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74강 예루살렘 입성(11:1-11)

2012-07-07 19:25 관리자 1377
1. 예루살렘 입성[11:1-11]

<비교: 마 21:1-11, 눅 19:28-40, 요 12:1>

그닐카(J. Gnilka, 하권, p. 154)는 “두 제자를 파견하면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고한 것이라든지 타고 갈 짐승을 발견한 내용이 담긴 이야기는 14:12-16과 놀랍도록 병행을 이루고 있다. 디벨리우스1)는 11:2-7과 14:12-16 사이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본다. 즉, 입성 설화는 나귀를 발견한 내용의 전설과 연결이 잘되는 반면에 다락방 발견에 관한 전설과 최후의 만찬은 서로 긴장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11:1-10을 통일된 문체로 본다. 반면에, 쉥크(Schenk)는 11:1-11을 독립된 두 이야기가 결합된 것으로 본다. 그 중 하나는 4a‧1a‧8a‧9-10‧11절ac에 나오며, 베다니아와 결부되어 있는 묵시적-종말론적인 특징을 띤 입성 설화(Einzugs-geschichte)이며, 다른 하나는 기적적으로 발견된 어린 나귀가 중심에 있고, 벳바게와 결부되어 있으며, 15절을 포함한 나머지 입성 전설(Einzugs-legende)이다.

다음과 같은 관찰들이 11:1-11의 통일성을 반증하고, 2-7절이 확대된 것임을 말해 준다. 즉, 어린 나귀가 8-11에서는 아무 역할도 하지 않으며, 7절과 8절에서 각각 사람들과 제자들의 겉옷이 다르게 사용되고, 또한 3절과 10[9]절에서 주 칭호(Kyrios-Pra\"dikat)도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 확대된 부분은 즈가리야 9:9과 창세기 49:11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1‧8-11절의 입성 보도가 이미 메시아적 성격을 지녔으므로 나귀를 탄 평화의 왕이란 동기를 이끌어들이는 것이 적절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닐카(J. Gnilka)에 의해 소개된 견해들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지 확실한 근거를 바탕 삼아 나온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8-11절, 7절, 8절에 관한 설명은 설득력이 부족하고, 3절과 10절의 주 칭호에 관한 설명도 더 논의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오히려 내용의 자연스런 연결과 생생한 묘사를 미루어 목격자에게서 비롯된 하나의 전승으로 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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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Formgeschichte,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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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할 수 있을 것이다.

마가는 이 기사를【1】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로 시작한다.

예루살렘 입성에 관한 보도를 시작하는 세 개의 지명 중에 예루살렘이 맨 처음에 언급된다. “마르코는 고대에 통상적으로 이 도시를 나타내는 데 사용된 명칭들인 ‘예로솔루마’(Ἱεροσόλυμα)와 ‘예루살렘’(Ἱερουσαλήμ) 가운데 언제나 전자를 사용한다. 후자의 명칭이 품위 있고 신성한 느낌을 주며, (헬레니즘화 된) 전자의 명칭은 비 유다인들이 이 도시에 대해 일반적으로 사용한 세속적인 명칭이다. 마르코가 전자의 명칭을 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 까닭은 다만 3:8에서만 중립적으로 언급된 예루살렘을 예수의 적대자들의 처소이며(3:22, 7:1), 적대자들이 예수를 죽이게 될 곳(10:32, 15:41)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가 이 도시를 처음 방문하고 나서, 다시 물러 나온 것도 아무 의도 없이 되어진 일이 아니다(11:11)”(J. Gnilka, 하권, p. 157).1)

감람산은 예루살렘 성 동쪽, 기드론 시내 건너편에 있는 산으로 높이가 약 812m, 남북 약 4㎞가 되며, 예루살렘 시가를 볼 수 있는 전망이 좋은 곳이다. 이 지명은 감람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것이다.

이 감람산은 구약성경에서 기도의 장소로 여겨졌고(겔 11:23, 삼하 15:32), 특히 스가랴 14:4에 의하면, 야훼는 그 날에 이 산에 나타나실 것이며, 이 산을 동서로 갈라서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실 것이다. 즉,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이곳에 나타나는 이가 메시아라는 것이다(cf. 겔 11:23, 삼하 15:30).2)

