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서드】자유의지(自由意志)

작성자
함창석
작성일
2021-05-15 07:07
조회
89
자유의지
自由意志

함창석

루터와 칼빈은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20세기의 대표적인 기독교 변증자 C. S. 루이스(1898-1963)는 자유의지를 주장했다. 교부시대 이후로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사람은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그리고 칼빈주의자들은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감리교회를 알미니우스주의적이라거나 반(半)펠라기우스적이라고 비판해 왔다.

『순전한 기독교』에서 루이스가 말하는 자유의지를 지금은 교파를 불문하고 자유의지를 말하는 루이스를 20세기의 대표적인 기독교 변증자라로 추앙하고 있다. 이 의외의 사실 앞에서 우리는 먼저 그가 어떤 근거에서 자유의지를 주장하는지, 그리고 교회가 어떻게 20세기에 와서 자유의지를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궁금하였다.

하나님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들을 창조하셨다. 자유의지는 옳은 일을 할 수도 있고 그른 일을 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자유의지를 가졌으면서도 그릇 행할 가능성은 전혀 없는 존재를 상상하는 이들도 있지만, 저로서는 그런 존재를 상상할 수가 없다. 선해질 수 있는 자유가 있다면 악해질 수 있는 자유도 있는 법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악을 가능케 한 것은 바로 이 자유의지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사람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을까? 악을 가능케 하는 것도 자유의지이지만, 사랑이나 선이나 기쁨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 또한 자유의지이기 때문이다. 자동기계―기계적으로 움직이는 피조물들―의 세계는 창조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가장 고등한 피조물들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행복은 사랑과 즐거움의 절정에서 자유로우면서도 자발적으로 하나님과 연합하며 이웃과 연합하는 데서 생겨나는 행복이다. 거기에 비하면 지상에서 남녀가 나누는 가장 황홀한 사랑조차 물 탄 우유처럼 싱거울 것이다. 바로 이런 행복을 누리기 위해 인간은 자유로워야 하는 것이다.

자유의지가 어떤 것인지 이해한다면, “하나님은 왜 이처럼 쉽게 부패하는 재료로 피조물을 만드셨는가?”라는 질문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알 게 될 것이다. 좋은 재료로 만든 피조물일수록― 더 똑똑하고 강하고 자유로운 피조물일수록― 옳은 길로 가면 그만큼 더 선해지지만, 그른 길로 가면 그만큼 더 악해지는 법이다.

‘어두운 권세’는 어떻게 타락하게 되었을까? 이것은 인간이 확실히 대답할 수 없는 질문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타락했던 경험에 비추어 합리적으로 추측해 볼 수는 있다. 여러분이 자아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갖게 되는 순간, 여러분에게는 자기 자신을 앞세울 가능성―스스로 중심에 있고 싶어 할 가능성, 사실상 하나님이 되고 싶어 할 가능성―이 생긴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지은 죄였고, 사탄이 인류에게 가르친 죄이다.

어떤 이들은 인간의 타락이 성적인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인 것이다. 창세기의 이야기는 오히려 타락 이후에야 성적인 본성이 부패하게 되었다는 것, 즉 성적 부패는 타락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탄이 우리 옛 조상들의 머릿속에 불어넣어 준 생각은 그들도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 마치 스스로 자기를 창조하기라도 한 양 자존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다, 하나님 밖에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스스로 행복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가망 없는 시도로부터 우리가 인간 역사라고 부르는 거의 모든 것― 돈, 가난, 야망, 전쟁, 매춘, 계급, 제국, 노예제도 등, 하나님 외에 무언가 다른 것에서 행복을 찾고자 했던 인간들의 길고 무서운 이야기― 이 나왔다. 인간에게 주어진 일정의 자유의지는 능력의 차이로 인하여 인간을 더 계급화 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공적에 의한 구원을 주장하는 펠라기우스에 맞서서 은혜에 의한 구원을 내세우며 논쟁을 벌였다. 그런데 그의 은혜의 교리가 418년에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받아들여졌고 펠라기우스는 단호히 정죄되었다.

마르틴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은혜에 의한 구원을 받아들였다. 인문학자 에라스무스가 <자유의지에 관하여>(1524)라는 논문을 써서 루터를 반박하자 루터가 발끈해서 다음 해에 『노예의지론』을 발표했다. 그런데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공했기 때문에, 에라스무스의 주장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없다는 루터의 주장이 개신교의 교리로 자리 잡았다. 루터의 뒤를 이어서 칼빈도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한 칼빈은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에게는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대하여 알미니우스가 인간에게는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고 나섰지만, 1619년에 도르트 교회회의에서 알미니우스주의가 정죄되고 칼빈주의의 주장이 정통교리로 인정을 받게 되어 신학을 주도했다.

