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특강 : 제 33강
2007-03-06 07:39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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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신약 주석 시리즈 완간/ 난해 성구 해설/ 형통의 기도/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영문, 한글/ 설교집 17권)
진보와 보수를 망라하여 48권의 마가복음 주석서들을 대조 연구하며 집필한 필자의 \\'마가복음\\'(신약 주석 시리즈)을 매주 1회씩(주일저녁 또는 오후예배와 수요저녁예배)을 교인들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매주 1회 가르칠 분량을 올릴 계획입니다. 여기에 예화나 실화를 첨가해서 사용하시면 더 유익할 것입니다. (아쉬운 점은 여기에 난하주나 헬라어나 문장 부호 등을 제대로 표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 33 강>>
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혈루병자를 고치심<5:21-43>
<비교 : 마 9:18-26, 눅 8:40-56>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기사 속에 혈루증을 앓는 여인을 고치신 기사(5:25-34)가 끼어 있다. 두 설화에 대해서 원래 함께 속해 있던 것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고 하는 견해는, 병든 여인과의 만남에 의해 지체하게 되는 계기를 중시한다. 즉, 23절의 “죽게 되었사오니”와 35절의 “죽었나이다” 사이에 현저한 시간적 차이를 중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계기는 이 서술을 보다 적절하게 해 주는 요소이기는 하지만, 결코 구성에 있어서 꼭 필요한 요소는 아니다” (J. Gnilka, pp. 267-268). 오히려 “처음부터 서로 짜여진 이중 설화로서 성립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Pesch, Jairus, 255). 그리고 “이 두 설화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고 생각된다”(山口 昇). 두 설화의 생생한 장면 묘사로 미루어 목격자에 기초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목격자는 베드로가 아닌가 싶다(데라, 크랜필드).
a. 야이로의 간청과 예수님의 응답<5:21-24>
마가는 이 기사를 【21】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저편으로 건너 가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로 시작한다.
거라사에서 배척받으신 예수님은 다시 갈릴리 바다를 건너 서쪽의 가버나움 곧 갈릴리 선교의 본거지로 가셨다. 그 바다의 서쪽 가에 계실 때에도 매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아마 예수님의 명성이 자자했던 것 같다.
그러한 상황에서 회당장인 야이로가 등장하였다. 그에 대해서, 마가는 【22】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라고 하였다.
회당장에 대해 마가는 합성어인 아르키쉬나고곤(ἀρχισυναγώγων)으로 썼으나, 마태는 단순히“장”(아르콘, ἄρχων)으로, 누가는 “회당의 장”(아르콘 테스 쉬나고게스, ἄρχων τής συναγωγής)으로 썼다.
회당장은 유대인의 회당의 관리자 같은 직분을 가리키는 것이다. 회당에는 대개 한 사람의 회당장이 있어서 예배 및 건물을 관리하고, 때로는 재판을 포함한 기타 업무를 수행하였다. 성직자는 아니었지만, 예배 중의 성경 봉독자와 설교자를 임명하고, 공적 예배가 잘 진행되도록 돌보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러므로, “회당장은 그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었다”(W. Barclay).
회당장 중 하나란 한 사람의 회당장이라는 뜻으로도 취할 수 있고, 또 회당이 둘 이상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黑崎幸吉).
야이로(Ἰάϊρος)는 ‘그(하나님)가 깨우신다’, 혹은 ‘그(하나님)가 비추신다’라는 뜻의 이름이다. 그 이름의 주인공은 대단히 많은 재산과 권세와 지위를 가진 사람이었다(5:38-40).
그러한 그가 이렇다 할 지위도 없고, 더욱이 정통 유대교의 관점에서 볼 때, 이단자라 할 수도 있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많은 사람들의 눈앞에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렸다. 그러한 그의 행동은 예수님 앞에서의 그의 지극한 겸손과 심각한 고민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의 행동은 지위도, 위엄도, 품위도, 체면도, 친구들도 잊은 것이었다. 인생에는 주님 예수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잊어버려야 할 때가 반드시 있다. 어리석은 인간은 결국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리게 되어 있는 것들을 계속 붙잡는 바람에 주님 예수와 주님 예수로 말미암은 구원과 복을 받지 못한다. 심히 유감스러운 것은 돈을 얻거나 죄악의 낙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리는 사람은 많아도, 주님 예수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리는 사람은 매우 적다는 사실이다.
회당장 야이로의 행동의 직접적인 동기에 대해, 마가는 【23】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이라고 하였다.
야이로가 많은 사람들이 보는 데서, 그것도 회당장의 신분으로서 정말 하기 어려운 행동을 하고, 많이 간구한 것은 그 자신의 이기적 목적 때문이 아니라, 그의 어린 딸인 “죽어 가는 열 두 살 먹은 외딸”(눅 8: 42)을 어떻게든 고쳐 주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그는 병들어 죽게 된 쓸모 없는 어린 딸을, 그것도 남존여비 사상이 지배하던 시대에, 끔찍이 사랑하였다.
그러나,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시라면 죽을병이라도 고치실 수 있다고 믿었다는 점이다. 그는 예수님이시라면 죽을 병자라도 손을 얹어 능히 고쳐 주실 것으로 믿었다. 헨드릭슨(W. Hendriksen)과 웨셀(W. W. Wessel)은 회당장인 그가 가버나움ㅡ예수께서 주로 활동하셨고, 가능한 한 회당 예배에 참석하신 곳ㅡ에서 틀림없이 예수님을 보았거나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야이로의 믿음이 대단한 것이기는 하나, 말씀만 하셔도 집에 있는 하인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한 백부장(마 8:8)의 믿음만은 못하였다. 그러나, 우리 주님 예수는 믿음이 부족한 신자라 할지라도, 믿고 의지할 때에는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 칼빈(J. Calvin)은 “예수님은 적은 믿음을 외면하시지 않는다. 우리가 바라는 만큼의 충분한 믿음을 가질 정도로 훈련받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부족한 믿음이 우리로 그만두게 할 이유도 못 되고, 또한 주의 도움을 요청하지 못할 이유도 못 된다.”라고 하였다.
손을 얹으사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의 손을 얹으사는 일반적으로 치병을 위한 동작이다. 구약성경에서는 ‘축복의 전달’(창 48:14, 왕하 13:16), ‘제물인 동물을 깨끗하게 하는 것’(출 29:10, 레 1:4, 민 8:12), ‘직분 임명’(신 34:9) 등에 손을 얹었다. 신약성경에서는 ‘병 고침’(7:32, 8:23, 25, 행 6:6, 13:3) 등에 손을 얹었다.
회당장인 야이로의 간청을 들으신 예수님에 대해, 마가는 【24】이에 그와 함께 가실 쌔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명성은 높아질 대로 높아져서 어디를 가시든지 많은 무리가 따랐다. 많은 무리는 말씀을 듣기 위해, 혹은 병 고침을 받기 위해, 혹은 이적 행위를 보기 위해 예수님을 따라갔다. 너무 많아서 서로 밀치기도 하고, 서로 밀리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