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특강 ; 제 36 강
2007-04-03 06:00
관리자
1610
(저서:신약 주석 시리즈 완간/ 난해 성구 해설/ 형통의 기도/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영문, 한글/ 설교집 17권)
진보와 보수를 망라하여 48권의 마가복음 주석서들을 대조 연구하며 집필한 필자의 \\'마가복음\\'(신약 주석 시리즈)을 매주 1회씩(주일저녁 또는 오후예배와 수요저녁예배)을 교인들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매주 1회 가르칠 분량을 올릴 계획입니다. 여기에 예화나 실화를 첨가해서 사용하시면 더 유익할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여기에 난하주나 헬라어나 문장 부호 등을 제대로 표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 36 강>>
9. 고향에서의 배척[6:1-6 전반]
<비교: 마 13:53-58, 눅 4:16-30>
이 단화의 성립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불트만(R. Bult- mann)은 독립된 로기온(짧은 단편적인 말씀)에서 이상적인 장면이 어떻게 구상되었는가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로 생각된다고 한다. 그는 Pap Ox. I, 5에 전해진 주의 말, 즉 “예언자는 고향에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의사는 아는 사람을 고치지 못한다.”가 막 6:4 이하에 비해 일차적인 것이라는 벤들링(Wendling)의 주장을 옳다고 생각한다. 이중 격언의 후반부는 설화로 바뀌어졌으며, “그를 아는 사람”은 “친척”(6:4 )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리고 결어인 막 6:5은 예수의 완전한 실패가 보도되지 않도록 제한되고 있고, 더욱이 5절 후반은 5절 전반과 모순된다고 하면서, 이 작문을 마가 이전의 선교 경험에 근거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는 2절의 “그들은 놀랐습니다”와 3절의 “예수를 배척한지라” 사이의 긴장을 관찰한 결과로, 원래는 예수의 성공적인 등장을 보도한 것이었다고 추측하였다. 결국 그는 이 단화를 로기온(격언)과 예수의 성공 장면으로 구성된 것이었는데, 그 장면은 다시 후대의 선교적 경험에 영향을 받아 반대로 개작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닐카(J. Gnilka, p. 290.)는 “불트만과 마찬가지로, 이상적인 장면에 대해 말하는 코흐(Koch)는 5절에서 새로운 관점이 도입되었다고 생각한다. 나자렛에서 예수의 등장(3-4절)은 신앙과 기적의 관련성에 관한 주제로 확대되고(5절 전반, 6절 전반), 가르침과 기적을 결합하는 서막에 의해 풍부해졌다(2절). 4절로 끝나는 단락은 양식에 있어서 순수한 ‘아포프테그마’로 간주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또, 그닐카(J. Gnilka, p. 290.)는 “그랫서(Gr1Ber)는 이 단화를 전혀 다르게 평가한다. 헤혠과 더불어 그는 설화자 마르코에게는 ‘예수가 그의 고향에서 설교를 했는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사실만이 알려졌다고 전제한다. ‘다른 것들은 모두 이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에 대처하려는 그리스도교적 전승의 시도라는 것이다.’ 이렇게 그랫서는 마르코복음의 대본에 대한 재구성을 포기하고, 오로지 마르코적 경향성을 탐색하는 데 몰두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어떤 견해를 제시하든, 이 단화를 후대 교회의 창작이라고 결론짓는 것은 지나친 추측에 불과한 것이다. 山口 昇은 “데라는 예수의 형제의 이름이 들려지고 자매에 관한 언급이 있는 점(3절), 후에 초대 교회의 중요 인물이 되는 예수의 가족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말이 있는 점(4절),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이적을 행하실 수가 없었던 점(5절), 예수께서 사람들의 불신앙에 놀라신 점(6절) 등이 이 전승이 사실(史實)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부란스감도 이 설화에는 ‘특이한 전기적 가치가 있다.’라고 인정한다. 크란필드도 데라의 이유에 추가하여 예수께서 ‘마리아의 아들’(3절)이라고 불리고 있는 점을 든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있던 초대 교회가 일부러 예수를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그대로 두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역시 이 전승은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고 생각된다.”라고 하였다.