이와 관련하여 레인(W. L. Lane)은 “구약에서 감람산은 죽은 자의 부활과 후기 기독교 시기에 속하는 메시아 도래와 결합되긴 했지만, 하나님의 영광스런 미래의 종말론적 계시의 장소로 지정된 곳이다(슥 14:1-9. cf. 겔 43:2-9).”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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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 Gnilka, 하권, p. 157, 주 9: 이 형태는 Ἱερουσαλήμ(예루살렘)이 ἱερός(히에로스: 신령한, 거룩한)와 서민적인 이름 Σόλυμοι(솔루모이)에 동화되고, 마지막 모음을 첨가함으로써 생겨났다.
2) in E. Schweiz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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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푸스(Josephus)는 애굽 출신의 어떤 메시아 참칭자에 관해 전해 주는데, 그는 예수님이 운명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자신이 감람산에 출현하겠다고 장담하고는, 감람산에서 내려와 예루살렘의 성벽을 무너뜨리려고 하였으나 총독의 군사들에 의해 쫓겨나고 말았다.1) 이런 일로 미루어 보아 메시아가 빈들에서 와서 감람산에 출현할 것이라는 기대가 당시 사람들에게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벳바게(Βηθφαγὴ: 어원은 무화과나무의 집)는 예루살렘에 가까운 마을이나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바클레이(W. Barclay)는 벳바게가 안식일에 여행할 수 있는 한계 거리인 1600m 안에 있는 마을 중의 하나라고 하였다. 달만(Dalmann)에 의하면, 이곳은 예루살렘 교외에 있는 지역, 다시 말해 성역의 경계 또는 도성의 동쪽 성벽에서 시작되는 지역이라고 한다. 할라카(라삐들의 율법 해석)는 이곳을 예루살렘에 포함시킨다.2)

베다니(Βηθανίαν)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동쪽으로 약 2755㎞ 떨어진 곳에 있었으므로 도성에서 직접 눈으로 볼 수 없었다. “이곳은 유월절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에 가득 찼을 때의 공인 숙박소의 하나이었으며”(W. Barclay), 또한,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 삼 남매가 살던 곳이기도 하다.

예루살렘에 가려면 먼저 베다니를 기나가고, 그 다음에 벳바게를 거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예루살렘이 처음에 기술되었으므로, 거기서 가까운 벳바게를 베다니보다 먼저 기술한 것이다(山口 昇, W. Hendriksen, E. Schweizer).
헨리(M. Henry)는 운명하시기 4, 5일 전에 공공연하게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예수께 대해, 예루살렘에 있는 적들의 권세와 적의를 두려워하시지 않는 용기를 보여 주시는 것이며, 또한 닥쳐올 고난에 대한 생각에 의기소침하거나 동요되시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은 의연하게 자신의 죽음의 길을 위한 준비의 일환으로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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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J. Gnilka, 하권, p. 158.
2) “Billerbeck, I, 839 이하”(in J. Gnilka, 하권, p. 157, 주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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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에게 심부름을 시키셨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2】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라고 하였다.

너희 맞은편 마을은 베다니(E. P. Gould)라기보다는 벳바게(黑崎幸吉, W. Hendriksen, W. W. Wessel)로 보는 것이 더욱 그럴듯하다.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에 대해 (1) 사전에 주인하고 협의했거나 미리 조사한 것이라는 설(J. D. Stevens), (2) 제자 중 한 사람이라는 설(Zahn),1)(3) 초자연적 지식(R. A. Cole. E. Bickersteth)이나 영적 통견(黑崎幸吉)이라는 설 등이 있다.

앞의 두 설은 마가가 언급하고 있지 않은 점을 보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는 여기서 예수님의 행동을 메시아와 관련된 구약성경의 성취임을 설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3)설을 취해야 할 것이다. 즉, 마가는 예수님이 떨어져 있는 곳의 상황을 정확히 아시는 것(마 17:27, 요 1:48, 2:4, 25)을 그의 “신성의 증거”(E. Bickersteth)로 삼고 있는 것이다.

나귀 새끼는 폴로스(πώλος)이며, 일반적으로 동물의 새끼를 의미하는 말이다. 여기서는 칠십인역이나 파피루스에서처럼, 나귀 새끼를 뜻하는 것이다(참조: 창 49:11, 삿 10:4, 12:14, 마 21:5). 이렇게 볼 때, 스가랴 9:9(히브리 성서)의 예언과도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제자에게 하신 예수님의 기이한 지시는 스가랴 9:9과 창세기 49:11에 근거해서만 올바로 이해될 수 있다.

