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65강: 이혼에 관한 교훈(10:1-12) b

2012-05-10 19:26 관리자 1660
바리새인들의 질문을 들으신 예수님의 반응에 대해, 마가는【3】대답하여 가라사대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반문을 하심으로써 반격하신다. “그 반문 속에는 허락이 아니라 계명이 언급되고 있음이 독특하다”(J. Gnilka, 하권, p. 98).
이것에 대해, 슈바이처(E. Schweizer)는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그들 자신의 권리들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다.”라고 하나, 오히려 예수께서 선포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모세의 율법의 규정과 날카롭게 대조되는 것이다. 즉, 모세의 이혼 계명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유대인들의 인간적 규례라는 것이다(참조: 10:5, 6).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은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라고 하시면서 질문자들에게 모세를 내세우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반문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대답에 대해, 마가는【4】가로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 주어 내어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라고 하였다.
바리새인들의 대답은 그들 자신의 입장을 고수한 것이다(2절의 주석을 보라). 그들은 모세의 계명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두 사람의 증인 앞에서 아내에게 주기만 하면 얼마든지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여자와 재혼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 한 가지 조건은 아내의 지참금을 돌려주는 것이다”(W. Barclay). 그러나 예수님은 모세의 계명의 동기를 밝히실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계명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뜻 곧 결혼의 원리를 내세우신다.
이 점에 대해, 마가는【5】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라고 하였다.
마음의 완악함(스클레로카르디안, σκληροκαρδίαν)은 σκληρός(스클레로스: ‘완고한’)와 καρδία(카르디아: ‘마음’)의 합성어이며, ‘마음(2:6의 주석을 보라.)이 굳고, 완고하며, 거칠고, 야비한 것’을 의미한다. 또, 이 말은 “그리스어 성서에서는 계속 불순종함으로써 하느님의 명령에 대해 무감각해진 인간의 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참조: 신 10:16, 렘 4:4, 집회서 16:10)”(J. Gnilka, 하권, p. 99).
바로 그러한 인간들의 마음 상태 때문에 모세가 마지못해 이혼 계명을 준 것이다. 결단코 모세는 이혼을 정당시하거나 장려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기준이 무시된 인간 사회 속에서 자행되고 있는바 아내를 내어버리는 남편들의 횡포를 막거나, 최소한으로 줄여 보려고 한 것 같고, 또한 부당하게 이혼당하는 여자에게 이혼 증서를 받게 함으로써 재혼의 길을 열어 주려고 한 것 같다.
그러나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그 계명은 완악한 인간들에게 무분별한 이혼을 합리화시킬 구실이 되었으며, 따라서 이혼을 증가시키는 빌미가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신명기 24:1-3을 항구적인 가치가 있는 계명으로 여기시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다.
예수님이 항구적인 하나님의 뜻이 담긴 원래의 율례를 지적하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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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해, 마가는【6】창조 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창 1:27. 참조: 5:2)라고 하였다.
“여기서 모세(의 계명)가 모세(의 계명)에 의해 공격을 당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성서의 말씀이 성서의 말씀과 대립되는 것’(클로스터만)이 아니라, 본래적인 하나님의 생각이 이차적으로 만들어진 계명과 대립된다. 원래적인 상태가 회복되어야 하는 것이다”(J. Gnilka, 하권, p. 100).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인용하신 창세기 1:27(참조: 5:2)은 “타락한 역사에 근거한 입법에 반대하여 창조의 시작부터 계시된 인간 실존의 참 본성에 호소하는 것이다”(W. L. Lane).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두 성을 가진 존재로가 아니라 남자로만 만드셨고, 그에게서 하와를 여자로만 만드셨다”(J. Wesley). 이것은 두 성의 조화인 부부 관계와 그 관계를 통한 하나님의 생명 창조를 전제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창 1:28).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대해, 마가는【7】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8】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라고 하였다.
이 두 구절은 창세기 2:24을 인용한 것이다.
부모를 떠나서는 부모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 의존해 살던 자녀의 새 가정을 이끌어 나갈 자립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이 말은 한 몸이 되는 부부의 연합이 부자의 연합보다 더 오래 가고 더 친밀한 연합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1) {반즈(A. Barnes)는 “결혼 관계는 모든 인간관계 중에서 가장 다정다감하고 사랑스러운 관계이다. 즉, 부자 관계보다 더 다정다감한 관계이다.”라고 하였다.}(마 19:5의 주석). 이러한 부부 관계에서만 진정한 부모 공경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한 몸에 대해 성적 관계가 지시하는바 육체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라는 설(E. P. Gould)과 신체적‧성적 결합을 가리키나, 신체적인 유대 이상의 인격적 결속을 포함하는 것이라는 설(J. Gnilka, 하권, p.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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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조: W. Hendriksen, E. P. Gould, W. W. Wessel, R. A. C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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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있다. 한 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 됨에 대한 셈족 또는 성서적 격언”(F. C. Grant)이라는 점과 마가가 7절 끝에 “그 아내와 연합하여”를 생략한 것으로 보아 여기서는 후자를 취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일부일처의 결혼 제도의 신성한 의미와 남녀 동등의 의미를 보게 된다. 아닌게아니라, 바울은 결혼을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에 존재하는 보다 깊은 영적 연합으로 묘사하였다(엡 5:22-33).1)
부부의 결합이란 예속이나 획일적 일치가 아니라, 조화의 일치를 의미한다. 서로 다른 부모에게서 태어나고,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성장하여 기질과 성격과 사고방식과 재능과 적성과 취미 등이 다른 부부의 강력한 조화의 일치를 위해 필수적인 것은 사랑과 이해이다. 이 사랑과 이해는 요구하는 데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는 데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부부가 상대방에 대해 이해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사실은 ‘이 세상에 또 하나의 나’는 없다는 것이다. 이 이해가 가능해야 상대방을 조화를 이루어야 할 독립된 인격체로 사랑할 수 있다.
