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71강: 제자인 형제의 야심과 주의 대속(10:35-45) A

2012-06-20 03:44 관리자 1085
6. 제자인 형제의 야심과 주의 대속(10:35-45)

<비교: 마 20:20-28>

이 단화는 세베대의 아들들과의 대화(35-40절)와 그와 관련된 열두 제자에 대한 가르침(41-45절)으로 나뉜다. 그닐카(J. Gnilka, 하권, p. 133)는 “열두 제자에 대한 관심의 집중이 이 단화를 앞에 나온 수난 예고와 긴밀히 결부시키는데, 이것은 편집적인 개정임을 시사한다. 이 대화와 제자들에 대한 가르침은 이미 마르코 이전에 결합되었다. 이 사실은 이 단화만으로는 입증되지 않으나, 비슷한 경우들인 10:1-12과 17-27절을 통해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 단화를 통해서 마가가 의도하는 것에 대해, 웨셀(W. W. Wessel)은 “제자들이 영적으로는 아직도 얼마나 우둔한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닐카(J. Gnilka, 하권, p. 134)는 “이전의 전승사를 규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우선 세베대오의 아들들과의 대화를 살펴보자. 거의 모든 주석가들이 두 형제가 자기들의 요구에 대해 두 개의 서로 다른 대답을 들었다는 사실을 확증한다. 첫째 대답은 잔과 세례를 지시함으로써 일정한 조건을 충족시키면 그들의 소원을 이룰 수 있음을 시사하는데(38절 또는 38-39절), 둘째 대답에서 예수는 그런 소원은 하느님만이 들어주실 수 있다고 말한다(40절).”라고 하였다. 그러나 38절의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가 있는 것을 보아, 일정한 조건을 충족시키면 그들의 소원을 이룰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 따라서 예수님의 대답이 서로 상반된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

불트만(R. Bultmann)은 보다 오래 된 단화의 형태에서는 38-39절이 이차적인 사후(事後) 예언이라 하여 삭제하려고 한다.1) “브라우만(B raumann)도 비슷하게 판단하는데, 38-39절을 이차적으로 아포프테그마2) 35-37, 40절과 결합된 독립된 전승으로 간주한다.”3) 이러한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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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 Bultmann, op. cit., p. 26.
2) 주 198을 보라.
3) in J. Gnilka, 하권, p.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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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에 대해 그닐카(J. Gnilka, 하권, p. 134)는 “38-39절이 독립된 단위로서 존속할 수 없고, 올바른 의미를 지닐 수 없으므로 근거가 없다.”라고 하였다.

이 단화는 마가 이전에 사실에 근거한 두 개의 단화가 결합된 것인데, 마가가 자신의 신학적 의도, 즉 제자들의 영적 우둔과 세상적 야심을 드러내기 위해 여기에 둔 것이다.

이 단화는【35】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로 시작된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1:19의 주석을 보라.)은 전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으며(1:20), 예수님에게서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3:17). 그런 그들이 이제 엄청난 야심을 가지고 예수께 나타나서,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라고 개인적인 청탁을 하였다. 마태복음 20:20에는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어미와 두 아들이 함께 청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의 어처구니없는 뻔뻔스런 청탁은 예수님을 자신들의 욕망 충족의 수단으로 여기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 시대에도 예수님을 자신의 욕망 충족을 위해 이용하려는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山口 昇은 “처음 사랑을 잊어버리고 자기의 영예와 보상을 구하는 자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과거에 있어서의 헌신은 반드시 현재의 신앙 상태의 보증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날마다 자기를 버리는 일이 필요하다.”라고 하였다. 그의 말은 옳지만,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처음 사랑을 잊어버린 것이라고 하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엄밀히 말하면, 그 두 제자가 처음부터 예수님을 고난당할 메시아로 알고 사랑하여 좇은 것은 아니었다. 그 사실은 예수님을 좇은 이후의 그들의 계속적인 예수님께 대한 몰이해를 미루어 알 수 있다(4:10,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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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40, 5:31, 6:36-37, 8:4, 16, 17, 9:5, 10 등). 실상, 그 두 제자는―다른 제자들도 별로 다를 바 없지만―예수님만을 위해서 예수님을 좇은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영예와 보상을 위해서도 예수님을 좇은 것이었다(9:34, 38, 10:28-30).

여기서도 “마가는 9:33 이하와 마찬가지로, 누가 가장 위대하냐에 관한 논쟁을 수난 예고 다음에 놓았다. 그 의도는 분명하다. 계시의 장소인 예루살렘이 가까워짐에 따라 제자들의 몰이해가 더욱 심화된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게 된 사실을, 예수가 영광을 받을 때에 그의 오른편과 왼편의 보좌에 앉으려는 희망의 배경으로 이해한다”(J. Gnilka, 하권, pp. 136-137).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그들의 어미의 청탁을 들으신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마가는【36】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의중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철없는 청탁 내용에 대해, 마가는【37】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하였다.

주의 영광 중에서는 세상이 바뀌어 예수님이 왕의 영광스런 보좌에 앉아 만국을 다스릴 때를 가리킨다. 이것은 기독교적 의미의 십자가에 못박혀 운명하시고 부활하신 주의 재림과 관련된 내세적 왕국이 아니라, 유대교적 의미의 현세적 메시아 왕국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의 우편은 왕이 될 주님 다음가는 지위를 의미하고, 주의 좌편은 그 다음가는 지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들의 청탁은 “주의 곁에 있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높은 자리를 탐내는 것이고, 또한 충성심의 발로가 아니라 야심의 발로이다”(R. A. Cole).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아관에 있어서나, 동료들보다 더 높은 지위를 탐하는 정신에 있어서나 예수님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38절). 칼빈(J. Calvin)은 “이 기사는 인간의 허영심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 야심, 또는 어떤 다른 육적 잘못이 흔히 올바르고 경건한 열심 속에 뒤섞여져서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목표와는 다른 목표를 갖는다는 것을 가르쳐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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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라고 하였다.