스가랴 9:9의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의 요지는, 메시아가 평화의 왕으로서 겸손히 나귀를 타고 오신다는 것이다. 그는 병거와 말과 활을 없애고, 즉 전쟁을 종식시키고, 온 세계에 평화를 이루어 주신다(슥 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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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黑崎幸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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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9:11의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는, 모든 백성이 복종할 통치자의 홀과 지팡이를 잡을 유다 지파에 대한 야곱의 축복에 이어 말해진 것이다.1) 그닐카(J. Gnilka, 하권, p. 158)는 “여러 가지 라삐의 진술들에서-부분적으로 후대에 속한 것이라 하더라도-우리는 나귀는 메시아가 탈 짐승으로 여겨졌다는 점을 추측하게 된다: ‘꿈에 나귀를 본 사람은 메시아의 구원을 희망하라’(bBer 56b).2)”라고 하였다.

선택된 나귀 새끼는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이므로 메시아를 태우기에 아주 적합하다. 유대교와 고대 종교에서는 거룩한 목적에 사용되는 짐승은 깨끗하고 흠이 없으며 쓰인 적이 없는 것이어야 했다(민 19:2, 신 21:3, 삼상 6:7). “이것은 또한 예수께서 마리아의 태내에 잉태되어 탄생할 때까지 그녀가 처녀였다는 사실(마 1:25, 눅 1:34)과 일치하는 것이 아닌가! 예수님의 시신이 안장되어 있던 무덤 역시 전혀 사용되지 않았었다”(눅 23:53. W. Hendriksen, C. E. G. Swift, “Plummer”3)).

그러므로 “우리는 예루살렘 입성에 대해서도 전혀 우연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모든 것이 치밀하게 계획되었고, 질서정연하고, 적절했으며, 마땅히 있어야 할 당위성이 있었다”(W. Hendriksen).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오려고 할 때에 있을 수 있는 일에 대처하도록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마가는【3】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라고 하였다.

이 말씀 역시 2절의 경우와 같은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의 주가의 원어(ὁ κύριος αὐτού)는 ‘그것의 그 주’이다. 관사가 있는 점과 예수님 자신이 자신을 주라고 하셨겠는가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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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조: W. Barclay, J. Gnilka, 하권, p. 158.
2) “Kuhn, 89; O. Michel, ThWNT V. 284(그 밖의 증빙 자료)”(in J. Gnilka, 하권, p. 158, 주 16).
3) in C. E. G. Swi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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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점이 해석을 어렵게 한다.

여기의 주에 대해 (1) 하나님이라는 설(W. D. Allen),1) (2) 나귀 새끼의 주인이라는 설(Vincent Taylor, M. H. Bolkesstein),2) (3) 예수님 자신이라는 설3) 등이 있다.

(1)설은 문맥상 너무 거리가 멀다. (2)설의 근거는 ‘주’라는 칭호가 예수님을 대신하는 명칭이 아닐 뿐 아니라, 마가복음이나 마태복음, 그리고 그 밖의 어느 곳에서도 사용되지 않았고, 또한 예수님을 ‘주’로서 받아들인 것은 후기의 것으로 복음서들 가운데서 가장 나중에 쓰여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태복음 7:21-23과 마가복음 12:35-37과 고린도전서 16:22 등에도 예수님과 ‘주’를 동일시하는 표현이 나온다. 특히, ‘오, 주여 오시옵소서!’를 의미하는 마라나타(Maranatha)가 아람어로 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예수께 대해 주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은 교회에서 아직 아람어를 사용하던 아주 이른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W. Hendriksen). 또한, 초기 시대에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던 야고보를 가리켜, “주의 형제”라고 기록한 갈라디아서 1:18-19을 미루어 예수께 사용된 ‘주’라는 칭호가 후대의 발전에 따른 것이라는 이론이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많은 학자들이 지지하는 (3)설이 옳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전후 문맥상으로도 (3)설 곧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여기의 주는 일들에 대해 전권을 행사할 수 있음을 알리는 그리스도론적인 칭호일(J. Gnilka, 하권, p. 159)뿐만 아니라, 만물의 소유권자임을 나타내는 것이다(참조: 골 1:16, 엡 1:11). 빅켈스테트(E. Bickersteth)는 “그는 자신의 절대적 권위로 동물들을 가질 수도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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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W. Hendriksen.
2) 상동.
3) E. Schweizer, E. Bickersteth, “A. B. Bruce, J. Schmid, H. B. Swete, J. A. C. Van Leeuwen”(in W. Hendriksen), C. R. Erdman, A. E. Sanner, E. P. Gould, “Hahn”(in J. Gnilka, 하권, p. 159), W. Hendriksen, J. GnIlka, 하권, p. 159, 山口 昇. F. C. Grant는 초대 교회의 해석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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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자신의 섭리에 의해서 능력 있게, 그리고 점잖게 자신의 뜻을 성취하는 쪽을 택하셨다.”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일단 나귀를 사용한 다음에는 즉시 돌려준다고 예고하심으로써, 남의 소유를 부당하게 갈취했다는 비난에 대해 세심하게 배려한다.1)

