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02강 체포되신 예수(14:32-42)
2013-02-12 02:4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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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 마 26:47-56, 눅 22:47-53, 요 18:2-11>
이 이야기는 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 제일 긴 기록은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의 것이고, 가장 간략한 기록은 누가복음의 것이다. 그리고 본서와 마태복음은 거의 내용이 같다.
“이 부분은 원래 27-31절의 계속이었고, 예수의 처음 예언인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의 성취이다”(R. Bultmann).1) 따라서, “이 이야기는 독립된 것이 아니라 겟세마네 이야기의 연장으로 파악해야 한다” (J. Gnilka, 하권, p. 352).······43-46절이 통일된 단락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견해가 대체로 일치되어 있다.2)
불트만(R. Bultmann)은 “이 보도도 입맞추는 배반자의 주제와 교회의 변호 및 교리의 여운을 주는 48절 이하의 예수의 말에 의해 전설적으로 채색되고 있다. 48절 이하의 비난은 포리들에게 맞지 않는다(클로스터만). 그 때문에 누가는 22:52에서 비난의 대상을 바꾸었다.”3)라고 하고, 고귤(Goguel)도 48절 이하의 역사성을 부인한다.4)
그닐카(J. Gnilka, 하권, p. 353)는 “48-49절에 나오는 예수의 말은 첨가문임이 확인된다. 그러나 49절 전부가 아니라 전반부만 확실한 첨가문이다.······성전에서의 가르침을 지적함으로써 ‘예루살렘 논쟁 대화들’이 수난 설화와 결부된다(참조: 12:35: ‘성전 안에서 가르치실 때’와 12:12절). 나머지 부분은 마르코 이전에 이미 확대된 것이다. 거의 일반적으로 첨가된 것으로 여겨졌던, 이름 모르는 제자의 도주도 그렇게 보아야 한다(51-52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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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 Bultmann, op. cit., pp. 337-338.
2) E. Schweizer. “Lohmeyer, 321, Schneider, 193, Pesch II. 397f는 논증할 수는 없지만, 통일성이 있는 본문이라고 생각한다”(in J. Gnilka, 하권, p. 352, 주 1).
3) R. Bultmann, op. cit., pp. 337-338.
4) in Ib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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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쉥케(Schenke)는 51절 이하를 마르코의 편집으로 간주한다.1)
마가는 이 이야기를【43】말씀하실 때에 곧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하였더라로 시작한다.
배신자 가룟 유다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이 끝나기도 전에, 열둘 중에 하나인 ‘유다’(3:19의 주석을 보라.)는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주고 돈을 받기로 한 약속(14:10-11)을 지키기 위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공회: 11:18의 주석을 보라.)에게서 파송된 무리를 이끌고 왔다. 이로써 유대의 최고 법정 기관이 예수님을 체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백성들이 두려워서 밝은 낮을 피해 밤에 체포하러 온 것이다.
무리를 가리켜 누가는 “성전의 군관들”(눅 22:52)이라고 하였고, 요한은 “군대와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요 18:3)이라고 하였다. 유대의 최고 법정 기관인 공회에서(막 14:43, 마 26:47, 요 18:3) 파견한 공회의 경비원들과 로마의 군인들이 혼성되어 온 것이다. 아마도 로마의 군대는 정치적인 이유로, 유대의 공회는 종교적인 이유로 함께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것 같다. 이 무리 중에 천부장이 있었던 것을 보면(요 18:12), 그 수가 수백 명에 달했던 것 같다.
무리는 검과 몽치, 즉 칼과 나무 몽둥이(곤봉)로 단단히 무장되어 있었다. 무장한 수백 명의 무리와 평화의 왕인 메시아의 대조란 얼마나 기막히고 우스운 장면인가!
하나님의 아들을 대적하는 배후의 교권과 정권과의 야합이란 이해하기 힘들지만, 매우 흔한 일이다.
가룟 유다는 실수가 될까 보아 그들과 짠 군호를 이행하였다. 이 사실에 대해, 마가는【44】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가라 하였는지라라고 하였다.
{입맞춤은 고대 세계의 관습이었다. 고대인들은 애정 또는 경의의 표시로 다른 사람의 손이나 가슴이나 무릎이나 발등이나 입술이나 뺨에 입을 맞추었다. 헤로도투스(Herodotus)는 입술에 입맞추는 것은 페르샤인들의 풍습이라고 하였다. 아마 그들의 풍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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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J. Gnilka, 하권, p. 353, 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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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에게 전해졌던 것 같다. 이 풍습은 또한 초대 교회에 들어와 교인들의 관습이 되었다(롬 16:16, 고전 16:20, 고후 13:12, 눅 7:45, 22:48, 벧전 5:14). 순교자 저스틴(Justine)의 글에는 초대 교인들이 모여 기도한 후에 서로 입맞춤으로 환영했다고 기록되었고, 그 외에 터틀리안(Tertullian), 크리소스톰(Chrysostom),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등의 문헌에도 그런 풍속이 기록되어 있다.}(살전 5:26의 주석).
