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91강 인자의 재림(13:24-27)
2012-11-08 20:57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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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4-27은 하나의 단위가 되며, 종말의 때와 관계가 있는 구절이다. 이 구절은 접속사 알라(ἀλλά: ‘그러나’)에 의하여 앞의 내용과 분리된다. 즉, 앞의 구절들(13:5-23)은 예루살렘 파괴와 종말의 때를 같이 가리키고 있는 반면에, 13:24-27에서는 종말의 때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
마가는 이 부분을 “그러나”(원문의 첫머리에는 알라, ἀλλά가 있다.)【24】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로 시작한다.
“그러나”는 종말 전의 대 환난에서 갑작스럽고 충만한 구원으로 바뀌는 것을 나타낸다.
그 환난 후는 주후 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파괴 이전의 기간이 아니라, ‘종말 전의 환난 기간이 지난 후’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점은 마태복음 24:29의 “그 날 환난 후에 즉시”라는 표현으로도 뒷받침된다. 이 표현은 마지막 대 환난과 그리스도의 재림이 연속적인 사건임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종말 때에 발생할 천체의 이변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구약성경(사 13:10, 24:21, 34:4, 겔 32:7-8, 욜 2:10, 31, 3:15, 암 8:9)과 묵시문학(에티오피아 에녹서 102:2, IV Ezra 4:51 등)에 풍부하고,1) 신약성경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행 2:20, 벧후 3:10, 계 6:13-14, 8:12 등).
계속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마가는【25】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라고 하였다.
하늘에 있는 권능들(αἱ δυνάμεις αἱ ἐν τοίς οὐρανοίς)에 대해 (1) 천사들이라는 설(Zigabenus, Farrar),2) (2) 마귀들이라는 설(Meyer),3) (3) 천체라는 설4) 등이 있다. 전후 문맥상 많은 학자들의 견해인 (3)설을 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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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 J. Gnilka, 하권, p. 266. in 이상근.
2) in 이상근.
3) 상동.
4) “De Wette, A. Plummer, Bruce”(in 이상근), J. A. Bengel, J. Gnilka, 하권, p. 266, W. Hendriksen, 山口 昇. 누가복음의 주석가들: A. Plummer, S. M. Gilmour,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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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에서 이러한 현상들은 하나님의 분노의 심판이나, 야웨의 날에 수반되는 현상들이다. 이사야의 구절들을 보면, 바벨론과 에돔에 심판이 내린다. 이런 성경적 배경에 비추어 볼 때, 이 상징적인 말들은 악인들에 대한 심판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기능이 있다. 모든 천체들이 피조된 세계에 밀어닥친 혼란에 빠진다. 따라서, 마르코가 선택된 자들의 구원만을 염두에 둔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죄인들에 대한 심판의 분노는 세부적으로 서술되지 않고, 은유적으로 표현된다.1)
앞서 언급한 묘사들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 상징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를 알아내는 일은 쉽지 않다. 성경에서 반복하여 마지막 때의 우주적 소란 상태를 기록하고 있는 것을 미루어 마지막 심판을 의미하는 사실적 묘사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천체의 붕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다만 인자의 재림의 징표로서의 의미를 지닐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마가는【26】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라고 하였다.
세 복음서에 일치된 이 표현(마 24:30, 눅 21:27)도 “실제로 기대된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언어의 특수성을 주목해야 한다. 도래하는 사람의 아들[인자: 2:10의 주석을 보라.]이 예수라는 것이 마르코와 독자들에게는 분명하다”(J. Gnilka, 하권, p. 267).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의 재림을 다니엘 7:13-14을 배경 삼아 설명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재림의 모습은 신약성경 도처에 표현되어 있다(마 26:64, 행 1:11, 계 1:7).
