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73강 맹인 바디매오를 고치심(10:46-52)
2012-07-02 02:34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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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트만(R. Bultmann)은 맹인의 이름이 지칭되었다는 점과 이 사화가 전후 문맥에 아주 잘 연결되어 있다는 점 등을 들어 후기의 전승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그러한 점들을 목격자의 증거에 기초한 것임을 보여 주는 예들로 볼 수도 있다. 특히, 장면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그 가능성을 더욱 농후하게 해 주는 것이다. 이 단화를 목격자의 증거에 기초한 것으로 보는 학자들은 “레인, 데라, 크랜필드”,1) 山口 昇 등이다.
이 단화에 대해서는 논의가 분분하다. 이 단화는 조화시키려는 학자들에게나, 비평하려는 학자들에게나 좋은 연구거리가 되어 왔다. 문제는 마태복음이 두 사람의 맹인을 이야기하는 반면에, 본서와 누가복음은 한 사람을 언급하며, 본서는 그를 바디메오라고 부른다는 점이다. 또한, 마태복음과 본서에 의하면 그 이적이 일어난 시기가 예수님과 제자들이 여리고에서 나가고 있을 때였으나, 누가복음에 의하면 그들이 여리고 가까이 왔을 때라고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서는 헨드릭슨(W. Hendriksen)이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의 문제에 대해서는 베드로의 통역자였던 마가가 그에게서 바대매오의 이야기만을 들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견해가 있지만, 결코 문제의 해결이 될 수 없다. 그러한 견해는 그저 문제를 잠시 뒤로 미루어서 마가에게서(그리고 아마도 마가복음을 읽었을 누가에게서) 베드로에게로 그 문제를 전가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상, 이 문제는 그렇게 심각한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실제적인 모순이 없다. 그 까닭은 마가와 누가가 오직 한 사람의 맹인만이 예수님에 의해 치유되었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나머지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가 해결점을 찾지 못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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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山口 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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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할 것이다. 즉, 우리는 베드로가 마가에게 두 맹인의 이야기를 모두 했다고 가정했을 때, 어째서 마가가 유독 바디매오에 대해서만 기록하고, 다른 맹인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두 번째의 문제에 대해 지금까지 제시되어 온 해결책들 중에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여리고는 두 곳이었다.1) 즉, 예수님은 어느 한 여리고에서 나오셔서 다른 여리고로 들어가시는 중에 이적을 행하셨다는 것이다. (2) 한 맹인은 여리고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에 의해 치유되었고, 또 한 맹인은 거기서 나오시는 예수님에 의해 치유되었다. (3) 예수님은 그 곳을 통과하여 성에 들어가셨다가 그 곳에서 나오고 계셨다.
예수님은 그 성읍에서 나오시다가 삭개오를 만나 그와 함께 그 성읍으로 들어가셔서 그의 집에서 그 날 밤을 유하셨다. 위에 제안된 해결책에 따르면, 이적이 일어난 것은 예수님이 그 곳으로 다시 들어가실 때이었다. 그러므로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이 그 성읍을 떠나실 때에 그 이적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고, 누가는 그 곳에 가까이 가실 때에 일어났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 해석은 비판을 받을 소지가 있다. 첫째, 그렇게도 흡사한 기사의―예컨대 마가복음의 기사와 누가복음의 기사를 비교해 보라―여리고라는 지명이 서로 다른 곳을 의미한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둘째, 마가와 누가는 분명히 동일 인물, 즉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바디매오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점과 맹인이 치유된 때에 대해 마가는 예수께서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라고 하고, 누가는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라고 한 점을 보아 두 번째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셋째, 세 번째 주장이 전제하고 있는 것처럼, “들어갔다”는 말이 ‘다른 쪽에서 다시 들어갔다’는 의미를 지니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고 있지 않다.
그 밖에 다른 해결안들 역시 대동소이하다. 예를 들면, 이러한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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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 W. Wessel과 D. W. Burdick은 옛 여리고와 새 여리고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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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있다. 즉, 그 맹인은 예수님이 그 성읍의 동쪽으로 들어가실 때에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그 성읍에 들어가시자 줄곧 예수님을 따라다니다가 결국 예수께서 그 곳에서 나오실 때에 고침을 받았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정확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는 없다. 우리는 다만 마가의 기록이 가장 자세하고 생생하다는 사실과 그 사실로 미루어 목격자의 말을 듣고 기록한 것임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마가는 이 이야기를【46】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로 시작한다.
