, 고대 세계에서 기름은 의약품으로 널리 사용되었다(사 1:6, 눅 10:34, 약 5:14, 참조 : 38:21). 헬라의 위대한 의사였던 갈렌(Gallen)은 “기름은 병든 몸을 고치는 가장 좋은 약품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단순한 의약품으로서의 기름이 아니라, 기름이 예수님의 권세를 부여받은 제자들의 손에 의해 사용되었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말씀에 대한 가장 좋은 주석은 야고보서 5:14 후반의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라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 부여해 주신 권세에 의한 제자들의 축귀와 치유는 도래하는 하나님의 통치와 예수님의 메시아적 권능을 입증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