예수님의 결론적인 말씀에 대해, 마가는【9】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라고 하였다.
그닐카(J. Gnilka, 하권, p. 102)는 “‘성서의 논증이 제시하는 해석을 추가적으로 확증한다. 하느님께서 친히 낙원의 결혼뿐만 아니라, 모든 개별적인 결혼을 제정하신다.’(Billerbeck, I. 803과 Baltensweiler, *50을 참조하라.)라고 한 라삐적 표상이 아마 배후에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이란 결혼 제도의 신적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부부는 신적 권위가 있는 부부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영적‧인격적‧이성적‧도덕적‧성적인 연합을 굳게 다져 나가야 한다. 이 부부간의 연합은 예속이나 획일이 아니라 조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의해 맺어진 부부를 사람이 나누지 못할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아내가 죽었을 때의 재혼은 문제될 것이 없다. 죽음은 부부의 결속을 풀 뿐 아니라, 두 번째 아내는 하느님이 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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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필자의 에베소서 주석 5:22-33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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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째 아내의 자리에 두시는 것이다”(J. Calvin). 바울은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롬 7:2-3)라고 하였다.
레인(W. L. Lane)은 “그 교훈의 예언적 특징은 예수님 자신의 인격 속에서 가까워진 천국에 대한 숨겨진 메시아적 선포를 의미한다. 제자들은 율법 규정조차도 맹목적으로 추종해서는 안 되고, 성서가 예증하는 최고의 표준들의 빛에서 주의 깊게 고려하여야 한다는 것을 본다.”라고 주목할 만한 설명을 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마태복음 19:9(참조: 마 5:32)에는 이혼 금지의 예외 조항으로 간음이 언급되어 있는 점이다. 그러나 이 점은 간음 자체가 이미 결혼 관계를 깨뜨린 것임을 생각하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창조의 질서로 보면 샴마이 파의 견해가 옳고, 인간적인 현실을 보면 힐렐 파의 견해가 옳다고 하면, 실제로 어떻게 처리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제자들이 가끔 그랬던 것처럼(4:10-20, 7:17-22, 9:28-29), 이 경우에도 추후에 예수께 질문한 것에 대해, 마가는【10】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묻자온대라고 하였다.
제자들의 질문을 들으신 예수님의 답변에 대해, 마가는【11】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12】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결혼은 사람이 나눌 수 없는 것이므로, 아내를 내어버리고 재혼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며, 본처에게 간음죄를 행하는 것이다. 또, 이혼 당한 본처가 재혼할 경우에 간음죄를 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설사 이혼 증서를 주었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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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랍비들과는 달리, 남자도 자기 아내에 대하여 간음을 행할 수 있다고 주장하셨다는 점이다. 랍비들에 의하면, 남자는 남의 아내를 유혹함으로써 그녀의 남편에 대해 간음죄를 범할 수 있고(신 22:13-29), 아내는 충실하게 못함으로써 자기 남편에 대해 간음죄를 범할 수 있다. 그러나 남편은 자기 아내에 대해 간음죄를 범한다고 말해질 수 없었다. 즉, 아내에 대한 간음죄는 성립되지 않았던 것이다.1)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예수님의 주장은 여성들의 지위와 품위를 높여 남자와 동등하게 여기신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는, 유대 세계에서는 아내가 남편을 버리는 예가 거의 없어서 율법도 이런 점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었다는 점을 보아 유대인들에게만 주신 교훈으로 국한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유대인들에게는 예외적인 그런 일이 헬라인들과 로마인들 사이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었으며(참조: 고전 7:10, 13), 오늘날에도 역시 그러하다.
이 구절의 의미는 앞 구절과 같다. 즉,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재혼하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며, 본 남편에서 간음죄를 범하는 것이다. 또, 이혼 당한 남편이 재혼할 경우에 간음죄를 범하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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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조: W. L. Lane, W. W. Wessel, 山口 昇, 이상근.

필자의 www.newrema.com의 저서들: 신약 주석(마-계 8610쪽)/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Salvation Before Jesus Came/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권/ 영성을 위한 한 쪽/ 절기 설교집 외 20권/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다수의 논문들 T. 426-3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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