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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어느 유형의 목회자인가?

작성자
오재영
작성일
2021-02-23 18:58
조회
720
출애굽기에는 두 유형의 목회자가 등장한다.

첫 번째 유형의 목회자는 아론이다. 아론은 출애굽의 지도자인 모세의 친형이었다. 하지만 그가 출애굽기의 주요인물이 된 것은 단순히 모세의 친형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아론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명령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 중 네 형 아론과 그의 아들들 곧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그와 함께 네게로 나아오게 하여 나를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되, 네 형 아론을 위하여는 거룩한 옷을 지어 영화롭고 아름답게 할지니 너는 무릇 마음에 지혜 있는 모든 자 곧 내가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에게 말하여 아론의 옷을 지어 그를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출 28:1-3).

아론이 출애굽기의 주요 인물이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에 의해 구별된 초대 대제사장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아론에게 별도의 거룩한 옷까지 만들어 입히게 하셨다. 아론이 백성과는 구별된 대 제사장임을 가시적으로 확인시켜 주시기 위함이었다. 아론은 초대 대제사장으로서, 대제사장의 구별된 직무를 거룩하게 수행해야만 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준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목회 현장의 아론은 어떠했던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 산에 올라가 있을 때였다. 사백년에 걸친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킨 모세는 그들에게, 그들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대리인과 같았다. 그 모세가 시내산으로 올라간 뒤엔 감감무소식이었다. 몇 날 며칠정도가 아니라 몇 주가 지나도 모세가 되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이스라엘 백성은 너나없이 불안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그들은 눈으로 볼 수 있던 모세를 대체할 가시적인 형상을 필요로 했다. 그들의 필요는 간단하게 충족되었다.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가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아론이 보고 그 앞에 제단을 쌓고 이에 아론이 공포하여 이르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출 32:2-6).

이스라엘 백성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모세 대신에, 이집트에서 익히 보아 왔던 금송아지를 새겨 만들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구하는 금송아지를 직접 새겨 만든 사람은, 놀랍게도 초대 대제사장 아론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론의 손으로 만들어진 금송아지를 보고 감격하여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라고 소리쳤다. 우리말 ‘신’으로 번역된 단어가 히브리어 원문에는, ‘엘로 힘’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눈앞의 금송아지가 자신들을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 다시 말해 자신들을 위해 홍해를 가르시고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시며 반석에서 강물을 터트려 주셨던 그 하나님, 이시라며 감격해하였다.

그 광경을 목격한 대제사장 아론은 한술 더 떴다.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라고 공포한 것이다. 자신의 손으로 새겨 만든 금송아지가 여호와 하나님이 맞으므로, 내일을 그 금송아지 앞에서 여호와의 절일로 경축하자는 것이다. 날이 밝자마자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를 여호와라 믿으며 그 앞에서 광란의 축제를 벌였다.

출애굽기 7장 7절에 의하면 출애굽 당시 동생 모세는 팔십 세, 형 아론은 팔십삼 세로, 그 두 사람은 세 살 터울이었다. 그러나 모세는 출생 이후 팔십 세가 되기까지 형 아론과 떨어져 살았다. 처음 사십년은 이집트 왕궁에서 왕자로 살았기 때문이고, 두 번째 사십년은 미디안 광야의 양치기로 산 까닭이었다. 친형제일망정 태어나자마자 팔십 년이나 떨어져 살았다면, 실은 남남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을 불러 동역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하나님께서 먼저 미디안 광야의 양치기였던 팔십 노인 모세를 부르셨다. 그리고 그에게, 이집트에서 노예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라고 명령하셨다. 모세는 납득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그 명령을 사양하였다.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의 입에 할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출 4:10-16).

태어난 이래 사십 세가 되기까지 이집트의 왕자로 살았던 모세는, 당시 세계 최강인 이집트의 군사력이 얼마나 막강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미디안 광야의 양치기로 살아가는 팔십 노인 모세다. 사십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 갇혀 사느라 현실감각을 상실한 모세는 말도 어눌했다. 한마디로 팔십 노인 모세는 더 이상 쓸모없는 촌로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당신의 백성을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시키라는 청천벽력 같은 하나님의 명령을 연거푸 사양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 모세 곁에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사람이 달변가이자 그의 친형인 아론이었다. 모세는 친형 아론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도 몰랐지만, 하나님께서 아론으로 하여금 이집트로 향하는 모세를 찾아가 만나도록 섭리해 주셨다.

