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00강 제자들의 배신에 대한 경고(14:27-31)
2013-01-29 05:14
관리자
1728
<비교: 마 26:31-35, 눅 22:31-34, 요 13:36-38>
마가는 이 부분을【27】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로 시작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다락방에서 나와 감람산으로 가시는 도중에 하신 말씀일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신 동기는 목숨을 버릴 각오로 따르겠다고 호언장담한 베드로(요 13:36-37)와 배반할 제자들을 경고하실 필요성을 느끼신 것이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의 버리리라(스칸달리스테세스테, σκανδαλισθήσεσθε)는 4:17의 “넘어지는”의 주석을 보라.
여기서는 예수님이 체포되실 때에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는 배반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예언은 제자들이 도망함으로써 성취되었다(14:50).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는 스가랴 13:7을 자유롭게 인용하여 예고하신 것이다. “그 곳에서는 아마 목자는 왕이고, 양떼는 백성들이었을 것이다”(E. P. Gould). 그 구절은 마지막 날의 심판과 구속에 관한 내용의 일부이었다.
여기서도 “마가는 제자들의 맹목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근본적인 간격의 되풀이로 된 예로 제시함으로써 예수님의 수난의 의미와 필수성을 현저하게 한다”(E. Schweizer).
헨리(M. Henry)는 예수님의 예고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이것을 미리 아셨으나 제자들과 식탁을 같이하는 것을 환영하셨다. 그들의 죄와 실패를 미리 보셨으나 그들을 거부하시지 않았다. 우리는 나중에 죄의 길에 떨어지는 두려움 때문에 주께 오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의 위험이 크면 클수록 거룩한 법령을 양심적으로 부지런히 지킴으로써 자신을 더욱 강화시킬 필요가 있다.”
자신에게 일어날 사건의 과정을 철저하게 인식하신 예수님이, 자신의 부활 후에 다시 제자들과 만나게 될 것에 대해 말씀하신 것에 대해, 마가는【28】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 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고 하였다.
부활에 대해서는 12:18의 주석을 보라(참조: 롬 1:4의 주석).
내가 살아난 후에는 시간 규정이나,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수립되는 근거이기도 하다. 이제 갈릴리(1:14의 주석을 보라.)는 “예수께 대한 회복과 갱신의 장소로 지정된다. 거기에 흩어졌던 양들이 다시 모이게 될 것이고, 그들의 목자와 다시 결합될 것이다. 이 선언의 중요성은 예수님의 부활 후에 천사들을 통해 반복하여 강조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W. L. Lane). 그 때 거기서 제자들은 참 제자로서 다시 모이게 될 것이며, 비로소 참된 연합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다(16:7, 마 28:16).
어떤 이들은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는 말을 부활한 자가 지상의 삶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이해했는데, 그들의 이해에 의하면 부활한 자는 내림 때에, 그의 일이 완성될 갈릴리로 승리의 행진을 할 것이다. 현시(Erscheinung)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므로, 내림과 관련되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 구절을 이런 의미를 지닌 주의 말씀으로 해석했는데,1) 마르쿠젠(Marxsen)은 내림 사상을 편집사적 지평에서 받아들인다.2) 그러나 그닐카(J. Gnilka, 하권, p. 335)는 “내림 주장에 대해서는, 내림이 부활한 분의 현시와 마찬가지로 28절에서 분명히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주장해야 한다. ‘앞서 가다’(프로아게인, προάγειν)라는 말은 목자에 관한 전문 용어는 아니지만, 즈가리야 13:7의 인용구와 관련하여 목자와 양떼에 관한 상을 반영한다. 마르코복음에서는 이 말이 (제자의) 뒤따름을 시사한다(10:32). 이로써 부활절 이후에도 뒤따름이 다시 가능해질 것이며 주님에 의해 은혜롭게 (제자들의) 뒤따름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대부분의 학자들도 부활 이후의 재결합에 관한 말씀으로 이해하고 있다.3)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 W. Michaelis, Die Erscheinungen des Auferstandenen. Basel. 1944, 61-65. Jeremias, Theologie I. 271, in J. Gnilka, 하권, p. 334, 주 14.
2) in J. Gnilka, 하권, p. 334.
3) W. W. Wessel, A. E. Sanner, W. Hendriksen, J. D. Stevens, C. E. G. Swift, R. A. Cole. F. J. Dake, 山口 昇, 黑崎幸吉, 마경일, 이상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스위프트(C. E. G. Swift)는 “예수님은 죽음 너머를 바라보시지 않고는 죽음을 언급하시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어두운 겨울이 지나면 찾아올 갈릴리의 부활의 봄”(R. A. Cole)을 약속하셨다.
예수님에게서 대단히 섭섭한 예고를 들은 제자들 중 베드로가 한 장담에 대해, 마가는【29】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라고 하였다.