그들로 하여금 그토록 세속적 야심을 갖게 한 것이 무엇일까?
첫째, 그들 자신의 영적 무지와 이기적 욕망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그들의 어미가 자식들이 그러한 지위를 얻기를 바라고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20:20-21에는 그녀가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직접 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점은 본서의 기록과 다르다. “아마 마태는 야고보와 요한의 평판이 나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의 어머니가 구한 것으로 바꾼 것 같다”(W. Barclay). 중요한 것은 누가 말했느냐가 아니라, 그들 세 사람이 같은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셋째, 두 제자는 베드로와 더불어 제자들 중에서도 핵심 요원으로 인정받고 있었다(5:37, 9:2. 마 17:1-, 26:37-. 참조: 막 14:33-)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넷째, 그들은 다른 제자들과 달리, 아버지인 세베대가 일꾼들을 고용할 정도의 유복한 계층에 속했었다는 점(1:20)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그들의 어머니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자매간으로 알려져 있다. 바로 이 친척간이라는 점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위의 요소들이 어느 정도라도 작용했겠지만, 어쨌든 그런 세속적인 야심은 전적으로 그들 스스로가 책임져야 할 문제이다.

우리가 그들을 두둔할 수 있는 한 가지는, 그래도 아직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당시의 정통파 종교 지도자들의 적개심과 극심한 핍박을 받으면서, 확실히 십자가를 향해 가는 길밖에 없는 갈릴리인 목수에게서 아직 영광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W. Barclay, W. Hendriksen).

그들의 잘못된 청탁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에 대해, 마가는【38】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라고 하였다.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는 그들의 청탁은 물론, 그러한 청탁의 배경이 된 예수님과 주의 나라에 관한 그들의 이해가 그릇된 것임을 확실하게 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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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예수님은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라고 반문하셨다.

잔은 구약성경에서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전자는 ‘은혜’ 또는 ‘복’(시 16:5, 23:5)과 ‘위로’(렘 16:7)와 ‘구원’(시 116:13)을 나타내고, 후자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인간의 고난’을 나타내고 있다(시 75:8, 사 51:17-23, 렘 25:15-28, 49:12, 51:7, 겔 23:31-34, 합 2:16, 슥 12:2). 여기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14:36, 요 1:29)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의 세례는 성례전으로서의 세례가 아니라, 물속에 빠짐으로써 겪는 고통과 죽음을 비유한 것이다(시 42:7, 124:4. 참조: 시 69:15). 예수님 자신도 구원을 위한 고난과 죽음을 세례라는 말로 표현하셨다(눅 12:50).

결국 예수님의 질문의 요지는 영광스런 지위에 대한 야심만만한 요구를 하는 두 제자에게 그들이 탐하는 것과는 정반대라 할 수 있는 고난과 죽음을 겪을 수 있느냐고 하는 것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그분을 좇는 자들의 고난과 죽음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대속적인 것이나(10:45. 참조: 마 20:28), 그분을 좇는 자들의 고난은 결코 그렇지 않다(시 49: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고난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즉,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며, 그분께 대한 충성으로 인한 고난인 것이다(참조: 13:13, 요 15:18-21, 행 9:4-5, 고후 1:5, 4:10, 갈 6:17, 빌 3:10, 골 1:24).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두 제자의 반응에 대해, 마가는【39】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라고 하였다.

예수님이 마시려는 잔의 의미를 알 리 없는 그들은 할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빅켈스테트(E. Bickersteth)는 “이 자신감과 충성심에서 나온 듯한 대답은, 실은 예수님의 잔과 세례의 의미를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라고 하나, 그렇지 않다(Cranfield,1) 이상근). 그들이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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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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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님의 질문의 취지를 올바르게 이해했다면, 그토록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대답은 영적 우둔 또는 영적 무지에서 나온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 점은 그 후에 된 일, 즉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동안에 깨어 있지 못한 것(14:27, 40)과 그 곳에서 체포되시는 예수님을 보고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도망한 것(14:50)으로 뒷받침된다.

그러나 그들이 뭐가 뭔지도 모르고 한 대답이 그대로 이뤄질 것을 예수님 외에 누가 알았겠는가! 이 점에 대해, 예수님은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라고 말씀하셨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헤롯 아그립바의 손에 의해 순교하였다(행 12:2). 그러나 요한에 대해서는 순교했다는 설과 그렇지 않다는 설이 다양하게 전해져 오므로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비교적 유력한 견해는 터틀리안(Tertullian, De Praescrhae, 36)의 것이다. 그에 의하면, 요한은 끓는 기름 속에 들어가서도 상처를 입지 않았으므로 섬에 유배되었다고 한다.1) 또, 어떤 이들은 그 섬을 밧모 섬으로 보아 요한[세베대의 아들 요한]을 계시록의 저자라고 이해하기도 하였다(山口 昇, 이상근).

아무튼, 그들은 예수님의 예고대로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순교로,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으로 생을 마치게 되었다.

계속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마가는【40】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는, 예수께서 장차 메시아 왕국에서의 영예로운 자리인 자신의 좌우편을 주거나 안 주는 것은 자신의 권한 밖의 문제임을 밝히신 것이다.

마태복음 20:23에는,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의 맨 앞에 “내 아버지께서”가 첨가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러한 자리는 이미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서 정해졌기 때문에, 자신은 그 뜻을 따를 뿐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주님 예수를 따르며 섬기는가 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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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E. Bickersteth. in J. Gnilka, 하권, p. 139, 주 17.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0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T 02-426-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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