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제60강:두 번째 수난 및 부활 예고

2012-04-05 20:56 관리자 924
5. 두 번째 수난 및 부활 예고[9:30-32]

<비교: 마 17:22-23, 눅 9:43-45>

변화산에서 내려오시는 길에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의 질문을 받으셨을 때, 예수님은 대충 자신의 고난이 있을 것을 언급하신 적이 있다(9:11-12). 그러나 격식을 갖춰 수난 및 부활에 관한 예고로는 이 부분이 두 번째 것이다.

마가는 이 기사를【30】그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쌔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로 시작한다.

그 곳을 떠나의 그 곳은 헤롯 빌립이 관할하던 빌립보 근처인 것 같다. 예수님이 갈릴리 가운데로 지나가신 것은 다시 한번 갈릴리에서 공적 사역을 수행하시고자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갈릴리에서의 그의 공적 사역은 끝이 났다”(W. W. Wessel). “9:33에 의하면, 다시 가파르나움에 들어간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가 다시 갈릴리아에서 활동했다고 할 수는 없다. 가파르나움에서 일어난 일은 제자들에 관한 것이다” (J. Gnilka, 하권, p. 75).1)

이번 여행은 예수님이 자신의 구속 사명을 완수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것이다.2)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는 “한 번 더 메시아 비밀을 강조하는 것으로”(E. Schweizer). “그가 두로와 시돈을 떠난 이래 계속된 정책이었다. 그때 이래 그는 대개 제자들만 동반한 채, 외진 곳에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다가오는 자신의 생의 위기에 대처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셨다”(W. L. Lane).

예수님이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신 것에 대해, 마가는【31】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라고 설명하였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가르치실 기회를 갖고, 특히 자신의 죽음과 부활 후에 그들이 자신과 자신의 나라에 관한 진리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사생활을 필요로 하셨다.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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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Tagawa, Miracles, 33f. 33절에 의하면 예수가 갈릴래아 활동을 다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in J. Gnilka, 하권, p. 75, 주 5).
2) W. W. Wessel, W. Barclay, J. Gnilka, 하권, p. 75, 마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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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 유지의 이유로서 제시된 것은 제자들에 대한 가르침 그 자체가 아니라 가르침의 내용이다”(J. Gnilka, 하권, p. 75).

이 두 번째 예고는 첫 번째 예고보다 더 간략하고, 또 표현에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내용은 같다(8:31의 주석을 보라). 이 두 번째 예고에는 첫 번째 예고에 있었던바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가 없는 대신에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로 되어 있다.

넘기워(파라디도타이, παραδίδοται)는 가룟 유다가 배신하여 넘겨줄 사실을 의미한다. 이 배신 배후에는 보다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즉, “누구의 손에 넘겨지는 것은 세속적‧법적 의미(행 21:11, 28:17, 렘 33:24)로도, 신학적 의미(4k\"on 21:14< LXX>, 시 105:41)로도 사용될 수 있다. 여기서는 신학적 의미로 쓰였다. 신학적 용법은 하느님의 행위를 가리킨다”(J. Gnilka, 하권, p. 75).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장차 누군가의 배신에 의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의 성취라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구절의 어법이 이사야 53:6이나 53:12(LXX)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견해(W. L. Lane)는, 거기에는 ‘누구의 손’(에 넘겨줌)이 없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

아무튼, 이 두 번째의 예언에 있어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임박한 죽음의 필연성이 아니라 오히려 확실성이다(W. L. Lane, W. Hendriksen).

제자들의 몰이해에 대해, 마가는【32】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더라라고 하였다.

제자들의 영적 몰이해와 영적 몰지각은 여전하였다. 그들이 묻기도 무서워한 이유는 여러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앞으로 당해야 할 고난을 밝히 보게 되거나, 베드로의 경우처럼 꾸중을 듣게 되거나(8:33), 엘리야에 관한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9:11)을 이해하지 못한 것을 기억했기 때문일 것이다. 복합적이겠지만, 처음 것이 제일 큰 이유일 것이다. 즉, 분명한 의미는 잘 몰라도 뭔가 불길한 사건이 다가오는 것을 예감했기 때문에 질문하기를 두려워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예수님의 고독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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