베드로는 예수께 대한 불타는 사랑이 있었으며(W. Barclay), 그 사랑의 순정과 열정에 비추어 볼 때, 이 말은 진실했을 것이다(이상근). 그러나 그 진실이 내일도 변함 없을지는 그 자신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의 사랑과 진실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의 강력한 항의는, 그가 27절의 예수님의 비평에 모욕을 느꼈고, 또 즉시 나온 상반된 선언을 듣지 못했음을 지시한다”(W. L. Lane).
자신만은 예외라고 큰소리치는 베드로의 태도는 “제자들이 이미 해체되기 시작했음을 시사한다. 그는 은혜에 의지하는 대신에 자신의 힘만을 의지한다”(J. Gnilka, 하권, p. 335).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가 예수님의 말씀, 즉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를 그대로 믿는 대신에 자기의 뜻을 더 신뢰하여 “말씀을 논하는 죄를 범했고”(W. Hendriksen), 그런 시험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예수님의 도움을 구하는 대신에 자신의 힘을 더 의지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자기 자신조차도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에 대한 우쭐한 심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지나치게 자신만만했으며, 자기 기만 상태에 처해 있었다(W. Hendriksen). 그는 주님의 은혜를 떠난 “인간의 나약함”(E. Bickersteth)과 변덕스러움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黑崎幸吉은 “인간의 열정과 결심처럼 믿을 수 없는 것은 없다. 베드로도 다짐은 해 보나 몇 번이고 자기의 연약함을 그대로 드러내고야 말았다.”라고 하였다.
베드로의 큰소리를 들으신 예수님의 반응에 대해, 마가는【30】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라고 하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는 3:28의 주석을 보라. 단 한 사람, 베드로만을 향한 것으로 훨씬 구체적이고 명백하다.
오늘 이 밤은 새벽이 오기 전, 즉 아주 가까운 때를 지시하신 것이다(참조: 13:35의 주석).
특히, 닭이 두 번 울기 전에에 대해, 웨셀(W. W. Wessel)은 “본서에만 있으므로 마가가 베드로에게서 직접 들은 것임이 분명하다.”라고 하였다. 크랜필드(Cranfield)는 “초대 교회는 베드로의 배신이 지닌 비열성을, 아니 그 배신에 대해 놀라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담대함을 보여 주기 위해 그런 예보를 조작할 까닭이 없었다.”1)라고 하였다.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아주 철저한 부인이요 배신을 뜻하는 것이다. 헨리(M. Henry)는 “그리스도는 베드로에게 그가 다른 어떤 제자들보다 더 나쁘게 행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버릴 것이지만, 베드로만은 그리스도를 부인할 것이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라고 하였다.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29절)라고 큰소리를 친 베드로가 결국 주님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지리라는 것이다(참조: 눅 10:15, 14:11, 18:14, 약 4:10, 벧전 5:6. E. Schweizer).
여기서 우리는 위대한 예언자로서의 예수님을 본다. 베드로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앞으로 있을 베드로의 마음의 움직임까지 알고 계셨다. 예수님의 예언은 그 죄에 대한 예방의 의미와 죄를 저지른 후에 회개를 위한 의미도 있는 것이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경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베드로는 더욱 큰소리를 쳤고, 이에 질세라 다른 제자들도 그와 같이 말한 것에 대해, 마가는【31】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라고 하였다.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의 힘있게는 에크페리스소스(ἐκπερισσως)이며 ‘극히 심하게’, ‘지극히 열정적으로, 또는 열렬하게’, ‘지극히 분명하게’ 등을 의미한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한 베드로의 큰소리는, 적어도 그때의 베드로의 진실한 마음의 표현이었을 것이다(비교: 8:32). 그러나 그 진실, 그 확신, 그 각오는 단 몇 시간도 지속되지 못하였다. 그와 같이 말한 모든 제자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를 떠난 인간의 참 모습이다. 다른 제자들을 비롯하여 “베드로는 마음속에 성령의 힘이 없는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가를 알지 못했다”(R. Earle). 그러므로 슈바이처(E. Schweizer)는 “절대적 희생을 할 준비는 충분하지 않다. 진지하게 순교의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라 할지라도, 사람은 자신이 실제로 상황에 처해 보기 전에 자신과 자신의 믿음의 힘을 판단할 때, 자신을 과대 평가하거나 과소 평가하는 기만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를 구원할 유일한 것은 예수님의 약속뿐이다(14:28).”라고 설명하고 있다.
헨리(M. Henry)도 “만일 그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셔서 당신을 부인하지 말게 하시고, 나를 이 시험에 들지 않게 해 주시고, 이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말했더라면, 막아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스스로를 신뢰하였다.”라고 비슷한 설명을 하고 있다. 바울은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라고 하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 in W. W. Wessel.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0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T 02-426-3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