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06강 예수가 아닌 바라바를 요구한 대중(15:8-15)

2013-03-08 19:08 관리자 2329
예수가 아닌 바라바를 요구한 대중(15:8-15)

마가는 이 반란이 널리 알려진 것처럼 말하는데, 현재 우리가 가진 어떤 자료에도 이 사건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 당시에는 로마에 대한 반란이 자주 발생했기 때문에 이상할 것이 없다(W. W. Wessel, W. L. Lane).
빌라도에게 무리가 한 요구에 대해, 마가는【8】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 주기를 구한대라고 하였다.
비로소 무리가 언급된다.

나아가서는 아나바스(ἀναβὰς)이며 ‘올라가다’라는 뜻도 있다. 그래서 이 도시의 비교적 높은 지역에 있는 빌라도의 재판석 또는 거처와 관련지을 수도 있겠으나, 꼭 그럴 필요도 없고, 또 확실한 것도 아니다.

무리가 전례대로 하여 주기를 구한 것은 예수님을 재판하는 일에서 손을 떼고 싶어하는 빌라도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이었다. 그런 빌라도의 반응에 대해, 마가는【9】빌라도가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하니라고 하였다.

빌라도가 사용한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현은 물론 경멸적으로 한 것이지만(W. W. Wessel, W. Hendriksen, 이상근), 한편으로는 그들의 동정심을 기대하면서 한 것이기도 하다(“Weiss”,1) E. P. Gould).

놓아주기를 원하느냐는 단순한 물음이 아니라, 예수님을 놓아주자고 제의하는 것이다. 빌라도는 자신이 이미 무죄라고 선언한 예수님을 마치 큰 죄인이나 되는 것처럼, 특사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게다가 총독으로서의 자신의 권한인 사면권을 행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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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E. P. Gou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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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에게 넘기는 교활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역시 교활한 기회주의자인 빌라도다운 태도이었다. 그는 유대 공회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예수님이 유대 민중에게는 인기와 존경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런 제의를 한 것이었다. 그가 그런 제의를 한 이유는 유대 민중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사면하면, 자신은 무죄한 예수님에게 사형을 선고하거나 유대의 교권자들 및 추종자들의 반감을 사는 궁지에 빠지지 않고도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과 예수님을 사면하라고 요구하는 유대인들이 반목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의 반목은 그들을 통치하는 이방인 총독에게는 바람직한 현상이다.

예수님의 태도에 대해, 헨드릭슨(W. Hendriksen)은 “예수님은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불러 원수들을 파멸시키는 대신에, 이 부당한 제의에 자신을 내맡긴 사실은 예수님이 얼마나 열심히, 그리고 헌신적으로 아버지께로부터 부여받으신 일에 열중하셨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빌라도가 제의한 이유에 대해, 마가는【10】이는 저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라고 하였다.

시기는 프토논(φθόνον)이며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가 있는데,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경우의 시기는 {단순이 다른 사람의 소유를 가지고 싶어하는 정신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소유하고 있다는 그 사실을 질투하는 정신을 뜻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 물질을 탐내는 것이 아니라 빼앗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러한 질투는 대개 같은 분야, 같은 계층의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바클레이(W. Barclay)는 “시기는 훌륭한 사람을 보아도, 그 훌륭한 것을 동경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훌륭하다고 원망을 한다. 이것은 인간의 감정 중에서 가장 왜곡되고 비뚤어진 것이다.”라고 하였다.}(롬 1:29의 주석).
빌라도 총독은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공회원들이 예수님의 권세 있는 교훈(1:22)과 기사와 이적과 명성과 인기를 시기하여 자신에게 예수님을 넘겨준 줄 알았다. 또한, 꿈을 꾼 아내의 충고도 있었으므로(마 2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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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놓아주려고 제의했던 것이다.

빌라도의 제의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에 대해서, 마가는【11】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니라고 하였다.

