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82강 제일 큰 계명(12:28-34)

2012-09-05 21:09 관리자 1091
마. 제일 큰 계명<12:28-34>

<비교: 마 22:34-40, 눅 10:25-28>

슐(Suhl)은 마가가 이 단화의 전체 형태를 형성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으나,1) 불트만(R. Bultmann)2)과 그닐카(J. Gnilka, 하권, p. 218)는 28절 전반과 34절 후반을 마가의 편집으로 보고 있다. 그닐카(J. Gnilka, 하권, p. 218)는 “베르거(Berger)는 원래의 설화가 28-30절만을 포함했다고 생각한다. 율법 학자의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서 요청되는 것은 두 개의 계명이 아니라, 단 하나의 계명이라는 것이다. 이 두 계명은 양식사적으로 상이한 두 영역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베르거(Berger)의 견해는 예수님이 질문자에 이끌려 질문에 국한된 대답만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의도에 따라 대답하신 경우가 더 많았다는 사실을 보아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닐카(J. Gnilka, 하권, p. 218)는 “추측된 짧은 형태는 유다교적 선교의 배경에서는 그럴듯하게 보일 수 있겠지만(유일신 사상의 강조), 그리스도교적 영역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을 베르거(Berger)는 알아야 한다. 여기서 신명기 6:4-5만을 전승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 구절이 레위기 19:18과 긴밀히 결부됨으로써 특수한 것으로 된다.”라고 하였다.

공관복음서를 비교해 보면, 마태와 누가는 질문하는 서기관의 의도에 대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또한, 그 서기관이 이중 계명을 반복하지 않으므로 이 단화가 전에는 31절에서 끝났으며, 32-34절은 덧붙인 해석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3) 그러나 마태와 누가는 그의 질문 의도가 시험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으므로, 그의 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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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J. Gnilka, 하권, p. 218, 주 1.
2) R. Bultmann, op. cit., 218.
3) “Hirsch, Fru\"hgeschichte I, 135-137. Wendling, Entstehung,153. Berger, Gestetzesauslegung, 185. 후자는 본문이 두 차례 확대되었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31절이, 그 다음에는 32-24절이 첨가되었다는 것이다. 보른캄(Bornkamm, *92)은 마태오와 루가가 각기 이 마르코 본문의 독자적인 변형구를 지녔던 것으로 간주한다”(in J. Gnilka, 하권, p. 219, 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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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인 반응(32-34절)을 제거할 수밖에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게 했으면서도, 누가는 예수님의 반문에 그 질문자가 이중 계명을 인용하는 것으로 하였다.

그러므로 “예수와 율법 학자의 일치점에 핵심이 있는 이 마르코적인 단화의 통일성은 미리 주어져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J. Gnilka, 하권, p. 219).

불트만(R. Bultmann)은 “이 부분의 형태, 그리고 논쟁 대화 및 랍비적 사제 대화와의 유사성은, 이것이 팔레스틴 교회의 산물임을 보여 준다.”라고 하였다. 그닐카(J. Gnilka, 하권, p. 219)는 “양식상으로 이 단화는 가르침의 대화 또는 사제 대화이다. 이 단화는 헬레니즘적 유다 그리스도교에 기원을 둔 것이다.”라고 하였다. 슈바이쳐(E. Schweizer)는 “이야기 자체가 교회에서 발생했다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8-31절과 병행되지 않는 34절의 독특한 성격은, 예수님의 생애의 한 사건에 관한 기록이라는 것을 유리하게 한다.”라고 하였다. 이 사제 대화의 중심 내용이 신명기 6:5과 레위기 19:18의 결합이라는 점과 형태, 그리고 논쟁 대화 및 랍비적 사제 대화와의 유사성 등을 미루어 팔레스틴 교회의 산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꾸며낸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에 근거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마가는 이 기사를【28】서기관 중 한 사람이 저희의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 잘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로 시작한다.