마가는 이 이야기를【1】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좇으니라로 시작한다.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가버나움을 떠나 고향으로 가셨다. 그 고향은 나신 곳인 베들레헴이 아니라, 성장하신 곳인 나사렛을 가리킨다(4절, 눅 4:16). 가버나움에서 ‘나사렛’(1:9의 주석을 보라.)까지는 하루쯤 걸리는 거리였으며(A. E. Sanner, E. Bickers- teth), 예수님의 여행 목적은 가족 방문이 아니라 복음 선교이었다(A. E. Sanner).
제자들도 좇으니라는 예수께서 랍비로서 고향에 돌아온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W. L. Lane). 랍비들은 소규모의 제자단을 거느리고 마을을 돌아다녔다(W. Barclay).
고향에서의 예수님의 선교 활동과 고향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 마가는【2】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 됨이뇨라고 하였다.
안식일(1:21의 주석을 보라.)에 회당(1:21의 주석을 보라.)에서 가르치는 것은 예수님의 관례적인 선교 방법이었는데(1:21, 39, 3:1), 나중에 바울에 의해 답습되었다(행 13:11, 17:1-2).
누가복음 4:17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이사야의 글을 넘겨받아 61:1- 2 전반을 본문으로 선택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사야의 이 부분은 그 특별한 안식일에 적합한 ‘하프타라’(Haphtarah: 선지자들의 교훈)였다”(W. Hendriksen).
그 내용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라고 하는 예언이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주목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 4:21)라고 하심으로써, 자신과 자신의 사역을 통해 예언이 실현되고 있음을 암시하셨다.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1:22의 주석을 보라.)는 청중의 일차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놀라움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내 경멸하는 투로(W. L. Lane, W. W. Wessel)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 됨이뇨 라고 하였다.
지혜는 소피아(σοφία)인데, 바클레이(W. Barclay)는 “철학적이거나 사색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 즉 인생을 위한 지혜를 의미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더욱 구체적으로 “일상 생활에 있어서의 결단이나 인간 관계에서 행동으로 옮겨지는 지혜이다.”라고 설명하였다. 워드(R. A. Ward)는 “지혜는 지식과 그 지식의 응용을 포함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약 1:5의 주석).
우리는 그러한 설명에 ‘보다 더’를 보충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매일의 생활 속에서 보다 더 나은 결단과 행위, 보다 더 값진 결단과 행위, 보다 더 중요한 결단과 행위, 보다 더 우선적인 것에 대한 결단과 행위로서의 지혜이다. 지혜로운 결단과 행위를 위해서 먼저 ‘보다 더 ~한 것’을 분별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우주 만물이나 삶에 있어서 이러한 올바른 분별과 판단, 그리고 그에 입각한 결단과 행위란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서만 가능해지는 것이다(잠 9:10, 시 111:10, 욥 28:28). 다시 말하면,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섭리자이신 하나님 편에 설 때에만 참 지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기독교인들은 세상적인 것보다는 하늘 나라를, 육적인 것보다는 영적인 것을, 일시적인 것보다는 영원한 것을, 그리고 자신보다는 하나님을 위한 결단과 행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행위이며 삶이었다.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의 죽음이란 하나님의 죽음이나 마찬가지로 온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요 만물을 통일시키는 것이었다(엡 1:7-10). 한 마디로 말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복종이었다(빌 2:5-9). 그러한 의미에서,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해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춰져 있느니라”(골 2:3)라고 하였고, 또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서신에서도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라고 설명하고 있다(고전 1:24, 2:7-8).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애와 죽음에서 분명하게 보여준 바와 같은 지혜는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서도 나타나야 할 것이다. 米田豊의 말대로 우리들은 모든 경우에, 섭리에 있어서의, 또한 말씀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혜가 없으면 안 된다. 야고보는 이와 같은 지혜가 부족할 때에 하나님께 구하라고 권면해 준다. 우리는 인간(사람 혹은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와 다르다. 참조: 고전 1:1-25, 27, 2:6-8)에게가 아니라, 지혜의 원천이신(롬 11:33, 12:3, 엡1:17)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시락(Sirach)의 아들 예수는 “모든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며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있다.”라고 하였다(집회의 서<Ec- clesiastcus> 1:1).(약 1:5의 주석).