한 마디로 말해, “이 사건은 예수의 권위와 그의 선견지명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W. W. Wessel, “I. H. Marshall”2)).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우리 자신과 소유의 절대 주권자요 소유권자이심을 믿는다면, 모든 일을 미리 아시고 신령한 일을 위해 우리 자신, 또는 우리의 소유를 쓰시겠다고 하실 때에 기꺼이 내드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어차피 죽을 우리 자신과 어차피 쓰여져야 할 우리의 소유가 주님에 의해 쓰여지는 것보다 더 큰 영광은 없다.

예수님의 예고대로 된 것에 대해, 마가는【4】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5】거기 섰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가로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하려느냐 하매【6】제자들이 예수의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라고 하였다.

이제까지 예수님에 관한 영적 몰이해를 드러냈던 제자들이라는 점을 미루어 보아, 아마 이번 경우에도 반신반의하며 갔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순종한 그들은 또 한 번 놀라운 결과로 예수께 대한 믿음을 더 심화시킬 수 있었다. 만일에 그 두 제자가 사람의 생각으로는 터무니없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지 않았더라면, 예수님께 대해 경외심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대개의 경우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의 이치를 깨닫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의 이치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5절의 거기 섰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은 누가복음 19:33에는 “임자들”로 되어 있다. 웨셀(W. W. Wessel)은 “사람들(임자들)은 분명히 예수님과 예수님의 권위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이나 나귀 새끼를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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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B, X, Dgr, L, B(itc), C, Θ 사본 등과 마 21:3에는 “즉시 보내리라”로 되 어 있다.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는 오역이다.
2) in W. W. Wes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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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가는 것을 막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제자들은 우려하며 갔지만, 순종하는 그들에게 방해는 없었다(참조: 창 35:5).
마가는【7】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걸쳐두매 예수께서 타시니라고 하였다.

제자들은 안장 대신에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놓음으로써 예수님의 불편을 다소라도 덜어 드리려고 하였다.1) 실상, 이러한 행동은 예수님께 대한 대단한 존경심2)과 충성심(D. W. Burdick)의 발로이다.

이 장면과 다음 장면은 이스라엘의 즉위식을 연상시킨다(왕상 1:38-40, 왕하 9:13). “군마를 타지 아니하고, 나귀를 탐은 평화의 왕의 입성으로서 가장 어울리는 광경이다”(黑崎幸吉). 이와 같이 스가랴 9:9의 예언은 완성되었다.

무리의 반응에 대해, 마가는【8】많은 사람은 자기 겉옷과 다른 이들은 밭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라고 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왕을 영접하는 행위였고(왕하 9:13),3) “유대의 승리자가 수도에 입성할 때에 보여 주는 존경심에서 비롯된 환영 인사이었다”(C. E. G. Swift, R. A. Cole).

나뭇가지(스티바다스, στιβάδας)는 ‘나뭇잎’ 또는 ‘나뭇잎이 많이 달린 가지’를 의미한다. 요한복음 12:13에만 종려나무 가지로 기록되었는데, 종려나무 가지는 승리의 상징(계 7:9)으로 역시 왕자에 대한 존경과 환영을 표시하는 것이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오랜 메시아 대망의 성취로 이해하여 열렬하게 환영하는 것에 대해, 마가는【9】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하였다.

호산나(Ὡσαννά)는 ‘제발 도우소서’, “만세”(A. E. Sanner), ‘지금 구원하소서’, ‘비노니 구원하소서’(삼하 14:4, 왕하 6:26) 등을 의미한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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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 Hendriksen, A. E. Sanner, W. W. Wessel, 山口 昇.
2) E. P. Gould, R. A. Cole. 黑崎幸吉, 이상근, 마경일.
3) C. R. Erdman, W. Barclay, J. Gnilka, 하권, p. 160, 黑崎幸吉, 山口 昇, 마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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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나. 이 말은 단순히 찬양하는 환호 소리(W. W. Wessel, 이상근)나 인사말(C. E. G. Swift, W. L. Lane)이 되어 버렸다(W. W. Wessel).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호산나라는 외침 속에는 간구와 경배, 아니면 기도와 찬양이라는 말이 더 나을는지 모르는 두 가지 요소가 결합되어 있다(W. Hendriksen).
여기서는 이어나오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가 메시아에 대한 유대적 칭호1)라는 점을 보아,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예수님 당시에는 강한 종말론적 의미를 함축했으며, 또 하나님의 마지막 개입에 대한 부름이었다”(E. Schweizer).