대제사장들의 시기로 인한 살의가 얼마나 끈질기고 강력한가를 잘 보여 준다. 또한, “이것은 무리들이 재판석에 왔을 때에는 누구를 사면시켜야 할지 아직 결정되지 않았음을 전제한다”(J. Gnilka, 하권, p. 399). “그러한 무리를 대제사장들이 지진을 일으키듯 흔들었던 것이다”(Robertson, op. cit., p. 393).1) 대제사장들의 간교한 죄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들의 사주 때문에 무리의 잘못된 선택이 정당화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마경일 님은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유대인의 최대의 자랑인 성전을 모독한 자라고 선동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군중들은 예수보다도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하였을 것이다. 군중이 꿈꾸는 메시아의 이미지(image)는 예수 같은 나약한 사람이 아니요, 바라바 같은 행동파였던 것이다. 그처럼 일반 군중의 구원에 대한 욕구는 종말적인 것이 아니요, 현세적인 천박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들의 충동을 들은 군중은 바라바를 석방해 달라고 아우성치게 되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무리는 거룩하고 의로운 메시아를 버리고, 도리어 살인한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요구하였다(행 3:14). “생명의 구주를 저버리고, 생명을 빼앗은 자를 택한 것이다. 참으로 어리석고도 어이가 없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같은 선택은 우리의 생활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것이다”(이상근).

무리가 의식했는지는 모르나, 결과적으로 무리는 “법률 대신에 불법을, 평화 대신에 전쟁을, 사랑 대신에 증오와 폭력”(W. Barclay)을, 신령한 것 대신에 육적인 것을, 위의 것 대신에 아래의 것을, 영원한 구원 대신에 영원한 멸망을 택한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천국 대신에 이 세상을 택한 것이다.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그들 모두는 영적 지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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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A. E. San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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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비되었던 것이다.

이 무리에 대해 수일 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열광적으로 환영하던 무리로 보아 변덕스러운 군중 심리를 논하는 학자들1)이 있는가 하면, 그 때의 무리와 다른 무리, 즉 대제사장을 지지하거나 바라바를 석방시키고자 모인 무리로 보는 학자들2)도 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국내외 각지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와 있었으므로, 양자가 뒤섞여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아무튼, “어느 시대에 있어서나 유력한 것은 민중이지만, 또한 믿을 수 없는 것도 민중이다”(黑崎幸吉). 예수님을 보고 환호하던 민중의 입술은 며칠도 안 되어서 예수님을 멸하라는 입술로 변하였다. 야고보는 교인들에게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약 3:10-11)라고 책망하였다.

바라바를 사면하라는 무리의 요구에 대한 빌라도 총독의 반응에 대해, 마가는【12】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는 내가 어떻게 하랴라고 하였다.

빌라도 총독의 물음은 실로 조롱이었으며, 심한 해학이었다(Goodspeed).3) “그러나 그 본질에 있어서 그 물음은 사람들에게 붙어 다니는 물음이다”(A. E. Sanner). 빌라도는 예수님이 사면되어야 마땅한 것은 알았지만,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위태롭게 만들면서까지 예수님을 구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소신을 펴는 대신에, 대중에 영합해 버리는 전형적인 정치인이었다.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무리가 빌라도의 야유 섞인 물음에 대단히 성난 반응을 보인 것에 대해, 마가는【13】저희가 다시 소리지르되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수난 예고에는 언제나 단순히 죽임을 당한다고만 했는데, 여기서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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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 Schweizer, C. E. G. Swift, C. R. Erdman, W. Hendriksen, 黑崎幸吉, 山口 昇, 마경일.
2) F. C. Grant, W. Barclay, 山口 昇, 이상근.
3) in A. E. San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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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으로 ‘십자가’(15:21의 주석과 15:24의 주석을 보라.)형이라는 말이 나온다(8:31, 9:31, 10:34).

빌라도 총독은 혹시나 무리의 마음을 바꿀 수 있지 않나 싶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는 내가 어떻게 하랴”(12절)라고 물었는데, 또 무리는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라고 소리질렀다.