여리고(Ἰεριχώ)는 옛 여리고와 새 여리고로 나뉜다. 예수님 당시에 옛 여리고는 황폐되었지만, 남쪽으로 뻗어 나가는 새로운 도시가 흥왕하고 있었다. 이 새 여리고는 헤롯이 겨울 궁전을 짓고, 궁전을 중심으로 구획된 도시로 건설했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과 비옥함으로 유명하였다. 로마 총독들은 이 도시에 수비대를 배치했고, 헤롯은 경마장과 원형 경기장을 만들었다. 이 여리고는 ‘종려나무의 도시’로 불리기도 하였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동북쪽으로 약 24㎞, 요단강에서 서쪽으로 약 8㎞ 떨어졌으며, 해면보다 약 250m나 낮은 지역이다.
요단에서 여리고에 이르는 길은 평평한 지역이고, 그 반면에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은 황량한 산들이 많고, 위험하기로 악명 높은 곳이었으나 여행객이 많았다.
그 당시의 여리고는 예루살렘 다음가는 중요한 도시이었다. 지금은 리카(Richa) 혹은 에리카(Ericha)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며, 거의 사막이다.1)
그때에 예수님은 유월절을 지키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는 길이었다. 물론, 더 크고 근본적인 목적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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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조: W. Hendriksen, W. Barclay, W. W. Wessel, E. Bickersteth, W. L. Lane, J. Gnilka, 하권, p.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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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었다. 바클레이(W. Barclay)는 “훌륭한 랍비나 교사가 그와 같은 여행길에 있을 때에, 군중과 제자들과 학생들로 에워싸이는 것은 하나의 관습이었다. 그들은 걸어가면서 강연하는 것을 들었는데, 이것은 매우 일반적인 형태의 하나이었다.”라고 하였다.
유월절에는 열두 살이 넘고, 예루살렘에서 24㎞ 이내에 거주하는 유대 남자는 다 참석해야만 한다는 율법 규정이 있었으므로, 그때의 여리고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다른 때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실에 대해서 바클레이(W. Barclay)가 잘 설명하고 있다.
여리고가 하나의 특별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성전에 소속된 제사장은 2만 명이나 되었으며, 같은 수의 레위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동시에 봉사할 수 없었으므로, 26조로 나누어 돌아가면서 봉사하였다. 이 많은 사람들은 성전 일에 종사하지 않을 때에는 여리고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월절에는 그들이 모두 필요하므로 전부 임무를 맡고 있었다. 따라서, 그 날의 군중 속에는 그러한 사람들이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적의에 가득 찬, 차갑고 날카로운 눈초리로 예수님을 엿보고 있었을 것이다.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의 바디매오(Βαρτιμαίος)는 디매오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이 이야기가 먼저 아람어로 말해졌고, 그 다음에 외국어 이름의 번역을 추가하여 헬라어를 사용하는 교회에 전해졌다는 것을 지시할 수도 있다”(E. Schweizer, 山口 昇).
“바디매오라는 이름의 상징적인 해석, 즉 ‘맹인의 아들’ 또는 ‘부정한 자의 아들’에서 파생된 말이라는 주장이 이전에 가끔 제기되었으나 옳지 않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그 이름에 대한 상징적인 해석을 하지 않는다”(J. Gnilka, 하권, p. 149).
아무튼, 맹인 바디매오는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순례자들에게 구걸을 하는 거지이었다. 불행히도 그는 맹인이면서 거지라는 이중의 심각한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런 바디매오가 왁자지껄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나사렛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사실을 알고는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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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을 만나려고 하였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47】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이라고 하였다.
일반인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나사렛 예수(1:24의 주석을 보라.)라고 말하는데, 바디매오는 소문을 퉁해 알고,1) 만나고 싶어했던 예수님을 향해 놀랍게도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호칭하였다. 그는 육적으로는 맹인이며 거지이었지만, 영적으로는 영안이 열린 자요 부요한 자이었다.
“족보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메시아론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다윗의 아들이라는 호칭은 이 맥락에서 낯선 느낌을 자아낸다. 다윗 족보의 메시아에게서 기대된 것은 민족의 해방과 이스라엘 전체를 향한 구원 활동이지, 질병 치유가 아니었으므로 사람들은 이 호소를 기도의 형식을 취한 그리스도교적 표현으로 보았다.”2) 그러나 다윗의 자손에게 자비를 구하는 호소는 보다 다양한 전통을 지니고 있다(참조: 마 15:22, 17:15). 그닐카(J. Gnilka, 하권, p. 150)는 “유대교적 영역을 보면, 솔로몬 전승에서 왕에 대해 이런 호소를 한다. 다윗의 자손으로 불린 왕은 지혜와 가르치는 권위 그리고 귀신들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고 있다.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것은 이런 왕적‧메시아적 표상들에 의존한 것인데 이 부름말로서 바디매오는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다.”라고 하였다.
