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 - 감리교신문 제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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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호 2009년 1월 1일 (목요일) 기고
“일생을 개화와 독립에 헌신한 지도자”
12월의 독립운동가 박동완 목사를 추모하며 민족대표 33인 참가 ...‘신간회’발기인 등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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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광화문 크리스마스 설교
“성탄, 지극히 작은 자를 위해 오신 주님”
메리 크리스마스!!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 다. 오늘 광화문 크리스마스에 참석하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오늘 날씨가 몹시 춥습니다. 아마이추위에도거리에서살 아가는이웃들의형편을잘이 해하라는뜻이아닐까하는생 각이 들었습니다.
특별히 오늘은‘노숙인 자활 과 노숙 예방을 위한 성탄예배’ 로 드립니다. 오늘 광화문 크리 스마스가 노숙자 여러분의 자활 과회복을위한따듯한불씨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 일을 위해 서울연회 도심목회에 참여하는 여러 교회들이 이미 주거복지기금을 나누고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또 행사를 위해 준비된 여선교회의 희망트럭과 남선교회의물품등에대해깊 이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가장 아 름다운 이야기처럼 기억하고 있 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크리 스마스를가장잘이해할수있 는 단어를 하나 꼽으라면‘노숙’ 일 것입니다. 성탄의 주인공은 바로어느노숙자부부에관한 진실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마리 아와요셉은멀리길을떠나야 했고, 변변히 머무를 곳도 없었 습니다. 여관주인은 먼 길에 지
누가복음 4장 18-19절
친 그들을 보고는“빈 방 없어” 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마리아는 마구간에서 몸을 풀어야 했습니 다.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온기 도없고더러운짚더미가깔린 진짜 마구간이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구원은 바 로 가난한 사람들의 구체적인 현실조건 속에서 출발하였습니 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평생 집 없이 사셨습니다.“여우도 굴이 있고공중의새도집이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58).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소개합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 니이는가난한자에게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 시보게함을전파하며눌린자 를자유케하고주의은혜의해 를전파하게하려하심이라하 였더라”(눅 4:18-19).
주님이이땅에오신크리스 마스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 것 은“ 가 난 한 자 에 게 복 음 ”을 주 는 일입니다. 그것은 연말파티가 아니라, 선물교환이 아니라, 가 난한 사람의 심정이 되어 하나님 의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교회는‘지극히 작은 자 하
나’인 가난한 이들을 외면해서 는 안됩니다. 우리는 그들의 구 체적인 현실 가운데에서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크리스마스는 가장 위대한 분이가장보잘것없는사람처 럼 태어난 날입니다. 크리스마 스는가장부유한왕이가장가 난한 자로 태어난 날입니다. 크 리스마스는 인류 역사의 일대 전환을외친대웅변가가말없 는 아기로 태어난 날입니다.
이제 아기 예수는 우리 마음 속에서 다시 태어나셔야 합니 다. 그래서 임마누엘, 언제나 여 러분의 삶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복된 생애가 되길 바랍니다. 그 리고우리교회가성탄절뿐아 니라 1년 365일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는 크리스마스 공동체 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 추운 겨울에 집과가정을떠난모든노숙자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축원드립 니다.
신경하 전 감독회장
<이 글은 지난달 22일(월) 광화문 희망광장에서 열린 노 숙인 자활과 노숙예방을 위한 감리교회 성탄예배에서 행한 설교 원고이다. - 편집자주>
지난 12월 국가보훈처에 의해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근곡(무 궁화골) 박동완 목사(1885-1941)는 일생을조국개화와독립위해헌신 한 민족의 성자이다. 우리 정부에선 그의 독립운동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고 지난 해 1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 했다. 여기에 짧은 글이나마 남겨 목 사님이 남기신 유훈을 교회가 기리 고자 한다.
근곡이 출생하기 1세기 전 조선은 유학의 대안학문인 실학과 양명학에 대한 연구 열기가 경기지역을 중심 일어, 민족은 개화와 근대화를 위한 자생적 인재들을 양성하고 있었다. 근곡이 태어나던 해는 조선에 중대 한 변화가 초래된 해이다. 감리교 선 교사가 합법적으로 입국한 것이다. 조선 발전전략으로 개화를 택한 명 성황후와 고종황제는 감리교에게 선 교 윤허를 해주었고 감리교는 이에 호응하여 의료와 교육을 통한 선교 활동에 들어간 것이다.