입맞춤으로 군호를 짠 것은 유다의 가증스러움이 나타난 것이고, 또한 “그들이 잡으려고 한 것은 제자들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예수 자신이었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J. Gnilka, 하권, p. 357).
본서에만 첨가된 단단히에 대해 그닐카(J. Gnilka, 하권, p. 355)는 가룟 유다의 소심함을 엿보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초자연적 능력을 믿었으므로 체포하러 온 무리의 손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가룟 유다의 가증스런 행위에 대해, 마가는【45】이에 와서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니라고 하였다.
랍비는 9:5의 주석을 보라.
마태복음에는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마 26:50)가 첨가되었고, 누가복음에는 “네가 임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눅 22:48)가 첨가되었다. 헨드릭슨(W. Hendriksen)은 “바로 이 최후의 순간에도 예수께서는 진지하게 유다를 경고하시는 것이 분명하다.”라고 하였다.
가룟 유다에 이끌려 온 무리가 예수님에게 행동을 개시한 것에 대해, 마가는【46】저희가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이라고 하였다.
본절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요한복음 18:4-9에 기록되어 있다.1)
예수님이 체포되시는 순간에 있었던 약간의 저항에 대해서, 마가는【47】곁에 섰는 자 중에 한 사람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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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필자의 요한복음 18:4-9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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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8:10에 의하면, 예수님과 함께 있던 자 중에 한 사람, 즉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는 행동을 한 사람은 베드로이고, 그 대제사장의 종은 말고이다.
베드로는 수많은 로마 군인들과 공회의 경비원들이 있는 데서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떨어뜨리는 용기를 보여 주었다. 아마도 평소의 예수님의 메시아적 권능을 믿었거나, 방금 “내로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그들이 물러가 땅에 엎드러지는 것을 보고(요 18:6) 새삼스레 예수님의 위력을 믿었기 때문이거나, 부당한 일에 저항하는 의분의 발로일 것이다. 동기가 무엇이든 간에 그의 용감한 행동은 만찬 때에 들은 예수님의 강화(講話)에 대한 몰이해와 예수님 본위와 예수님 위주의 믿음의 행동이 아니라, 자기 본위와 자기 위주의 믿음의 행동이라는 결정적인 문제를 드러낸 것이다. 베드로의 행동은 사제지간의 정리상 정당한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주님의 뜻을 떠난 그의 의협심과 용기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 되고 말았다.
마태복음에는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 26:52)가 첨가되었고, 누가복음에는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낳게 하시더라”(눅 22:51)가 첨가되었다. 누가는 그 와중에서도 한 인간의 고통을 돌아보사 고쳐 주신 예수님의 자상한 사랑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요한만이 베드로와 말고의 이름을 밝힌 것은 그가 복음서를 쓸 때에는 가해자를 처벌할 수가 없는 때였기 때문일 것이다”(W. Hendriksen).
체포하러 온 무리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에 대해, 마가는【48】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라고 하였다.
누가복음 22:52에는 “예수께서 그를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이들이 무리 속에 숨어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검을 휘두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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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마 26:52-, 눅 22:51, 요 18:11)나 배신자인 가룟 유다(마 26:50, 눅 22:48)에게는 말씀하시지 않고, 먼저 검과 몽치를 가지고 체포하러 온 무리와 그 배후 세력인 교권자들에게 질문조의 질책을 하셨다. 이 질책은 회개와 믿음의 전 단계인 죄인이라는 자의식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계속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마가는【49】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라고 하였다.
사실상, 예수님은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기 때문에 그들은 얼마든지 예수님을 그 곳에서 체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백성들이 두려워서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예수님을 체포하지 않았었다. 그런 그들은 비열하게도 백성들이 없는 외진 곳에 계신 예수님을 어두운 시간을 택해서 체포하러 온 것이다. 이것은 그들 스스로가 예수님을 체포하는 것이 떳떳하지 못한 일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체포되시는 것은 성경을 이루려 함이다. 여기의 성경들(그라파이, γραφαί)은 이사야 53장을 비롯해서 구약성경에 기록된바 메시아의 고난과 죽음에 관한 말씀들을 가리킨다. 그닐카(J. Gnilka, 하권, p. 358)는 “성서들이란 복수형(그라파이, γραφαί)은 고전 15:3-4의 그리스도론적 신앙고백을 연상시킨다. 이로써 외적 사건의 본래적 의미가 시사된다. 기습적인 체포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이 그것을 원하셨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예수님이 체포되시는 결정적인 때에 제자들이 다 도망간 사실에 대해, 마가는【50】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라고 하였다.
그 모든 과정이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을 통해 예언된바 하나님의 뜻대로 되고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였다. 그들은 전에 예수님에게서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14:27, 마 26:31)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14:31, 마 26:35)고 장담했었다. 그러나 결과는 제자들의 장담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었다.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그 제자들 모두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비겁하게 도망한 그들에게 나중에 성령을 체험케 하여 예수님의 일을 세상에 전하는 담대한 일꾼으로 사용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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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이 도망한 일을 강조하기 위해, 마가는【51】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매【52】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라고 하였다.