같은 견해를 가진 헨드릭슨(W. Hendriksen)은 더욱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알려진 바로는, 그리스도 이전 시대의 문학에서 ‘다윗의 아들’이라는 호칭이 메시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나타나는 예는 솔로몬의 시편 17:213)밖에 없다. 바디매오가 그 호칭을 메시아를 뜻하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이들이 있긴 하지만, 그가 그런 의도를 갖고 그 호칭을 사용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 이유는 마가복음 11:9, 10, 12:35-37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사역하시는 동안에는 이미 ‘다윗의 자손’과 ‘메시아’가 동의어가 되어 있었음이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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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 L. Lane, W. W. Wessel, J. Gnilka, 하권, p. 149, 이상근.
2) Hahn, Hoheitstitel, 263f를 참조하라(J. Gnilka, 하권, p. 150).
3) SBK. I, p. 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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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린아이들이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외칠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화를 냈던 사실(마 21:15, 16)을 어떻게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그가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영적 성격을 완전히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사실로 미루어 우리는 그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8:28)라고 하신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서 보통 사람들이 한 것보다 더 훌륭한 대답을 할 수 있었던 소수의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소문으로 듣고 있던 예수님을 메시아인 ‘다윗의 자손’으로 알고는 있었지만,1) 그 독특한 예수님의 메시아적 성격을 올바로 이해한 것은 아니다. 그의 이해는 오히려 유대교의 메시아관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자비를 구했다는 사실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예수님도 그를 구원받을 만한 믿음의 소유자로 인정하셨다(52절). 예수님은 메시아로서의 자신에 대한 지식이 얼마나 정확하고 많은가도 중시하시지만, 보다 더 중시하는 것은 메시아로서의 자신에 대한 인격적 신뢰와 전적 의탁이다.
여기서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 동안 ‘메시아 비밀’(1:43의 주석을 보라.)을 강조해 오신 예수님이 바디매오의 경우에는 침묵을 명하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 레인(W. L. Lane)은 예수님이 메시아적 소명을 성취하셔야만 될 예루살렘 입구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8:30과 대조하라). ‘메시아 비밀’은 새기 시작하는데,2) “이는 예수님이 메시아로서 예루살렘에 가셔서 메시아로서 운명하셔야 하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명백해져야 하기 때문이다”(W. L. L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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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 Calvin, M. Henry, J. A. Bengel, E. Bickersteth, E. P. Gould, A. E. Sanner, W. Hendriksen, E. Schweizer, W. L. Lane, 黑崎幸吉, 米田豊, 이상근, 마경일.
2) W. L. Lane, “Hunter, op. cit., p. 112”(in A. E. Sanner), A. E. Sanner, 마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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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인 거지 바디매오는 메시아로 믿고 있던 예수님을 향해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호소하였다. 이 호소는 시편에서 고통받는 자가 하나님께 직접 부르짖는 소리이다(시 4:1, 6:2, 41:4, 10, 51:1, 109:26, 123:3).
그의 호소가 의미 있는 것은 자신의 지엽적인 신체적, 또는 물질적 문제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 자비를 구했다는 점이다(비교: 행 3:1-10). 그는 무엇을 먼저 구해야 할 것인지, 또 누구에게 무엇을 구해야 할 것인지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어느 정도 영안이 열린 자요 믿음을 가진 자답게 주어진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았다. 그러나 붙잡은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기도 전에 인적 장해에 부딪치고 말았다.
구주 예수를 만나는 길, 즉 새 은혜를 얻는 길에는 반드시 장해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끈기와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꼭 해야 할 일에 있어서 장해란 포기의 이유가 되지만, 믿음이 있는 바디매오에게는 오히려 더욱 힘써야 할 이유가 되었다.
장해를 만난 소경 거지 바디매오의 태도에 대해, 마가는【48】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라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도움을 간청하는 불쌍한 소경 거지 바디매오를 도와주기는커녕, 나무라면서 그의 입을 막으려고 하였다.
