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79강 악한 농부의 비유(12:1-12)

2012-08-12 01:44 관리자 1095
나. 악한 농부의 비유<12:1-12>

<비교: 마 21:33-46, 눅 20:9-19>

이 이야기가 예수님의 것인지, 예수님의 고난에서 발생한 것을 교회에서 만든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후자가 보다 더 그럴듯하다(E. Schweizer). 불트만(R. Bultmann)은 교회의 작문이라고 하였다.1) 웨셀(W. W. Wessel)은 모울(C. F. D. Moule)의 “이 이야기가 이처럼 분명하게 당시의 무책임한 종교 지도자들을 비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예수님의 교훈 중에서 예수님 당시에 행해졌고, 나중에 변경이 되지 않은 예언인 것이 틀림없다.”라고 한 설명에 동조하고 있다. 후자의 견해가 더욱 타당성이 있기는 하나, 1절과 12절은 마가의 첨가구로 보아야 할 것이다(E. Schweizer, J. Gnilka, 하권, p. 191).

이 비유는 1세기의 유대 갈릴리의 사회적 배경, 즉 대지주와 소작농 사이의 당연한 긴장 관계를 반영하는 것이다. 최근의 제논 파피루스 문서들(Zenon papyri)과 랍비의 비유들은 예수님의 선교보다 약 280년 전에, 그리고 예수님의 선교 얼마 후에, 팔레스틴에서 이 비유와 아주 흡사한 상황이 실제로 있었음을 보여 준다.

마가는 이 이야기를【1】예수께서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즙 짜는 구유 자리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로 시작하고 있다.

비유가 복수인 파라볼라이스(παραβολαίς: 3:23의 주석을 보라.)로 되어 있으므로, 슈니빈트는 비유 형식으로 말씀하셨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하였다.2) 그러나 마태복음 21:28-22:14에 밀접하게 관련된 세 개의 비유가 제시된 것으로 보아, 그 사실을 아는 마가가 복수를 쓴 것으로 보아야 한다(W. Hendriksen). 그는 세 개의 비유 중에 하나를 기록한 것이다.

이 비유를 가리켜, 레인(W. L. Lane)은 그대로 비유라고 하는데 비해, 바클레이(W. Barclay)는 일종의 혼성체이며 비유와 풍유의 중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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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 Bultmann, op. cit., p. 226.
2) in 마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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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라고 하고, 불트만(R. Bultmann)과 웨셀(W. W. Wessel)과 산너(A. E. Sanner)와 고울드(E. P. Gould)는 풍유라고 하였다. 비유이기는 하나, 한 가지의 핵심적인 의미만을 집중적으로 드러내는 다른 비유들과 달리, 복잡할 정도로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풍유로 보는 것이 보다 더 그럴듯하다.

저희는 예수님께 힐문했던 교권자들(11:27)만1)이 아니라, 그들을 포함한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다(A. E. Sanner, W. W. Wessel). 이는 풍유에 나오는 심판을 받을 자들이 유대교의 교권자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이라는 점으로 뒷받침된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망대를 짓고의 망대는 이사야 5:1-2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산울로 두르고는 도둑이나 짐승을 막기 위해 포도원 주위에 울타리를 둘렀다는 뜻이다.

즙 짜는 구유 자리를 파고는 보통 땅속에 두 개의 구덩이를 파고 그 주변을 돌로 쌓거나, 경사진 곳을 파서 포도즙을 짤 수 있도록 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구유에서 포도즙틀을 밟는 자들이 발로 포도를 밟았다(참조: 사 63:23). 그러면 관을 통해서 포도즙이 좁고 낮은 부분인 아래쪽 구덩이로 흘러간다. 그 다음에 포도즙은 항아리에 담겨진다.

망대를 짓고의 망대는 나무나 돌로 만들었다. 보통 높이가 약 4~5m, 폭이 약 1~2m로(E. Bickersteth) 포도원을 만들 때, 모아 둔 돌들로 쌓았을 것이다. 망대지기는 망대에서 도둑과 맹수의 침입을 막고, 포도원을 보호하는 일을 하였다. 또한, 망대는 창고(W. Hendriksen)나 망대지기의 숙소(E. P. Gould, A. E. Sanner)로도 사용되었다.