서기관(1:22의 주석을 보라.) 중 한 사람이 사두개인들과 예수님의 변론을 들은 후, 예수께서 대답 잘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물었다.

이 질문의 동기에 대해 마태(마 22:35)와 누가(눅 10:25)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나, 마가는 선의로 이해하고 있다.1) 마가의 이해가 사실에 더 가까운 것 같다.
랍비들은 율법에는 248가지의 적극적인 계명과 365가지의 소극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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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 Schweizer, E. P. Gould, A. E. Sanner, R. Earle, W. W. Wessel, E. Bickersteth, J. Gnilka, 하권, p. 219, 黑崎幸吉, 山口 昇, 이상근, 마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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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을 합해서 모두 613가지의 계명이 있다고 하였다. 이처럼 많은 율법 조항들 중에서 큰 계명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랍비들이 토론하고 있던 중요한 문제 중 하나이었다. 그들은 다른 모든 계명들을 총괄하는 대원칙 또는 으뜸가는 계명을 찾으려고 시도하였다. 이러한 시도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힐렐(Hillel: 주전 약 40년-주후 약 10년)의 말이다. 그는 이방인으로부터 “내가 한 발로 서 있는 동안에 율법 전체를 가르쳐 줄 수 있다면 유대교로 개종하겠다.”라는 도전을 받고서, “네가 네 자신에게 행해지기를 바라지 않는 것을 네 이웃에게 행하지 말라. 이것이 전 율법이고, 나머지 율법은 그것에 대한 설명에 불과한 것이다. 가서 이것을 배우라.”라고 대답하였다.1)

아키바(Akiba)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큰 율법의 본질이다.”라고 하였고, 의인 시몬(Simon)은 “세 가지, 즉 율법과 예배와 봉사 위에 세계는 성립되었다.”2)라고 하였다.

반면에, 또 한편에서는 “모든 계명을 다 지키도록 요구하였다. 이런 배경에 비추어 볼 때, 샴마이(Shammai)가 율법을 하나의 최고의 계명으로 총괄하기를 거절한 것은 이해할 만한 것이다”(J. Gnilka, 하권, p. 219).

이 서기관은 율법에서 으뜸가는 계명을 묻지 않고, 모든 계명들 중에서 으뜸가는 계명을 묻고 있는 것이다. 즉, 그는 하나님의 뜻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한 것이다.

예수님의 대답에 대해, 마가는【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서기관들의 전통이 아니라, 기록된 율법인 신명기 6:4-5을 인용하셨다.

신명기 6:4은 쉐마(Schema)의 중심 부분을 이루는 구절인데, 이 명칭은 ‘들어라’라는 뜻을 지닌 이 구절의 첫 낱말인 쉐마에서 유래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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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조: F. C. Grant, W. W. Wessel, W. Barclay, W. L. Lane.
2) in W. Barcl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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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1) 히브리의 예전(禮典)에서는 신명기 6:4-9, 11:13-21, 민수기 15:37-41이 쉐마를 구성하고 있다.2) 쉐마의 기본적인 주제는 하나님의 유일성과 하나님과 유대 백성 사이의 계약 관계이다. 그러므로 “쉐마를 암송하면서 회당 예배를 시작하는 고대의 관습은 오늘날까지도 지켜지고 있다”(W. Hendriksen, W. Barclay).

유대인들은 쉐마의 3개 구절을 적은 양피지를 성구함 속에 넣었다. 이 성구함은 작은 가죽 상자로서 유대인이 아침 기도 때에 한 상자는 이마에, 다른 상자는 왼팔에 동여매어 율법 준수를 잊지 않는 징표로 삼았다.

또한, 유대인들은 쉐마를 옮겨 적은 양피지를 메주자(mezuzah: 금속이나 나무로 만든 원통형의 작은 상자)에 넣었다. 그리고 그 메주자를 대문과 방문에 붙여 두어 드나들 때마다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도록 하였다(참조: W. Barclay, W. Hendriksen).