이 두 구절은 본서에만 기록된 것으로 전후에 관련 없는 삽화적 사건이었다.1) 이 기사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이 기사가 여기에 삽입된 이유이고, 둘째는 이 청년이 누구인가 함이다.
첫째 문제에 대해 (1) 창세기 39:12의 내용, 즉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치기 위해 옷을 벗어버리고 도망갔던 일, 또는 “아모스 2:16의 내용, 즉 용사 중에 굳센 자는 그 날에 벌거벗고야 도망할 것이라는 말씀과 관련지어, 그 성취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는 설”(F. C. Grant, “Schenk”2)), (2) 단순히 이 광경의 목격자인 베드로의 인상에 강렬하게 남았기 때문에 기록되게 되었다는 설,3) (3) 제자들이 혼을 빼고 도망갔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 같으며, 이 도주 행위를 임박한 마지막 심판을 가리키는 사건으로 나타내려는 것으로 보인다는 설(J. Gnilka, 하권, pp. 358-359), (4) 예수님이 철저하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한 것 같다는 설4) 등이 있다.
(1)설은 지나치게 비약적인 해석이고, (2)설은 도망한 베드로가 그토록 인상 깊게 보았을 리가 없으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전후 문맥상 (3)설과 (4)설이 그럴듯하다.
둘째 문제에 대해서는 (1) 사도 요한이라는 설(Ambrose, Chrysostom),5) (2)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라는 설(Epiphanius),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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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 W. Wessel은 슥 13:7을 염두에 두신 것이라고 한다. J. Gnilka(하권, p. 358, 주 27)는 “클로스터만은 이사야 53:7을 생각한다. Hirsch, Fruhgeschichte, I, 159는 이사야 53:12을 생각한다.”라고 하였다. J. Gnilka(하권, p. 358, 주 27)는 원래는 특별한 성서 구절과의 관련성이 없다고 한 다.
2) in J. Gnilka, 하권, p. 358, 주 31.
3) in 이상근.
4) W. W. Wessel, C. R. Erdman, W. L. Lane, C. E. G. Swift.
5) in H. Alford.
6) in W. Hendrik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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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베다니의 나사로라는 설(Ellicott),1) (4) 겟세마네 동산의 주인의 아들이라는 설,2) (5) 바울이라는 설(Ewald),3) (6) 최후의 만찬을 잡수신 집의 아들이라는 설,4) (7) 본서의 저자인 마가라는 설5) 등이 있다.
이 사실은 전체의 기사와는 거의 관계없는 사건이며, 다른 복음서에는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은 점으로 보아, 마가에게만 의의가 있었던 사실로 해석해야 하므로 수많은 학자들의 견해인 (7)설을 취해야 할 것이다.
베 홑이불은 신도나(σινδόνα)라는 겉옷을 가리킨다. “이 겉옷은 대개 양모로 만들어졌는데, 이 청년은 부자들이 입는 세마포로 만든 것을 입고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부자임을 알 수 있다. 그는 대개의 남자들이 입는 키톤(χιτών)이라고 불리는 속옷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무리에게 붙잡힌 겉옷을 벗어버리고 달아날 때에 알몸 상태이었다”(W. W. Wessel). 마가는 자신의 망신스런 일을 삽입함으로써 전술한 바와 같이, 그 당시의 상황이 제자들에게 얼마나 무섭도록 급박했던가를 나타내 주는 동시에 인간의 장담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보여 준다. 결국 예수님은 자신이 말씀하신 대로 홀로 버려지셨다.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 계획은 오직 예수님만이 짊어지고 가셔야만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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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이상근.
2) 상동.
3) in W. Hendriksen.
4) in 이상근.
5) “Olshausen, Bruce, Alexander, Cranfield”(in 이상근), “Dibelius, Formgeschichte, 183, Wellhausen, J. H. Mclndoe, ‘The Young Man at the Tomb.’ ET 80(1968/69), 125는 최근에 다시 마르코를 생각한다”(in J. Gnilka, 하권, p. 358, 주 30), “Van Leeuwen, Robertson(Word Pictures, Vol. I, p. 386). 유보 조항이 있지만, 같은 견해자들: M. J. Lagrange(Evangile Selon Saint Marc, paris, pp. 376, 397). A. E. J. Rawlinson(St Mark, London, 1925, pp. 215, 216). 강력히 주장하는 자들: Th. Zahn(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 English tr. Edinburg. 1909, p. 494)”(in W. Hendriksen). W. Barclay, R. A. Cole. C. R. Erdman, R. Earle, “Hunter”(in A. E. Sanner), “Bartlet”(in J. N. Davies), C. E. G. Swift, E. Bickersteth, A. E. Sanner, J. D. Stevens, D. W. Burdick, J. N. Davies, W. L. Lane, 黑崎幸吉, 마경일, 이상근.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0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T 02-426-3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