이 구절의 출처는 분명히 시편 118편(칠십인역 시 117편)인 것이 분명하다. 거기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기도와 찬양으로 가득하다(특히, 22-26절 전반을 보라). 그것은 본래 유월절을 노래한 연작시(시 113-118편: 초막절이나 유월절에 예전용으로 사용됨) 중의 하나인 찬미시(a hallel Psalm)이다. 특히, 이 구절에 인용된 시편 118:26은 제사장들이 축제 때에 예루살렘을 찾아오는 순례자들에게 관습적으로 사용한 종교적인 인사나 축복이었다.2) 그런데, 사람들은 이 도성에 들어가는 예수께 대해 이 말씀으로 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 말씀은 더 이상 인사나 축복의 의미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오랫동안 대망해 온 메시아 왕국을 바야흐로 건설할 메시아인 예수께 비는 찬미와 간구의 의미를 갖는다. 즉, “종말론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마 23:39. J. Gnilka, 하권, p. 161).

그러나 그들의 종말론적 의미는 십자가를 지고 대속물이 되셔야만 하는 평화의 왕이시며 사랑의 정복자이신 예수님의 메시아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여 지배하는 지상 왕국의 통치자인 왕으로서의 메시아관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더 큰 관심은 메시아성이 아니라, 메시아 왕국인 다윗 왕국의 재건이었다. 이 사실은 부활 후에 제자들이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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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 A. Cole. E. P. Gould, W. Barclay, J. D. Stevens.
2) 참조: W. Hendriksen, W. W. Wessel, A. E. Sanner, W. Barclay, 山口 昇, J. Gnilka, 하권, p.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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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행 1:6)라고 한 질문에서도 나타난다.

계속된 무리의 환호성에 대해, 마가는【10】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라고 하였다.

그들의 오해에도 불구하고, “예수와 함께 시작되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에 대한 언급이 입성의 의미를 분명히 밝혀 준다”(J. Gnilka, 하권, p. 161).

우리 조상 다윗이라는 표현은 유대교적인 것이 아니므로(J. Gnilka, 하권, p. 161, E. Schweizer, 山口 昇), 예수님이 다윗의 메시아적 자손임을 전제한 기독교적 작품으로 볼 수 있다(E. Schweizer, J. Gnilka, 하권, p. 161). 메시아에 관한 약속의 성취를 위해 예수님은 무수한 적들이 있는 예루살렘 성을 향해 평화의 왕으로 들어가시는 것이다. 그는 백성들의 정치적인 기대를 실현하기 위해 들어가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비롯한 모든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 죽는 사랑의 승리(골 2:15)를 위해 들어가시는 것이다.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에 대해 (1) ‘구원이 완성되는 지고의 영광과 축복’이라는 설(E. Bickersteth), (2)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 만세’라는 설(F. C. Grant, A. E. Sanner), (3) ‘하나님께 대한 찬미’라는 설(마경일), (4) ‘지극히 높으신 곳에 계신 이여,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설(D. W. Burdick, 黑崎幸吉, 이상근) 등이 있다.

무리의 환호성이라는 점을 보아 어느 한 견해만 취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대단한 환호성은 그리 오래 간 것 같지 않다. 슈바이처(E. Schweizer)는 “유대와 로마의 권력자들이 개입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환호성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 전에 꺼져 버린 것 같다.”라고 하였다.

상황의 변화, 즉 군중의 변덕에 개의치 않으시고 예수님이 자신의 일정대로 밀고 나가신 것에 대해, 마가는【11】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다라고 하였다.

예루살렘 성전은 주전 20년경, 헤롯 대왕에 의해 기공되었던 대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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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서, 예수님의 전도의 초기에 이미 46년을 경과했지만(요 2:20), 그때까지도 완성되지 못하였다. 화려하고 웅대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그 성전은 선민들의 신앙의 결정이 아니라 이방의 분봉왕의 정권적 야욕의 산물이었다.1)
그 성전을 맡은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심히 부패하여 형식과 위선의 대명사가 되어 있었고, 또한 예수께 대해서도 심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모습을 직접 보신 예수님은 견딜 수 없는 비분을 느끼셨으며, 따라서 성전을 숙정할 마음의 준비를 하셨을 것이다.
예수님은 때가 저물었으므로 제자들과 조용히 지내시려고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에 나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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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조: 黑崎幸吉, 이상근, 마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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