이러한 묘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귀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하여 얼마나 세심한 주의와 관심을 가지고 시설을 마련하셨는가를 보여 준다”(마경일). {칼빈(J. Calvin)은 전체적으로 이스라엘의 신앙을 보호하고 돕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마 21:33의 주석). 벵겔(J. A. Bengel)은 구체적으로 산울을 이스라엘의 율법으로, 즙 짜는 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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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 Bultmann, Ib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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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예루살렘 혹은 제사 제도로, 망대를 하나님의 성전 등0으로 해석하였다. 또, 빅켈스테트(E. Bickersteth)는 산울을 유대와 이방 사이의 분리의 벽으로 볼 수 있다고도 하는데, 꼭 그런 식으로 해석해야 하는가는 의문이지만, 아무튼 흥미 있는 해석이기는 하다.

이론의 여지가 없이 분명한 것은, 포도원을 만든 주인은 하나님을,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농부는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과 같은 유대 교권자들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는 주인이 농부들에게 소출을 나누는 형식의 계약을 체결하고 떠났다는 것이다. {이상근 님은 주인과 농부가 나누는 율은 보통 반반이었다고 하였다.}(마 21:33의 주석).

타국에 간 포도원 주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마가는【2】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라고 하였다.

때가 이르매(τώ καιρῷ)에 관사가 있어 지정된 때를 의미하므로, 쌍방이 약속한 때인 수확기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주인은 마땅히 받게 되어 있는 소작료를 받기 위해 농부들에게 한 종을 보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종들은 구약의 참된 하나님의 사자들(선지자들)을 의미하고, 소출은 “물질의 십일조”(Keim)1)가 아니라, 선민으로서 마땅히 갖춰야 할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2)이다. 즉,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씀을 삶 속에 구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심부름하는 종의 요구에 대한 농부들의 태도는 너무도 어처구니없었다.

이 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마가는【3】저희가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유대 교권자들이 선지자들에게 행해 왔던 불의와 거짓과 악행과 핍박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부여받은 특권으로 하나님의 사자들을 때려서 거저 보내는 악행을 일삼았던 것이다. 黑崎幸吉은 “유대의 역사는 예언자의 박해사이다.”라고 하였다.

농부들의 악행을 안 주인의 처사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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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이상근.
2) 필자의 갈라디아서 5:6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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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4】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이라고 하였다.

주인이 보낸 종에 대한 처우가 곧 자신에 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징벌 대신에 관용으로 대하는 모습과, 회개하기는커녕 더욱 악하게 굴고, 더욱 심하게 폭행하고 모욕하는 농부들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주인이 관용하면 할수록 농부들의 악행은 그 만큼 더 심해진 것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마가는【5】또 다른 종을 보내니 저희가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혹은 때리고 혹은 죽인지라라고 하였다.

이러한 예언자들의 운명은 예레미야 7:25-26에 잘 나타나 있다. “너희 열조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었으되 부지런히 보내었으나 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여 너희 열조보다 악을 더 행하였느니라.”

많은 종들을 죽이기까지 하는 만행에도 불구하고, 주인의 관용과 인내는 절정에 이른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들에 대한 신뢰를 아직도 버리지 않고 있다. 이 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마가는【6】오히려 한 사람이 있으니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가로되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라고 하였다.

모든 종들인 선지자들의 운명을 마지막으로 장식하는 사랑하는 아들의 파견이란, 심판에 앞서 마지막으로 파견되는 주인의 사자를 의미한다. “아들은 그에 앞선 하느님의 사자들과 같은 선상에 있지만, 종말론적인 전권을 부여받은 자이다”(J. Gnilka, 하권, p. 197). 주인은 그 악한 농부들이 자기 아들만큼은 공경하리라고 기대하면서 보내려고 하는 것이다(참조: 히 1:1-2). 물론, 주인의 아들이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심부름한 주인의 아들에 대한 농부들의 반응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마가는【7】저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업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8】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어던졌느니라라고 하였다.