예수님의 시대에는 모든 이스라엘 남자들은 아침과 저녁에 기도문이요 신앙 고백인 쉐마를 낭송해야 했으며, 그때마다 선민임을 감사한 심정으로 생각하였다.3)

“쉐마가 오늘날에도 바로 유일신론의 기초가 된다는 점은 쉽사리 이해가 된다. 그뿐 아니라, 쉐마는 하나님 한 분만이 사랑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쉐마는 하나님 자신이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과 일치되는 점이다”(W. Hendriksen).

네 마음을 다하고의 마음(카르디아스, καρδίας)은 2:6의 주석을 보라.

목숨을 다하고의 목숨(프쉬케스, ψυφχής)은 8:35의 주석을 보라.

뜻을 다하고의 뜻은 디아노이아스(διανοίας)이며 ‘사상’, ‘목적’, ‘지성’, ‘사고력’, ‘생각’, ‘기질’ 등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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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 Hendriksen, W. Barclay, W. W. Wessel, R. Earle, J. Gnilka, 하권, p. 220.
2) W. W. Wessel, W. Barclay, W. Hendriksen, 이상근.
3) J. Gnilka, 하권, p. 220, 주 9: 이 쉐마를 낭송하는 것이 하느님의 통치를 수반하는 것이라고 라삐들은 생각한다. 라우린슨(Rawlinson)은 마르코복음 12:34과의 관련성을 추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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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다하여의 힘은 이스퀴오스(ἰσχύος)이며 ‘본래적이며 본질적인 힘’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영혼의 전체적인 힘을 나타내는 심리학적 용어로 사용되었다.1)
결국 위의 표현들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목숨을 비롯한 모든 것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창조주이시며 유일하신 절대자 하나님의 사랑으로 목숨을 얻었고, 그 사랑을 힘입어 존재하는 인간은 자신의 일부분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인간의 전 존재를 쏟아 붓는 것이어야만 한다. 삶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일관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은 “······다하고······다하고 ······다하고······다하여”라고 네 번씩이나 반복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사랑의 일환으로서 자연에 대한 사랑, 일에 대한 사랑, 특히 이웃에 대한 사랑이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없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섭리의 대상인 자연과 일과 인간을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계속된 예수님의 대답에 대해서, 마가는【31】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라고 하였다.

레위기 19:18을 인용한 것으로, 십계명의 둘째 부분인 인간에 대한 계명들의 요약이다. 이 대답은 으뜸가는 계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것이므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하나의 계명으로 결합하신 것이다(31절 후반). 이러한 이해는 하나님이 무엇보다도 먼저 사랑을 받아야 하고, 그 다음에는 인간이라는 뜻(E. Bickersteth)이나,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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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 Gnilka, 하권, p. 221, 주 12: Bornkamm, * 89. Berger, Gesetzesausegung, 179. 70인역 4K\"on 23, 25. 라삐 문헌에서는 셋째 말을 재산, 재물, 돈에 관련시켰다. Billerbeck, I, 905-907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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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사랑하는 것이 사람에 대한 사랑의 유일한 안전과 영원한 기초가 된다는 뜻(A. E. Sanner)이나,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라는 뜻(마경일)이나, 이웃 사랑이란 하나님 사랑의 자연적 성장의 결과이고, 하나님 사랑의 논리적 귀결이라는 뜻(W. W. Wessel)이 아니다. 우리 존재의 모든 것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한다고 하면, 우리에게는 그 밖의 어느 누구도 어느 무엇도 사랑할 여건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위의 견해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