그런데 20세기에 와서 C. S. 루이스가 그의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 1952)에서 자유의지론을 주장했다. 그가 루터의 시대에 살았더라면 그의 주장은 종교개혁기의 인문학자 에라스무스의 것과 마찬가지로 뒷전으로 밀려났을 것이다. 그리고 루이스가 칼빈이 목회하던 제네바에 살았더라면 틀림없이 정죄되어서 추방당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아무도 자유주의를 내세우는 인문학자 루이스를 정죄하지 않는다. 오히려 교파를 가리지 않고 모두 그를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자’라고 치켜세우고 있다. 그리고 그가 알리스터 맥그래스, 제임스 패커, 존 스토트, 팀 켈러 같은 복음주의권의 신학자나 목회자들에게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변화를 보며 일부에서는 당혹스러워하겠지만, 이런 신학계의 변화는 18세기에 웨슬리가 알미니우스주의를 받아들여서 신인협동설을 주장하고 나섰을 때 이미 교회 안에서 시작되었다. 그동안 우리는 세상이 몰라보게 빨리 변하는 것을 경험했다. 특히 인문학의 발달을 통해서 개혁기에 인간을 보았던 눈과 지금 인간을 보는 눈이 격세지감을 느낄 만큼 많이 달라졌다. 개혁자들의 시대에는 인간을 로봇처럼 보았지만, 지금은 의지를 가진 존재로 본다. 본회퍼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는 ‘성인된 세상’에 살고 있다. 성경을 보는 눈도 달라졌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일하지만, 성경을 보는 눈이 달라지면 전에 보이지 않던 성경의 기록이 새롭게 보인다. 책을 읽을 때 우리는 우리에게 보이는 것, 달리 말하면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기 쉽다. 자유의지론은 인간을 자율적인 존재로 보는 신학자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읽어낸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역사적으로 위대한 일을 했지만, 그들의 신학적 주장은 사회·문화적 변화와 발전에 따라 재고되어왔다. 우리는 이런 것을 웨슬리의 신인협동설에서 이미 보았고 루이스가 말하는 자유의지에서도 보았다.

외부는 소리나 빛으로 인간 생명체 즉 뇌나 피부를 자극하고 있다. 혹자는 신이라고 하는 초자연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외부로부터 조정을 끊임없이 받고 있다. 그런데 인간 생명체는 자극에 반응을 하면서 움직이게 된다. 또한 인간 생명체도 외부로 자극을 주며 조정을 시도 한다. 외부도 인간에게 반응을 해 온다. 상호 간에 부단한 자극과 반응을 통해 교감을 이루는 것이다. 조정 받고 조정 하려는 의지야 말로 자유의지가 아니겠는가?

물: 자연은 물과 빛이다. 자연 속에 존재를 대상화하면 사물이 된다. 인간도 자연 속의 일개 존재일 뿐이다.
인: 인간 속에는 정자와 난자가 있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면 생명이 되는데 자라면서 아기가 되어 태어난다.
성인: 아기는 자라 정자와 난자를 생산하는 인간으로 탈바꿈한다. 즉 성인(어른)으로 아기를 생산할 수 있다.
성신: 대를 이어 반복적 활동이 가능하게 되어 실행할 때 관계 속에서 선 인간을 어른 신(어르신)이라 한다.
신: 모든 몸이 기능을 다하고 상실할 때 분리가 되고 물이 되고 소리와 빛으로 돌아간다. 그를 신이라 한다.

손자 – 아들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대개 이 땅에 인간 생명으로 존재하다가 120년 정도 지나면 물에서 신이 된다. 대개 태아 - 아기 – 성인 – 성신 - 신으로 탈바꿈하며 사당에 신위(전통적인 사당)로 모셔진다.
혹자는 혼(얼, 넋)과 영(신령) 그리고 심(마음: 지정의)으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비 물질로 그 존재를 구분한다.

같은 자극이 동 시공간에서 일어나도 인간이나 동물, 식물, 광물 등 모든 사물은 그 반응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생명체마다 자유의지가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본다. 자유의지는 반응에 무게를 두는 것이다.

전체 1

  • 2021-05-15 07:08
    금혼식을 향하여
    金婚式

    함창석

    얼굴이 못 난 이도
    조금 멀리 보면
    아름다운 미인으로 보이고
    가까이 있는 이는
    흠이 더 많아 보이지

    이웃 동네 여사가
    편하게만 느껴지는 것이야
    멀리서 보기 때문인가

    곁에 있는 이가
    불편하게 느끼지는 건
    가까이에 있기 때문이리라

    한 겨울 쌓인 눈이
    멀리서 하얗게도 보이고
    피었다가 지는 꽃이
    조금 멀리서 보면
    저처럼 고상하게도 보이지

    이 세상살이
    모든 관계 속에서도
    거리두기가 있어야 좋다니

    날마다 가까이 있어
    복이 되는 게 하나인데
    천사를 닮은 듯
    오래도 살아온 아내뿐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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