응징 대신에 사랑하는 아들까지 보내는 주인의 기대와, 악한 농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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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생각과 행동이 전혀 달랐다. 그들은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약속된 소출을 떼먹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포도원 전체를 송두리째 삼킬 호기회로 삼아 상속자를 죽일 음모를 꾸몄고, 결국 그를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어던졌다.

여기서 물욕에 눈먼 악한 자들의 어리석음을 볼 수 있다. 그들은 그 아들의 아버지인 주인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 사실과 그 아버지가 반드시 응징할 것이라는 점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남의 사랑과 관용을 자신의 악행을 정당시하고, 보다 더 큰 악행을 위한 조건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그만큼 더 심한 응징을 초래하는 자들이다.

특히,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이 비유의 끝에서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유의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은 질문으로 비유의 의미를 분명하게 밝히신 후에, 스스로 자신의 질문에 대답을 하신다”(W. W. Wessel). 이 점에 대해, 마가는【9】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뇨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라고 하였다.

마태복음 21:41에는 무리들이 대답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질문에 대한 대답이 뻔한 것이므로 질문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의 대답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주인의 처사는 악한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전자는 주후 70년의 예루살렘의 멸망을 가리키는 것으로, 후자는 선민의 특권이 상실되고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에게 넘겨질 것을 지시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제 “하느님의 구원 역사는 아들의 파송과 죽음으로써 가능해진,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포함되는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과 함께 계속된다”(J. Gnilka, 하권, p. 198). 이 하나님의 구원사에 대해 바울도 로마서 9:1-11:36에서 아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1)

예수께서 비유에 언급된 아들이 자신을 가리키는 것임을 더욱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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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필자의 로마서 9:1-11:36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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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하시려고 하신 말씀에 대해, 마가는【10】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11】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시편 118:22-23을 인용하신 것이다. 원래는 이민족들에 의해 짓밟히고 포로가 되고 멸시받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집의 귀중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것을 의미하였다.1) “랍비 문학에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적용되기도 하였다”(W. L. Lane, J. Gnilka, 하권, p. 199, 주, 30). 이 말씀은 후기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메시아적 문장으로 간주되었다.

모퉁이의 머릿돌(κεφαλὴν γωνίας)은 쐐기 돌(홍예의 정상 중앙 부분에 있는 돌)로도 번역되고, 머릿돌(벽과 벽 사이를 결합하고 건물을 지탱하는 돌)로도 번역된다. 여기서는 그 중요성으로 보아 후자를 취해야 한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는 예수님이 자신에게 적용하시는 것이다. 즉, 유대 교권자들과 그들의 지지자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 거부되고 살해되나 하나님의 역사로 부활하여2) 하늘에 있는 성소3)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다는 것이다(참조: 행 4:11, 엡 2:20, 벧전 2:7). 그리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을 망라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로 결합하여 교회를 이루신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주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사람들의 눈에 기이한 것이다. 바울도 이 사실을 깨닫고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롬 11:33-34)4)라고 감탄하였다.

충격적인 말씀에 대한 교권자들의 반응에 대해, 마가는【12】저희가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버려두고 가니라라고 하였다.

그 유대 교권자들은 예수님의 비유를 알아들었지만, 반성하고 회개하는 대신에, 예수님을 잡고자 하는 악의를 더욱 다졌다. 그러나 실행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찬양하는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버려두고 갔다(11:32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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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 P. Gould, W. Hendriksen, A. E. Sanner, W. Barclay, W.W. Wessel 黑崎幸吉, 마경일.
2) W. Hendriksen, E. Schweizer, W. Barclay, W. W. Wessel, J. Gnilka, 하권, p. 199, 山口 昇, 이상근.
3) E. Bickersteth, W. W. Wessel, W. Hendriksen, J. Gnilka, 하권, p. 199, 黑崎幸吉.
4) 필자의 로마서 11:33-34의 주석을 보라.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0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T 02-426-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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