그 이유에 대해 (1) 예수님과 어울려 예루살렘으로 서둘러 가는 길에 지장을 받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라는 설(W. W. Wessel, W. Hendriksen), (2) 그처럼 소리지르는 것이 예수님의 위엄과 걸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설(W. Hendriksen), (3) 예수님이 군중 앞에서 ‘다윗의 지손’으로 선포되는 것을 들으실 만한 준비가 못 됐기 때문이라는 설(W. W. Wessel, W. Hendriksen), (4) 그들의 종교 지도자들이 그 호칭을 인정하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는 설(W. Hendriksen), (5)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심을 그들이 알리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설(Davidssohn, 61),1) (6)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까지 알리고 싶어하시지 않았기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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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J. Gnilka, 하권, p.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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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라는 설(E. P. Gould), (7) 10:13과 같이 예수님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려는 제자들의 배려에 기초한 것이라는 설(山口 昇), (8) 예수님이 설교하시는 것과 무리가 예수님의 설교를 듣는 것을 방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설(E. Bickersteth, W. Barclay), (9) 동정심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설(黑崎幸吉) 등이 있다.
(5)설은 마가의 ‘메시아 비밀’에 입각한 해석인데, 여기에는 메시아 비밀이 개입되어 있지 않다. 메시아 비밀은 결코 백성이나 제자들에게서 제기되지 않는다. 따라서, (6)설도 받아들일 수 없다. (7)설은 그럴듯하나 제자들에게 국한시키는 것은 무리이다. 그 밖의 견해들은 다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동정심의 결여이다. 유대 사회에서는 불치의 신체적 불구나 가난을 하나님의 징벌 내지는 저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들은 동정이나 사랑 대신에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대체로 사람들은 남의 불행에 대해 동정이나 사랑의 기회로 삼기보다는 비난과 조롱과 우월감의 기회로 삼는 악습이 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남의 불행이 극복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무산시켜 버리기도 한다.
맹인 거지 바디매오는 많은 사람들이 윽박지르는데도 불구하고, 조금도 굴하지 않고, 도리어 더욱 심히 소리질러 말하기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함으로써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믿음의 용기와 예수님께 거는 소망이 모호하고 감상적인 것이 아니라, 필사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49】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하매라고 하였다.
언제 어디 어떤 상황에서나 사랑할 준비를 갖추신 예수께서, 맹인 거지 바디매오의 간청을 들으시고 가던 길을 멈추신 채로 저를 부르라라고 명하셨다. “예수님의 눈은 냉정한 군중에게는 쏠리지 않고, 자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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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에 애타는 소경에게 쏠리셨다”(黑崎幸吉).
맹인 거지 바디매오에 대한 예수님의 각별한 관심을 본 무리는 약간의 동정심을 나타내면서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라고 전해 주었다. 결국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핍박하는 무리를 이겼다. 무리를 짓눌러 이긴 것이 아니라, 전심전력을 다해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찾음으로써 이긴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승리이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은 우리가 그와 같이 불행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에 우리를 부르신다. 예수님이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놀라운 구주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고,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고, 고쳐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고, 영생까지 얻게 해 주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시지만, 모든 사람이 다 그 부르심에 복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맹인 거지 바디매오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50】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이라고 하였다.
웨셀(W. W. Wessel)과 로마이어1)는 맹인의 겉옷을 가리켜, 동냥을 받기 위해 땅바닥에 펴놓은 그의 옷이라고 하지만, 대다수의 학자들은 입고 있던 겉옷으로 이해하고 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가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벌떡 일어나서 거추장스런 겉옷을 내어버리고 예수님께 달려갔다는 점이다. 그의 행동은 도움을 받기 위해 예수님을 찾았으면서도, 막상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는 망설이거나 떠나는 사람들(10:17-21)이 적지 않다는 사실에 비추어 높이 평가할 만하다.
예수님과 맹인 거지 바디매오 사이에 구체적인 대화가 벌어진 것에 대해, 마가는【51】예수께서 [이에 대해 응답하여]2)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소경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하였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는 맹인 거지 바디매오의 소원을 다 아시는 예수님이 그로 하여금 직접 고백하게 하시려는 질문이다. 그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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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마경일.
2) 원문에는 부정 과거분사 ἀποκριθείς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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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하여 그의 믿음을 시험하며 공고히 하신다. 즉, 예수님은 구원해 주실 것을 믿고 간청한 바디매오가 바야흐로 구원의 손길이 임하려고 하는 순간에도 변함없이 확고히 믿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평소에 잘 믿다가도 정작 믿음이 필요한 상황에 처해서는 불신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참조: 요 11:17-40).
