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77강 말라버린 무화과나무와 믿음의 힘[11:20-25]
2012-07-31 03:3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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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 마 21:20-22>
레인(W. L. Lane)은 “이 기사의 처음 부분은 11:12-14의 저주의 결과를 이루고, 이방인 뜰에서의 상인 축출이 전망을 얻는 사건을 완성한다.”라고 하였다.
마가는 이 기사를【20】저희가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고로 시작한다.
아침은 고난주간의 셋째날인 화요일 아침을 지시하는 것이다.1)
전날까지도 잎이 무성했던 무화과나무는 예수님의 저주를 받아 뿌리로부터 완전히 말라버렸다.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뿌리가 말라버린다는 것은 완전한 파멸을 의미한다(욥 18:16, 31:12, 겔 17:9, 호 9:16).
예수님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하실 수 있는가에 대해, 웨슬리(J. Wesley)는 “만물의 창조주시요 소유자이신 이가 한마디 말로 무수한 생물을 멸망시킨다고 해서, 그리고 그것이 이 중요한 교훈을 죽지 않는 한 영혼에게 더욱 깊이 새겨주는 것뿐이라고 해서 누가 비난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사건에 대해서 그란트(F. C. Grant)는 반드시 어떤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앞(11:12-13)에서 설명한 것처럼, 믿음이 없는 종교적 형식과 위선에 얽매인 유대교인들, 특히 예루살렘의 교권자들에 대한 심판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말라버린 무화과나무를 본 베드로의 반응에 대해, 마가는【21】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라고 하였다.
본절은 본서의 주된 자료 제공자인 베드로가 전날에 예수님이 그 나무를 저주하신 일을 기억한 것이다. 이것은 이 기적의 역사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21:20에는 제자들이 다같이 말한 것으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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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 Hendriksen, R. Earle, D. W. Burdick, C. E. G. Swift, 黑崎幸吉,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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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있다. 아마도 마가는 제자들의 대표격인 베드로만 내세운 것 같다.
이러한 제자들의 말과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른 것을 보면, 아직도 그들이 예수님의 메시아적 능력을 제대로 믿지 못하고, 단지 놀라기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제자들의 반응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마가는【22】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자기에 대한 믿음의 결핍을 부드럽게 책망하는 것”(R. A. Cole)인 동시에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을 갖도록 격려하는 것이다(W. L. Lane, C. R. Erdman, 山口 昇).
하나님을 믿으라의 원문(ἔχετε πίστιν θεού)은 ‘하나님 신앙을 가져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이는 주관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일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하나님 신앙을 가지라는 것이다.······이 하나님 신앙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위대한 힘이다(마경일). 바울도 그와 비슷하게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8)1)라고 하였다.
계속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마가는【2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라고 하였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는 3:28의 주석을 보라.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는 감람산과 사해를 가리키면서 하신 말씀으로 짐작할 수 있다.2) 그러나, 어떤 장소나 시간에 매이지 않은 상징적인 진술이 문제된다. 히브리인들은 산을 큰 장애물이나 곤란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스가랴는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슥 4:7)라고 하였다.3) 유대인 학교에서는 난제를 해석하는 랍비를 ‘산을 옮기는 자’라고 불렀다.4)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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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필자의 에베소서 2:8의 주석을 보라.
2) A. E. Sanner, W. W. Wessel, W. Hendriksen, J. Gnilka, 하권, p. 182, 山口 昇.
3) W. W. Wessel, W. Barclay, R. Earle, 米田豊, 山口 昇, 이상근.
4) W. Barclay, “Lightfoot, Cranfield”(in 이상근),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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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레쉬 라키쉬가 마치 산들을 빼내는 것 같은 광경을 보았다고 하였다.1)
그러므로 “이 말씀을 성전의 산과 관련시키며, 의인들이나 천사들의 요청에 따라 일어나는 성전에 대한 심판의 예고로 이해하려는 해석2)은 받아들일 수 없다”(J. Gnilka, 하권, p. 182).
