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88강 대환난<13:9-13>
2012-10-18 19:22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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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넷째 징조는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핍박이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9】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너희를 회당에서 매질하겠으며 나를 인하여 너희가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저희에게 증거되려 함이라라고 하였다.
마가의 첨가문으로 여겨지는 스스로 조심하라는 “그의 전형적인 표현이며”(E. Schweizer), “제자들에게 고난과 박해를 예고하는 이 단락의 내용을 총괄한다. 때와 기한을 알아보려는 묵시문학적 호기심은 다시 거부된다. 자신이 제자임을 확증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J. Gnilka, 하권, p. 253).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의 공회(쉬네드리아, συνέδρια: 복수)는 예루살렘 대공회(산헤드린)의 축소형인 유대의 지방 법정들을 가리키는 것이며,1) “회당의 장로들로 구성되었다”(W. W. Wessel).
넘겨주겠고(파라도수신, παραδώσουσιν)는 9:31의 “넘기워”의 주석을 보라.
그 법정에서 유죄 선고를 받은 사람은 바로 회당에서 형벌을 받았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추종자들은 법정에서 심문을 받아 이단자, 혹은 배교자라는 선고를 받을 것이고, 회당(1:21의 주석을 보라.)에서 매를 맞을 것이다.
“유대 자료에는 그와 같은 징계에 관한 상세한 규정들이 수록되어 있다. 한 재판관은 신명기나 시편의 적절한 구절을 낭독했으며, 또 한 재판관은 태형의 형량을 판정했고(참조: 신 25:1-3), 또 다른 한 재판관은 매회 때리기 전에 명령을 내렸다”(W. Hendriksen).
제자들이나 추종자들은 세상의 권력자들인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서게 될 것이다. 일차적으로는, 전자가 총독들을 가리키고, 후자가 헤롯 아그립바 I세(행 12:1)와 헤롯 아그립바 II세(행 25:13, 24, 26)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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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 P. Gould, F. C. Grant, W. L. Lane, A. E. Sanner, W. Hendriksen, J. Gnilka, 하권, p. 253, 마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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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제자들과 추종자들이 핍박받는 원인에 대해 나를 인하여라고 설명하셨다. 즉,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살며, 그분의 복음을 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서 핍박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로 보면,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되는 기회이다(참조: 행 2:4, 5, 26장).
예수님이 나를 인하여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 것은 또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예수님의 제자들을 핍박하는 것은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이다(행 9:4, 5, 22:7, 8, 26:14, 15). 그러므로 예수님으로 인한 핍박을 받는 것은 구원받은 증거이며, 또한 예수님의 사랑과 힘과 위로가 가장 강하게 임하는 기회이다.
종말의 다섯째 징조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마가는【10】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레인(W. L. Lane)은 가스톤(L. Gaston)과 큄멜(W. G. Ku\"mmel)과 그래쎄르(Gra\"sser) 등은 9절과 11절 사이의 사상의 자연적 흐름에 10절이 방해가 된다는 점과 선교적 명령의 용어가 분명히 마가의 것이라는 점을 들어 10절의 진정성을 부인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근거들은 불충분하다. 이방인 선교 사상은 구약성경에 확실하게 근거하며(사 42:6, 49:6, 12, 52:10, 60:6, 시 96편), 또한 초기 바리새적 유대교에서도 발견된다.1)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기 민족만이 구원받은 선민이고, 이방인은 멸망의 족속들이라는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따라서 이방 선교는 어디까지나 유대교로 개종케 하는 것이었다.
그와 달리, 예수님은 자신의 선교를 이스라엘에 국한하신 동안에도 한 이방인의 믿음에 주저하시지 않고 응답하셨고, 자신이 그렇게 국한하여 일하신 것의 잠정적인 성격에 대한 인식을 보여 주셨다(7:27. D. Bosch, G. D. Kilpatrick).2) 예수님은 유대교나 율법이 아니라,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이라고 예언하셨고, 그런 다음에야 종말이 올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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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 Bosch, Die Heidenmission in der Zukunftschau Jesu(Zu\"rich, 1959), pp. 17ff, in W. L. Lane.
2) in W. L. L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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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10절의 진정성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복음서 전승에 있어서의 독립된 로기온(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간주하는 것이 적절하다”(W. L. Lane).
복음은 1:1의 주석을 보라.
먼저는 ‘예루살렘 멸망 전’이 아니라, ‘종말이 오기 전’이라는 뜻이다.
만국에(πάντα τὰ ἔθνη)의 정확한 번역은 ‘모든 이방인에게’이다.
되어야 할 것이니라는 비인칭 동사인 데이(δεί: ‘해야 한다’)이며, 하나님의 뜻을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종말이 오기 전에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되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다. 이 세계 선교는 마가에게는 기본적으로 중요한 것이다(4:32, 11:17, 15:39 등).
헨드릭슨(W. Hendriksen)은 “복음이 온 세상에 선포되는 것은 신적인 필연이다. 우리가 복음을 세상에 널리 선포해야 하는 이유는, 이것이 곧 영원 전부터 작정하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엡 1:11, 2:11-22). 더욱이, 그 작정은 하나님의 뜻이 위로부터 내려오는 능력과 은혜로서 성취되도록 해야 할 성도들의 책임을 포함한다. 게다가 하나님은 그렇게 하도록 명령하셨다(마 28:18-20, 눅 24:47). 또한, 세상은 이러한 복음을 애타게 요구하고 있다.”라고 설명하였다.