예수님이 두 계명을 처음으로 결합하신 것(A. E. Sanner, W. Barclay, 黑崎幸吉)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의 일환으로 이해하신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요한일서 5:2-3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되”1)라고 하였다. 또, 4:20-21에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2)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이해와 똑같지는 않지만, “예수 이전에 이 두 계명을 결합하여 가르친 이들이 있었다. 주전 100년경에 ‘12족장의 유훈’이라는 소책자가 저술되었다. 그 안에 알려지지 않은 어느 저자가 족장의 입을 빌려서 매우 훌륭한 교훈을 하고 있다. ‘주를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 가난한 자와 약한 자를 동정하라’(Issachar 5:2). ‘나는 주를 사랑하였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들을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였다’(Issachar 7:6). ‘너희 전 생애를 통하여 주를 사랑하라. 그리고 진심으로 서로 사랑하라’(Dan 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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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필자의 요한일서 5:2-3의 주석을 보라.
2) 필자의 요한일서 4:20-21의 주석을 보라.
3) 참조: W. Barclay, J. Gnilka, 하권, p. 221, W. Hendriksen, E. Schweizer. 끝의 두 학자는 교회에서 끼워 넣었을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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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이웃이라는 개념에서도 나타난다. 레위기 19:18에는 이웃을 동포와 동일시하였다. 이웃은 바로 이스라엘인이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바리새인들]은 이 말에서 다른 보통의 사람들을 제외시키려는 경향을 보였다. 그리고 쿰란 종파의 사람들은 ‘어둠의 자식들’(1QS 1:10, 9:21-22)을 제외시켰다.······유다교인들은 이 범주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이나 외국 사람들을 제외시켰다”(I. H. Marshall).}(마 22:39의 주석).

웨셀(W. W. Wessel)은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은 이웃(동포)이라는 말을 구약성경의 구절에서보다 더 좁게 해석하였다. 즉, 구약성경(레 19:34 등)에서는 함께 사는 타국인도 포함했으나, 그들은 유대인과 완전히 개종한 이방인들만 포함시켰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원수를 포함하여(마 5:43-48) 도움이 필요한 사람과 도움을 베푸는 사람 사이를 이웃 관계로 새롭게 해석하셨다(10:29-37). 그렇다고 하면, 결국 이웃이란 자신 이외의 모든 사람이라고 확대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한 것에 대해, 스탐(R. T. Stamm)은 “이웃을 자신보다 덜 사랑하면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웃을 대하는 것이며, 그리고 이웃을 자신보다 더 사랑하면 이웃으로 하여금 자신을 이웃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할 때는 자만도 거짓도 겸손도 아니라, 올바르게 자신을 평가하여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피조물이자 예수님의 구속의 대상인 우리와 같은 존재로 여겨 사랑해야만 한다.
사랑하라는 아가판(ἀγαπᾴν)이며 인간에게서 비롯되는 자연적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는 하나님의 본질적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사랑의 본질 및 속성에 관한 구체적인 주석은 저자의 고린도전서13장의 주석을 보라). 여기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와 관련된 인간의 사랑을 논해야 할 것이다.

요한일서 4:10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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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라고 사랑에 대해 간결하면서도 심오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1) 즉, 사랑이란 받을 자격이 없는 상대에게 상대의 요구대로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상대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공로나 선행의 대가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형벌이 마땅한 대가일 수밖에 없는 죄인들에게 화목제로 그 아들을 주신 것이 곧 사랑이다.

화목제로 주셨다는 말씀에서 우리는 참된 사랑이란 진리와 정의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고전 13:6)2)과, 또한 사랑은 상대의 조건과는 상관없이 스스로 분출하는 본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 놀라운 사랑은 인간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은 하나님과 인간을, 더욱이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

인간이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대상을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에 부어져야만 하는 것이다(롬 5:5, 15:30).3) 그러한 의미에서, 이 사랑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것이다(딤전 1:5).4)

믿는 사람이 수행해야 할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막 12:28-34).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요(요일 5:3), 더 나아가 전 생명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실상 이웃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시금석이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일환인 것이다(요일 4:12, 20, 21, 5:2).