권능은 뒤나메이스(δυνάμεις)이며, 고전 헬라어에서는 자연적 힘을 뜻하였고,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 또는 ‘속성으로서의 힘’(눅 1:17, 행 3:12, 고전 1:18), ‘능력 있는 행위’, ‘이적’(마 11:20) 등을 의미하였다. 이 낱말은 다이나마이트(Dynamite)로 영역되어 폭발하는 힘을 표시하게 되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지혜와 이적을 행하는 권능에 대해 들었고,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근거가 하나님인지 마귀인지 알 수 없다는 식으로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신앙은 예수의 고유한 기원을 안다.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예수의 고향 환경에 대한 지식이 고향 사람들로 하여금 계시에 대한 그의 주장을 인정하는 데 거의 극복할 수 없는 장애가 된다. 그는 방금 회당에서 지혜의 교사로 입증되었다. 지혜의 말은 하느님에 의해 그에게 주어진 것이고 지혜 교사로서의 예수를 권위 있는 자로 선언할 수 있게 한다(참조: 1:21). 고향 사람들은 질문을 던짐으로써 이 점을 인정하지 않고 의심한다. 나자렛 사람들은 기적에 대하여 물어야 할 직접적인 계기가 없다. 물론 그들은 그의 기적들에 대해서 들었을 수 있다”(J. Gnilka, p. 294).
예수님에 대한 고향 사람들의 경멸과 비아냥거림은 더욱 노골적으로 나타난다.【3】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는 마태복음 13:55에는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막 6:3)로 되어 있고, 누가복음 4:22에는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로 되어 있다. 요셉은 목수였고, 예수님도 삼십 세까지 목수의 일을 계승하신 가정 생활이 잘 전해지고 있다.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일종의 경멸을 내포한 것이다. 이 점에 대해, 레인(W. L. Lane)은 “어머니가 과부일 경우에도 남자를 어머니의 아들로 묘사하는 것은, 경멸하는 말투를 제외하고는 유대적 용법이 아니다.”라고 설명하였다. 또한, 우리는 이 표현을 통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관련된 신앙적인 암시를 읽을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닐카(J. Gnilka, pp. 295-296)는 “보도의 전면에 걸쳐서는 고향 사람들이 예수를 모욕하지만, 그 이면에는 동정녀 탄생과 관련된 신앙의 진술이 암시된다고 추측할 수 있다.”라고 잘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의 양부인 요셉이 언급되지 않은 것을 미루어 이 때 이전에 요셉이 죽은 것으로 생각된다.
목수는 테크톤(τέκτων)이며 주로 ‘목수’를 뜻하나, ‘석공’, 또는 ‘금공’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건축 직공’이나 ‘건축 기술자’로 이해하는 것이 적합하다.
저스틴 마티어(Justin Martyr)는 주후 155-161년에 저술한바 예수의 말씀에 관한 내용이 수록된 저서 「트리포와의 대화록」 88문항(Dialog- ue with Trypho LXXX VIII)에서, 예수께서는 목수로서 쟁기와 멍에를 만드는 직업에 종사하셨다는 말을 전하고 있다(W. Hendriksen, 山口 昇).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 그리고 그 누이들에 대해서는 3:31의 주석을 보라.
야고보는 야고보서의 저자(필자의 「야고보서 주석」을 보라.)이며, 예루살렘 교회의 초대 지도자로 활동하였다(행 12:17, 15:13, 21:18, 고전 15:7, 갈 1:19, 2:8, 12, 약 1:1, 유 1).
요셉과 유다와 시몬 그리고 그 누이들에 대해서는 자세한 것을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중에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었다는 점이다(행 1:14).