그때부터 아론은 모세의 동역자인 동시에 대변인이 되었다. 아론은 모세와 동행하면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어떻게 구원하고 또 인도하시는지 빠짐없이 목격하였다. 이집트의 파라오가 국부의 원천인 이스라엘 노예들을 해방시켜 주지 않을 수 없도록 열 가지의 재앙을 내린 분은 금송아지가 아니었다. 폭 32킬러미터의 홍해를 갈라 이집트의 전 군대를 홍해에 수장시킨 분도, 음용 불가능한 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바꾸어 주신분도,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가를 비처럼 쏟아지게 한 분도, 반석에서 강물을 터트린 분도, 결코 금송아지인 것은 아니었다. 그 모든 일을 행한 분은 오직 영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셨다. 아론은 모세 곁에서 하나님의 그 모든 역사를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목격하였다. 하지만 아론은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자기 손으로 금송아지를 새겨 만들고, 그 금송아지가 자신들을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시킨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공포하였다. 초대 대제사장인 아론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영이신 하나님을 금송아지 속에 가두어 버린 것이다.

아론 자신은 금송아지가 절대로 하나님일 수 없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대중의 열망과 인기에 영합한 아론에게 하나님을 금송아지로 왜곡하는 것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자기 손으로 빚어 만든 금송아지 앞에서 광란의 축제를 벌이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서 자기도취에 빠져 있는 아론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사십 일 만에 시내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격분하였다. 모세의 추궁을 당한 초대 대제사장 아론의 변명이 기가 막힌다.

“아론이 이르되 내 주여 노하지 마소서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노라 하기에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개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출32:22-24).

격노한 모세의 추궁을 받은 아론은 비겁하게도, 조금 전까지 부화뇌동했던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자신을 분리하였다. 그리고 모세에게, 그들은 본래 악한 존재인 것을 알지 않느냐는 식으로 그들을 매도해 버렸다. 게다가 자신이 한 일이라곤, 그저 백성의 요구에 따라 그들의 금붙이를 불 속에 던져 넣은 것밖에 없다고 했다. 그랬더니 불 속에서 금송아지가 절로 나왔다는 것이다. 대중의 열망에 영합하여 금송아지 제작을 주도했던 아론은 정작 문제가 터지자, 하나님을 모독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파멸을 초래한 그 엄청난 과오의 책임을 대중에게 전가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셀프 면제부를 발부하였다.

이것이 대중의 열망과 인기에만 몰입하는 인간일수록 사실은 자기 자신만 위하는 이기적인 인간이다. 초대 대제사장 아론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거룩하게 구별한 목회자이기 이전에, 대중의 열망과 인기에 야합하는 포퓰리스트에 불과했다.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두 번째 유형의 목회자는 모세다.

모세가 하나님께서 직접 새겨 주신 십계명의 두 돌판을 들고 사십 일 만에 시내산에서 내려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 앞에서 광란의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였고, 모세는 수종자 여호수아와 ‘단둘’이었다. 머릿수로만 따진다면, 흥분의 도가니에 빠진 그들을 잘못 다루다간 화를 입을 확률이 컸다. 하지만 모세는 그들의 잘못을 방관하거나, 아론처럼 그들과 야합하려하지 않았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경외한 모세는 격노하여 그들을 향해 두 돌판을 던졌다. 그리고 그들이 여호와라 부르며 경배한 금송아지를 가루로 박살내어, 그 위에 물을 뿌리고 그들에게 마시게 했다.

그것도 모자라 레위인들을 시켜 그들 가운데 삼천 명을 처단 하였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모독한 범죄에 대한 무서운 응징이었다. 당시 이스라엘백성은 남자 장정의 수만 육십만 명이었다. 그들이 반발하면 모세에게는 도리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모세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단호한 응징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응징을 끝낸 모세는 도리어 하나님께 이렇게 간구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2).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성경 기자들이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 말씀 중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손을 통하지 않고, 당신이 친히 돌판에 새겨주신 말씀이 있다(출24:12). 바로 십계명이다. 그만큼 그 내용이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중요한 십계면의 첫 머리를 이루고 있는 세 계명은 각각 다음과 같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20:3).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 20:4-5상).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출20:7상).