모든 사람은 그 자신이 느끼고 있든지 없든지 상관없이 영적인 면에나 정신적인 면, 또는 육체적인 면에나 물질적인 면에서 결핍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 그들의 결핍을 채워 줌으로써 사랑을 실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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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필자의 요한일서 4:10의 주석을 보라.
2) 필자의 고린도전서 13:6의 주석을 보라.
3) 필자의 로마서 5:5의 주석과 15:30의 주석을 보라.
4) 필자의 디모데전서 1:5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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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있어서 명심해야 할 것은 필요한 사람에게 줄 것이 있는가 함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은사와 복을 받아야 할 이유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와 복을 주시는 목적이다.
사랑에 있어서 명심해야 할 또 한 가지 사실은 남을 사랑할 조건이 완벽하게 구비된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며, 또한 남을 사랑할 조건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가 오는 대로 현재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최대의 사랑이란 영생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하는 것이다(행 3:1-10).
하나님 또는 인간을 사랑할 때, 우리의 사랑의 행위를 자기 의나 공로로 생각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았고, 또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모든 소유와 지체 그리고 생명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사랑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은 자들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부터 실현되지 않으면 안 된다(참조: 갈 6:10).
사랑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요(마 22:40), 율법의 성취요(롬13:8), 율법의 완성이요(롬 13:10), 최고한 법이요(약 2:8), 예수님의 새 계명(요 13:34)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결합하여 대답하신 예수님은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라고 덧붙이심으로써,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구분될 뿐임을 밝히셨다. 예수님의 이 가르치심은 머지않아 그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혀 운명하심으로써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예수님의 답변에 대해 서기관은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약간 변경하며 줄여서 말하였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32】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33】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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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여는 12:14의 주석을 보라.
옳소이다는 칼로스(καλώς)이며 ‘잘하셨습니다’, ‘좋습니다’, ‘훌륭합니다’ 등을 의미한다.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는 특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독특성을 강조하고 있는 신명기 4:35에서 따온 것으로 해석상의 덧붙임이다.

33절의 지혜를 다하고는 30절의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를 대치한 것이나 전체의 의미는 다를 것이 없다. 여기의 지혜는 쉬네세오스(συνέσες)이며 ‘이해’, ‘인식’, ‘통찰력’ 등을 의미한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 곧 불로 태워서 바치는 제물(레 1:9)과 기타 제물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말한 것은, 예수님의 대답에 대한 일종의 주석이다. 이로써 성전 제의가 폐지된 것이 아니라, 현저히 상대화된 것이다. 이런 의견은 이미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에게서 나타난 교훈이다(삼상 15:22, 호 6:6, 사 1:11, 잠 21:3). 그렇기는 하나, 그 서기관의 의견은 동시대인들보다는 앞선 것이다.

米田豊은 “이 율법학자(서기관)가 이 사랑이야말로 모든 의식이라든가 희생(제물)보다 큰 것이라고 간파한 것은 당시의 많은 율법학자들과는 같지 않았고 높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 참으로 율법의 정수를 해득한 사람이었다고 해야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의 말씀의 속뜻을 깊이 깨달은 것은 아니었다. 이 점은 서기관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를 보아 알 수 있다. 이 예수님의 평가에 대해, 마가는【34】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라고 하였다.

지혜 있게는 누네코스(νουνεχώς)이며 “온전한 정신으로”(A. E. Sanner), “생각이 있으며, 그 생각을 유익하게 사용하여”(W. Hendriksen), “이해하여”(마경일), “분별력 있게”(J. Gnilka, 하권, p. 222) 등을 의미한다.

네가 ‘하나님의 나라’(1:15의 주석을 보라.)에서 멀지 않도다는, 그의 율법 이해에서 나온 말이 대견스럽기는 하나, 아직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백성은 아니라는 것이며, 따라서 그 나라 안에 서야 한다는 뜻이다. 그는 예수님의 대답이 “모세 율법 정신에 관한 랍비적 토론이 아니라, 메시아 왕국의 요구들에 대한 선언에 관련된 것”(G. Minette de Tillesse)1)임을 깊이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했다. 구원이란 구원의 진리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그 위에 반드시 회개와 믿음의 결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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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W. L. Lane.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0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T 02-426-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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