구름을 타고는 구름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한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승용물이기도 했기 때문에(출 16:10, 19:9, 24:1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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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arrington, 280-283. Pesch, Naherwartungen, 158-166. Vo\"gtle*”(in J. Gnilka, 하권, p. 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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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9, 레 16:2, 민 11:25, 시 97:2, 사 19:1),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오신다는 것은 그가 천상적이며 신적인 존재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큰 권능의 권능(뒤나메오스, δυνάμεως)은 고전어에서는 ‘자연적 힘’을 의미하였고,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 또는 ‘속성으로서의 힘’(눅 1:17, 행 3:12, 롬 1:16, 고전 1:18), ‘능력 있는 행위’, ‘이적’(마 11:20) 등을 의미한다. 그 신적 능력은 우주를 소멸하고(벧후 3:7, 10, 12), 죽은 자들을 살리시고(요 5:29, 30, 고전 15:52), 산 사람들을 부활의 몸으로 변화시키시고(고전 15:52, 살전 4:17), 믿은 사람들을 천국으로 들어가게 하시고(마 25:34, 46, 고전 15:57), 불신자들을 지옥으로 떨어뜨리시는 일에 나타날 것이다.
큰 영광으로의 영광은 독세스(δόξης)이며, 여기서는 ‘찬란하게 빛나는 신적 영예’를 의미한다.1)
이 구절의 요지는, 재림하시는 인자 곧 그리스도께서는 초림과는 달리,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구름을 타고 신적 능력과 신적 영광으로 오신다는 것이다.
인자가 재림하시는 목적은 이상하게도 분명치 않다. 그들이 그가 오는 것을 본다는 것만이 중요하다. 분명히 제삼자적인 어법은 적대자, 악인, 그리고 죄인을 향해 말하고 있음을 추측하게 한다.2)
인자는 심판하시기 위해 오신다. 사람들이 인자를 봄으로써 심판이 행해진다고 할 수 있다. 심판자를 보기만 하면 파멸을 당한다는 생각이 이미 묵시문학에 나온다(에티오피아 에녹서 62, 3, 10). “그 날에 모든 왕들, 권세자들, 고관들, 그리고 다른 지주들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사람의 아들)가 그[자신]의 영광의 보좌에 앉은 것을 보고 알게 될 것이다.······그들의 얼굴은 수치로 가득 차고, 어둠이 그들 위에 덮일 것이다”(에티오피아 에녹서 62, 3, 10).3) “마르코의 표현 형식이 칠십인역 다니엘 7:13을 빌려온 것이라고 하더라도(마르코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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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더욱 자세한 설명은 필자의 로마서 1:23의 주석을 보라.
2) “Pesch, Naherwartungen, 166-168, Lambrecht, Redaktion, 180”(in J. Gnilka, 하권, p. 267).
3) in J. Gnilka, 하권, p. 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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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표상 영역이 앞에 인용한 에녹서의 구절에 일치한다는 것은 분명하다”(J. Gnilka, 하권, p. 267).
결론적인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마가는【27】또 그 때에 저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라고 하였다.
천사들은 1:13의 주석을 보라.
택하신 자들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예정, 즉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도록 하신 계획에 부합하여 끝까지 믿음을 지킨 자들(딤후 4:7-8)1)을 의미한다.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는 마태복음의 병행구인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와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이 표현은 신명기 4:32, 시편 19:6 등의 반영으로 전 세계를 빠짐없이 가리키는 히브리 용법이다.
사방에서는 동서남북 방위를 가리키는 말이며, ‘모든 곳에서’를 의미한다(슥 2:6, 신 30:4, 사 11:12, 겔 7:2 등).
하나님께서 세계 곳곳에 흩어졌던 하나님의 자녀들을 모으시는 일에 관한 구절들이 구약성경에 많이 있다(신 30:4, 사 11:11-16, 27:12, 13, 60:4-, 겔 39:27, 28, 미 4:1-, 슥 2:6-11). 대체로 “구약의 그런 언급들은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리라는 예언이며, 남은 자가 실제로 돌아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W. Hendriksen). 그러나 그 모든 구절들은 단지 이 구절(27절)의 가르침에 대한 예고이며 예시일 뿐이다. 이 구절의 가르침은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재림하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로 모으신다는 뜻이다(마 25:32, 고후 5:10, 살전 4:16, 17, 살후 2:1). 이 하나님의 백성들은 신령한 몸으로 부활(고전 15:42-44, 52)했거나 변화된(고전 15:51-53) 상태일 것이다.
黑崎幸吉은 “그 신체의 성질, 그 모이는 곳에 대해서는 오늘날 물질관과는 전혀 다른 물질관 위에서만이 해석할 수 있는 현상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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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필자의 디모데후서 4:7-8의 주석을 보라.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0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T 02-426-3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