예수를 ‘배척한지라’(에스칸달리존토, ἐσκανδαλίζοντο: 4:17의 “넘어지는”의 주석을 보라.)는 예수님을 육적으로만 알고, 예수님의 신성을 몰랐던 고향 사람들의 당연한 결과를 표현한 것이다. 黑崎幸吉은 “육으로의 예수(고후 5:16)를 알고 있는 것은, 도리어 영적으로 예수의 진상을 파악하는 데 방해가 된다.”라고 하였다.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은 하나님의 영(성령)을 통해서만 알고 믿을 수 있는 것이다(마 16: 16-17, 고전 12:3. 참조: 엡 2:8). 그러므로, 어떤 관점에서 예수님을 보느냐 함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마 11:6)라고 하셨다.
예수님에 관한 것을 누구보다도 많이, 그리고 자세히 알았던 고향 사람들이 꼭 알아야 할 영적 사실, 즉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이심을 알지 못하여 배척했다는 사실은, 오늘날에도 예수님에 관해 누구보다도 많이, 그리고 자세히 알고 찬미하는 신학자들이나 교역자들이나 교인들도 얼마든지 예수님을 배척할 수 있다는 경종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그들의 생활 속에서 수없이 배척을 당하신다. 우리는 정말 예수님을 바로 알고 구주로 믿는다면, 어떻게 믿는 자들의 저런 생각과 언행이 가능할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경멸하고 배척하는 고향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에 대해, 마가는【4】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며라고 하였다.
“이 번역은 정확한 것이 못 된다. 예수께서는 예언자가 그의 고향과 친척과 가족을 제외한 어느 곳에서든지 존경을 받는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그가 말한 요지는, 예언자가 어느 곳에서든지 존경을 받을 수는 있으나 자기 고향에서는 결코 존경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W. Hendriksen).
“일종의 격언인 이 말은 유대와 그리스 문학에 병행구가 많은데”( W. L. Lane), 그 요지는 친함은 경멸을 기른다는 것이다(E. P. Gould, W. W. Wessel).
“여기서 예수께서 자신이 예언자로서 존경받을 권리를 소유한 참 예언자임을 분명히 암시하신다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한다(참조: 신 18 :15, 18, 마 21:11, 눅 24:19, 요 9:17, 행 3:22, 7:37)”(W. Hendriksen). 그리고 “여기서 제자들은 배척받고도 낙심하지 않은 점을 배워야 한다”(J. Gnilka, p. 296).
나사렛에서 예수님을 배척한 결과에 대해, 마가는【5】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라고 하였다.
마태복음 13:58에는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라는 표현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할 수 없었다는 말은 예수의 능력을 의심하게 하거나, 기적의 성립을 심리학적 전제들에 의존하게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문구는 구원 사건으로서의 기적에 대한 표상과 연결된다(위 2절 후반 참조). 기적 안에 있는 구원이 전적으로 거부되면 구원은 주어질 수 없다. 또한, 그럴 경우에 예수는 자신의 사명을 활발하게 수행할 수 없게 될 것이다”(J. Gnilka, p. 297).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 도움이 되거나, 혹은 방해가 될 수 있는 엄청난 책임이 놓여 있다. 우리는 그를 향해 문을 활짝 열 수 있거나, 혹은 그의 면전에서 문을 닫을 수 있다”(W. Barclay).
결국 마가의 요지는, 권능 곧 구원과 직결된 기적은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앙의 상태에서는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능력은 무한하나 예수님을 배척하는 불신앙의 사람들에게 억지로 은혜를 부어줄 수는 없다. 이 점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시기 때문이다(마 24:37, 눅 22:22, 행 2:23). 둘째, “믿음이 없는 곳에서의 기적 행위는 다만 인간의 죄책과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완고함의 악화로 귀결되기 때문이다”(W. L. Lane). 이 점에 있어서는 웨슬리(J. Wesley)도 비슷한 견해를 표명하였다.
고향의 불신앙의 분위기 속에서도 예외는 있었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시는 기적을 행하셨다(참조: 5:23의 주석).
예수께 대한 고향 사람들의 불신앙에서 기인된 태도가 예수님의 마음에 충격을 준 것에 대해, 마가는【6전반】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라고 하였다.
웨슬레(J. Wesley)는 “인간으로서, 신으로서는 그에게 놀라울 것이란 아무것도 없었다.”라고 하였다.
이상히 여기셨더라(에타위마젠, ἐθαύμαζεν)는 5:20의 “기이히 여기더라 ”의 주석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