당시 고향 양평에서 개화돼 있던 부유한 부친 박형순의 덕으로 독선 생을 두고 한문을 수학한 근곡은 1901년 서울 누하동 정착 한성외국 어학교영어수학중학교폐쇄로인 해 배재학당 대학부로 전학한다. 그 는 이 시기 감리교로 개종하여 1903 년 최병헌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 으며, 이 해부터‘대한그리스도회보’ 편집인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1915 년 감-장 합동 신문인‘기독신보’서 기를 맡으면서 정동제일교회 전도사 로도 시무한다.
1906~11년 국내외 산개투쟁을 결의한 감리교 중심의 항일 비밀결 사 신민회의 해외파와 국내파는 독 립전쟁 준비를 마치고, 광무황제를 해외로 망명시켜 정부를 수립한 다 음 독립전쟁을 시작한다는 계획을 세운다. 만주와 노령엔 독립군 기지 를 두고 3,500 여명의 독립군을 양성 하였는데 그곳에 수백만의 조선인들 이거주하고있던것이배경이되었 다. 여기에는 세계대전 종결로 파리 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점도 충분히 고려되었다.
해외파인 이회영 권사와 국내 기
획자격인 손정도 목사, 조직에는 이 필주목사가중심이되어거사계획 을 수립했다. 이들은 해외로 현순 목 사를 밀파하고, 박희도에게는 학생 단 동원을 준비하도록 하였으며, 이 시기 박동완은 언론을 통해 국내외 정보를 수집하는 일을 맡았다.
그러나 실제 거사는 여러가지 이 유로인해원래계획과는다른양상 으로 실행된다. 세계사 최초 최대의
식민지 민족해방투쟁이면서 평화혁 명으로 기록된 기미 독립운동이 그 것이다. 이 운동은 특별히 감리교와 장로교,천도교와불교등4대종교 단체가연합하여더큰의미를갖게 된다.
이때 감리교의 영향을 받아 개화 로 입장을 전환한 천도교는 농촌을 중심으로 파고들었고, 감리교는 대 도시 중심, 장로교는 서북권 중심의
대중동원 체계를 갖춘다. 이같은 준 비를 끝낸 뒤 민족대표로 서명한 33 인의 지도부는 체포를 통한 옥쇄투 쟁을 결의하고 기미년 3월1일 태화 관을 시작으로 전국적인 동시 독립 운동을 개시하게 된 것이다. 이 때 체 포된 민족대표들은 일경으로부터 지 독한고문을당하게되고근곡역시 체포되어 2년 8개월의 옥고를 치른 뒤 1921년 11월 출옥했다.
출옥한 근곡은 다시 기독신보 주 필로 활동을 개시하여 YMCA, 조선 민립대학 기성회, 조선물산장려회, 비밀결사 흥업구락부,‘신생명’주 간, 비타협적 민족주의자 좌우민족 단일전선 신간회(新幹會) 기독교측 상임간사 등으로 민족을 위한 치열 한 삶을 이어갔다. 1928년 만주 동포 들이일본의교사로인해중국관헌 의 박해를 받는 일이 생기자‘재만동 포 옹호동맹’이 결성되었는데 안재 홍이 위원장을 맡았고, 근곡은 재무 부장으로 일하게 된다. 그는 직접 만 주로 가 동포들의 실태를 조사하고 돌아왔으며, 근우회와 감리교 재만 동포위로회, 아펜젤러 선교사와 배 형식등을통해모금한자금으로동 포들을 지원했다.
1928년 중반 국내에선 더이상 활 동할 수 없게 된 근곡은 민찬호, 임두 화목사의도움을받아하와이로이 주하게 된다. 그는 하와이 한인기독 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한 뒤에도 민 족 신앙과 교육에 헌신하였으며, 15 년뒤병을얻어갑작스레세상을떠 났다. 국내 남겨져 있던 감리교 개화 여성 현미리암과 3남2녀는 남편과 부친의 임종도 못했으며, 근곡의 유 해는한달뒤동지였던함태영목사 에의해옮겨져망우리묘지에안장 되었다가 1966년엔 국립묘지 애국 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바지 댓님도 매지 않고, 시계는 왜 보다 30분은 늦추어 놓고 살았던 박 동완 목사님“, 살을 에이고 저미는 듯 하던 겨울바람도 이제는 온화한 봄 바람이 불어... 희망의 때가 돌아온 다”고 노래했던 그분을 추모하는 마 음을 이 글에 담아 보낸다.
민관기 목사(성안산형제들교회)
▲ 박동완 목사는 감리교회 대표로 33인에 참여하는 등 일생을 민족독립과 개화를 위 해 헌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