군중 심리란 사랑과 의와 진리를 따르기보다는 증오와 불의와 거짓을 따르는 경향이 강하다. 이러한 군중 심리를 잘 이용한 세력들, 특히 군국주의자들이나 독재자들이나 공산주의자들이나 이단자들의 궁극적 배후는 사단이다. 역사상 군중 심리에 의해 희생된 의인들이나 무고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공회원들을 비롯한 그들 모두는 그렇게 요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관한 예언에 맞아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율법 곧 구약 성경 곳곳에 오실 메시아에 관한 예언이 있지만(창 3:15, 삼하 7:12, 13, 시 72편, 시 118:22, 23, 사 7:14, 9:6, 11:1-10, 35:5, 6, 42:1-4, 53장, 60:1-3, 렘 23:6, 31:31-34, 미 4:1-5, 5:2, 7:18-20, 학 2:1-9, 슥 3:8, 6:9-13, 9:9, 10, 13:1, 말 3:1-4 등), 교권자들과 무리는 오신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저주하고 있는 것이다. 말씀을 문자로만 보고, 영적으로 보지 못하는 종교인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한때 율법 종교에 열중하여 교회를 무섭게 핍박했던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 오히려 율법 종교를 떠나 예수님의 사도로서 남은 생애를 보낼 수 있었다. 그 바울은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 3:6)1)라고 하였다.

자신의 의도와 전혀 다른, 무리의 끔찍한 요구에 당황한 빌라도의 반응과 그 무리의 끈질긴 요구에 대해, 마가는【14】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지르되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하는지라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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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필자의 고린도후서 3:6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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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는 “세 번째 말하되”(눅 23:22)라고 강조하였다.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는, 빌라도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예수님의 결백을 강조하는 말이다. 이방인인 빌라도는 세 번 발언하고(9, 12절), 몇 차례나 예수님의 무죄를 선언하면서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한 반면에, 하나님의 선민들로 자부하는 교권자들과 무리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교회사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라고 하는 그들의 우레와 같은 고함소리(Phillips)1)는 그들의 승리를 앞당기는 것 같이 느껴졌을지 모르나, 실은 그들 자신과 후손들에 대한 저주가 되리라는 것을 그들이 알 리가 없었다.

마태는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마 27:24)라고 하였다. 누가는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눅 23:23)라고 하였다.

예수님을 사면하라고 요구하도록 유도하며 시간을 끌던 빌라도가 결국 일신상의 안전을 위해서 무리에게 야합하고 만 것에 대해, 마가는【15】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주니라라고 하였다.

요한은 빌라도가 무리의 요구에 굴복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에 대해,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요 19:12)라고 기록하였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성난 소리가 함축하고 있는 바를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정치적 지위뿐만 아니라, 목숨까지도 잃게 될 것이라고 하는 위협이 담긴 소리인 것이다.

그래서 두려움에 질린 그는 약삭빠르게 무리를 만족시키기 위해 바라바를 놓아주었고, 예수님은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주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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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A. E. San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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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그는 역사의 중죄인이 된 것이다. 그는 이기적 목적 때문에 정의를 버리고, 불의를 택하는 비열한 권력자의 전형이었다.

의와 진리의 승리를 위해서는 사람들의 소리보다 하나님의 소리를 더 크게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로마의 채찍은 짧은 나무손잡이에 납이나 쇠 조각 또는 날카로운 뼈 조각 등이 달려 있는 몇 개의 긴 가죽끈이 연결되어 있었다. 대개 채찍질은 벌을 받는 자에게 옷을 벗은 채로 굽히게 한 후에 두 사람이 그 등을 양쪽에서 때리는 것이다. 채찍질을 하게 되면, 피부가 찢기거나 살점이 떨어져 나갈 뿐만 아니라 내장까지도 튀어나오게 된다. 심지어 도중에 미치거나 죽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므로 로마 시민은 채찍질에서 제외되었다(참조: 행 16:37).

채찍질을 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와 동시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라는 예언의 말씀을 심비에 새겨야 한다. 성자께서 성부의 구원의 뜻을 이루시는 길은 결단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산너(A. E. Sanner)는 “아비시니아 교회에서 빌라도가 예수를 무죄하다고 믿었다는 이유로 그를 성자의 열에 넣었다는 것은 초기 교회사의 한 재미있는 사실이다. 헬라 교회에서는 그의 아내에게 그와 비슷한 인정을 하였다. 그러나 역사의 심판은 다르다.”라고 하였다.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1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T 02-426-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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