실상, 이 구절은 불가능을 비유하는 유대의 격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리 불가능한 일이라 할지라도,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라고 하시는 것이다(참조: 고전 13:2). 그닐카(J. Gnilka, 하권, p. 182)는 “개별적으로 고찰하면, 이 어구는 인간이 의지의 훈련과 자기 암시로써 불가능한 것을 자신의 힘으로 한다는 것처럼 들린다(눅 17:6, 마 17:20). [그러나] ‘하느님의 신앙’과 관련해서만 이 말씀들은 의미가 있으며, 극복할 수 없는 듯이 보이는 장애들을 극복할 수 있는 카리스마적 신앙을 인식할 수 있다.”라고 설명하였다. 또한, 레인(W. L. Lane)도 “하나님의 신뢰성에 근거한 것이지, 마음에서 의심의 가망을 버린 인간의 능력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그 본문은 어떻게 읽든지 기본적인 것은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선을 조용히 신뢰하는 것으로서의 믿음의 개념이다.”라고 설명하였다.
참된 신앙이란 인간의 의지에 의한 주도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도적인 뜻과 행위에 모든 것을 맡기고 따르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마음(카르디아, καρδία: 2:6의 주석을 보라.)에 의심치 아니하면의 의심은 디아크리테(διακριθῇ)이며, ‘분리하는 것’, ‘서로 다투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단순한 불신앙과는 다르다. 신앙과 불신앙, 신뢰와 주저 등 양단 간에서 헤매는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마음의 상태에서는 항상 상반된 두 가지가 서로 싸울 수밖에 없다.(약 1:6의 주석).
앞 구절(23절)의 믿음의 중요성에 이은 믿음과 기도의 관련성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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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W. Barclay.
2) “Rawlinson, 242f, Berger(시 45:3, 렘 51:25)”(in J. Gnilka, 하권, p. 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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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마가는【24】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라고 하였다.
무엇이든지는 인간의 죄악의 욕망이나, 어리석은 소원 등을 포함한 모든 인간의 추구에 있어서 무제한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말은 어디까지나 사랑과 지혜의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하는 것(중언법)과 직결되는 것이다. 그리고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전적 신뢰인 신앙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제한되는 것이며,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에 자기 의지를 일치시켜 실현되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기도는 받은(엘라베테, ἐλάβετε: 부정 과거 시제) 줄로 믿어도 되는 것이다. 즉, 이미 응답받았다고 믿어도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믿음의 기도대로 되게 해 주실 것이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 뜻을 좇아 확신을 가지고 구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응답 여부는 문제조차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참된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 5:6 후반)에서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기도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 받으시는 것이다”(W. Hendriksen).
끝으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대해, 마가는【25】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26】없음)라고 하였다.
이 구절은 마태복음 6:12, 14을 연상시킨다.
서서는 유대인들이 기도할 때에 취하는 일반적인 자세이었다.1)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εἴ τι ἔχετε κατά τινος)은 ‘어떤 사람과 적대 관계에 있거든’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적대 관계에 있는 사람을 용서하라 그리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라고 말씀하셨다.
허물은 파라프토마타(παραπτώματα)이며, {원래 ‘미끄러지는 것’, ‘걸려서 넘어지는 것’, ‘실수하는 것’ 등을 의미하였다. 죄란 본질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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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도의 자세에 대해서는 필자의 「목회서신」, pp. 122-123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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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정하신 삶의 영역 밖에서 고집하고 사는 것을 의미한다}(엡 1:7의 주석).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예수님이 “이미 구원 관계에 들어간 사람들”(D. W. Burdick)에게 계속되는 생활 속에서 마땅히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여 화목을 이루어야 한다고 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과의 관계는 그대로 하나님과의 관계와 직결되는 것이다. 벵겔(J. A. Bengel)은 “용서받지 못한 죄는 모든 것의 장애물이다.”라고 하였다.
기도의 필수적인 두 요소는 믿음과 용서하는 사랑의 정신이다(R. Earle, 米田豊).
A, K, X, Θ, Π 사본들에는 “만일 너희가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지 아니하시리라”가 있지만, 보다 더 권위 있는 א, B, L, W, Δ, Ψ 사본들에는 없다.1) 따라서, 마태복음 6:15의 영향을 받은 후대의 첨가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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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K. Aland, et al., ed.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0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T 02-426-3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