그러나 맹인 거지 바디매오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확실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대답하였다. 이 고백은 단순히 시력을 회복하고 싶다는 것에 국한시킬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구원을 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점은 47, 48절, 특히 52절로 뒷받침된다.
선생님이여는 라보니(ραββονί)인데, 랍비의 강조형으로 존경과 친밀감을 내포한다. 또한, ‘주’를 의미하기도 한다(마 20:23, 눅 18:41).1) 이 존칭은 예수님의 품격을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라(W. Hendriksen), 이미 예수님과의 영적 교류가 그 만큼 밀접해졌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예수님의 선언과 그 선언에 따른 치유의 기적과 구원에 대해, 마가는【52】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라고 하였다.
여기에는 예수님의 치유 기적에 아무런 행동을 하시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마태복음 20:34에는 눈을 만지셨다고 했고, 누가복음 18:42에는 “보아라”가 앞에 첨가되어 있다. 여기의 기사가 원형일 것이다.
네 믿음의 믿음(피스티스, πίστις)에 대해 홍현설 박사는 “신조나 신앙 고백 자체를 믿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인간적 행위에 대한 신뢰와 확고 또는 심리학적 의미의 내적 신념이 아니다.”2)라고 한 다음에, “새로운 창조의 주도자이시며, 세계의 화해자이시며, 정의의 근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행위를 의미한다.······하나님은 진실하시고 성실하시기 때문에 결코 인간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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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 Hendriksen과 J. Gnilka(하권, p. 151)도 같은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2) 홍현설,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서울:기독교대한감리회 총리원,1968), pp.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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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믿는바 신의 믿음직함(信實性)에 대한 우리의 신뢰, 이것이 바로 구원의 방편이 되는 신앙이다.”1)라고 하였다.
바르트(K. Barth)는 “신앙은 우리가 그 위에 서 있는 근거지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에 대한 우리의 삶, 사고, 의지 및 감정의 전체에 관계되는 것이다. 신앙은 우리가 거기에 매어 달리는 한 가닥의 끈이며, 그것으로서 우리가 영양을 받는 유일한 음식이다.”2)라고 하였다.
한 마디로 말해, 믿음 곧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행위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요(엡 2:8, 마 16:17) 성령의 은사(고전 12:9)로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인 인간의 전 인격적인 응답이다. 전 인격적인 응답이란 인간의 삶, 즉 영의 지배를 받는 이성과 의지와 감정 및 행위의 전체가 하나님께 대해 복종적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연합하며 사는 삶이다. 이러한 관계를 맺는 “믿음의 결단은 이미 인간이 태어날 때, 그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선재 은혜에 근거된 것이므로”(J. Wesley),3) 인간이 믿는 것은 인간의 공로일 수 없으며, 반면에 믿지 않는 것에 대해 책임을 면할 길이 없는 것이다.
이 믿음은 또한 우리가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거나 변화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완전한 구원을 얻기까지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방편이기도 하다(벧전 1:5).4)
여기서는 특히 예수님의 신적 사랑과 신적 능력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보아야 한다.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다시 볼 수 있게 된 사실(사 42:18을 연상시키는 사실) 이상의 것이다(J. Gnilka, 하권, p. 151). 즉, 영육의 구원을 받은 것이다(J. Calvin, “A. T. Robertson”,5) W. Hendriksen).
시편 33:9에는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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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bid., p. 30.
2) in Ibid., p. 31.
3) 박장균,“웨슬레의 恩寵論” in 神學과 宣敎(서울신학대학, 1972), p.73.
4) 필자의 베드로전서 1:5의 주석을 보라.
5) in W. Hendrik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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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라고 하였고, 시편 107:20에는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로서의 사랑의 능력이다.
이제 구원받은 바디매오는 감격하여 예수님을 길에서 좇아간다. 물론, 이것은 그가 예수님의 직제자가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아무튼,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사람들은 그의 본을 따랐다(눅 18:43).
어드만(C. R. Erdman)은 “이 이적은 우리의 마음의 눈을 열어 주시사 우리의 이웃이나 하나님의 관계에 있어서 생을 분명히 보아 그 의무와 요구와 문제가 무엇임을 알 수 있는 신령한 시각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을 상징한다.”라고 하였다.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0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T 02-426-3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