박해 아래서 수행되어야 할 복음 선교는 혼자 이루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성령에 의해서 이뤄지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마가는【11】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치 말고 무엇이든지 그 시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라고 하였다.
이 구절의 내용은 9절과 관련된다. 즉, 공회와 회당과 관장들 그리고 왕들 앞에서 심문을 받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어떤 내용의 심문을 받든지 성령께서 함께하시면서 그때그때 필요한 지혜로운 대답을 주시기 때문이다(눅 21:14, 15).
“여기에는 성령에 대한 구약성경의 이해가 함축되어 있다”(E. Schweizer). 성령께서는 특별히 필요할 때는 특별한 사람에게 해야 할 말씀을 주신다(출 4:15, 렘 1:9. 참조: 행 6:10, 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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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사실에 대해 헨드릭슨(W. Hendriksen)이 잘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박해받는 사도의 마음이 빈 서판(tabula rasa)이며, 하나님께서 기계적으로 그 빈 공간 위에 갑자기 글씨를 쓰시기 시작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와 반대로, 만일 이 증인들이 시련을 당하지도 않고, 책이나 서신을 저술하지도 않는다면, 그들의 독특성은 숨겨질 뿐 아니라, 예수께 받은 이전의 사도적 훈련마저 수포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박해 속에서 사도들의 이 모든 것은 활기를 되찾고, 왕성하게 되며, 고도의 활동 무대로 끌어올려질 것이다. 그들이 반드시 전할 내용이 그 시간에 그들에게 전달될 것이라는 사실은 바로 유기적 의미에서 그렇다. 아버지의 영은 그들을 통해서 말씀을 전할 것이며, 그 영 곧 삼위일체의 셋째 영이신 성령께서는 예수님 자신이 그들에게 전하신바 모든 것을 그들에게 상기시켜 주실 것이다(요 14:26, 16:13-14. 참조: 고전 12:3).
이 예언의 성취는 베드로 또는 베드로와 요한의 설교(행 4:8-12, 13, 14, 19, 20)와 바울의 설교(행 21:19-22:21, 23:1, 6, 24:10-21, 26:1-23) 등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믿는 사람들에 대한 박해가 가족들에게서도 일어난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마가는【12】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 데 내어 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받을 핍박 중에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친척과 친구가 아닌 부모와 형제에게서 받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가정의 해체와 식구들의 적대적 투쟁은 재난의 시대에 대한 예언자적 서술에서 나오는 것이다. 묵시문학에서 이것들은 마지막 때의 타락을 나타내는 말이다”(J. Gnilka, 하권, p. 255).
이 구절의 선례는 미가 7:6의 “아들이 아비를 멸시하며, 딸이 어미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미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로다.”라고 할 수 있다.
마가는 널리 알려진 재난 예고를 제자들에게 적용함으로써 이것을 변경시켰다. 가정 불화에는 새로운 이유가 있다. 예수님을 추종하는 제자들은 자신의 육친에게 핍박을 받음으로써 본의 아니게 원수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육친이 복음에 대해 대단한 반감을 갖거나, 혹은 자신의 안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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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해서 믿는 육친을 죽는 데 넘겨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핍박하는 육친을 원수로 여기는 대신에 사랑하여 주님께로 인도해야 한다.
끝으로, 예수께서 제자들이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을 예고하신 것에 대해, 마가는【13】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하였다.
내 ‘이름’(9:37의 주석을 보라.)을 인하여는 9절의 “나를 인하여”와 같은 뜻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성도들은 인격이나 도덕 등의 결함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아서는 안 된다. 오직 주님에 의해 부름받았고, 주님을 믿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살고, 주님의 능력으로 기적을 행하고, 주님을 전하기 때문에 모든 불신자들의 미움을 받아야 한다(빌 1:29, 요 15:18-19, 17:14, 벧전 4:14-16).
그러나 상황이 요구하는 것은 나중까지(εἰς τέλος) 곧 ‘끝까지’ 견디는 것이다. 여기의 ‘끝까지’란 종말(黑崎幸吉, 이상근)이 아니라, 성도 개인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1)
견디는은 휘포메이나스(ὑπομείνας)이며 ‘버티다’, ‘인내하다’, ‘확고부동하다’, ‘참으면서 기다리다’ 등을 의미한다. {바클레이(W. Barclay)는 이 낱말은 단순히 인내하는 능력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일을 위대한 것으로 변화시키고, 영광에 가득한 것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라고 설명하였다.}(롬 2:7의 주석).
여기서는 일반적인 인내가 아니라, 믿음 곧 예수님의 제자 됨을 영광스럽게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인내를 가능케 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확고하게 붙잡는 성도는 반드시 이길 수 있다(고후 2:14).
구원을 얻으리라는 현실적인 핍박에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울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 4:7-8)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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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 D. Stevens, D. W. Burdick, W. W. Wessel, J. Gnilka, 하권, p. 256.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설교집 20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HP 010-6889-3051 T 02-426-30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