하나님께서 친히 돌판에 새겨 주신 절대적인 십계명, 그 십계명의 첫머리를 이루고 있는 세 계명에 의하면, 금송아지를 여호와라 부르고 경배한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진멸당해 마땅했다. 그러나 모세는 그들이 진멸당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모세는 하나님을 부정하고 모독한 그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용서해 주시기를 간구하였다. 형식적이거나 의례적인 간구가 아니었다. 이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기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소명인 답게,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기를 자신의 생명을 걸고 간구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해 주시는 대가로 누군가가 대신 죽임을 당해야 한다면,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을 삭제해도 좋다고 간구한 것이다. 진멸당해 마땅한 이스라엘 백성을 살릴 수만 있다면, 모세 자신은 영원히 버림을 받아도 좋다는 애절한 기도였다. 모세는 자기 영달을 위해 하나님을 등지고 대중과 야합했던 아론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진정한 소명인이자 참된 목회자였다.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 탐지를 위해 모세가 파견했던 열두 명의 정탐꾼들 가운데, 무려 열 명이 가나안입성 불가를 주장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가나안의 거인들 앞에서 자신들은 메뚜기에 불과해 그들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고 주장했다. 열두 명 중에 열 명은 전체의 83,3퍼센트다. 83,3퍼센트라면 수치상으로 절대다수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83,3퍼센트의 주장에 넋을 잃었다. 그들은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좋을지, 그들의 지도자인 모세의 의견을 구하지 않았다. 모세와 의논하려 하지도 않았다. 공포에 사로잡혀 밤새 통곡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버리고 새로운 지도자를 세워 이집트의 노예살이로 되돌아가려 하였다. 그것은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그들을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에 대한 영적 쿠데타였다.

열두 정탐꾼들 가운데 나머지 두 명인 갈렙과 여호수아는, 가나안 원주민이 비록 거인이긴 해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자신들의 밥일 뿐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의 역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16,7퍼센트의 소수의견에 지나지 않았다. 두려움과 군중심리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지도자인 모세를 아예 돌로 쳐 죽이려 하였다. 만약 모세가 그들의 돌에 맞아 죽었더라면, 필경 아론이 그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이집트의 노예살이로 되돌아가는 그들의 길잡이가 되었을 것이다.

모세는 자신의 존재를 아예 부정하면서 이집트의 노예살이로 되돌아가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배신감을 느끼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모세가 그들의 이집트 복귀를 내버려 둔다 한들, 그것은 무지한 그들 자신의 책임일 뿐 모세의 잘못일 수는 없었다. 오히려 모세는 무거운 책임감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릴 수도 있었다.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의 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목격하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하셨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네게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민14:11-12).

하나님께서는 많은 이적을 베푸시며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셨다. 당신께서 언약하신 가나안 땅으로 그들을 인도해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의 노예살이로 되돌아가려 했다. 그것은 하나님을 금송아지 형상 속에 구겨 넣으려던 것처럼 하나님과 하나님의 언약을 부정하는 범죄 해위였다. 하나님께서는 그 패역한 이스라엘백성을 아예 쓸어버리시고 모세를 통해 새로운 민족을 이루려하셨다. 모세를 새로운 민족의 시조로 세우시겠다는 말씀이었다.

한 민족의 지도자가 되는 것과 시조가 되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한 민족의 지도자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억만 겁의 세월이 흘러도 한 민족의 시조는 한 명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새로운 민족의 시조로 세우신다면, 모세 개인에게는 그보다 더 큰 영광이 있을 수 없었다. 모세가 자기 영달을 삶의 목적으로 삼은 사람이었다면, 그는 쌍수를 들어 하나님의 계획을 환영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밝히신 계획을 전해들은 모세는 하나님께 이렇게 간구 했다.

“이제 주께서 이 백성을 하나 같이 죽이시면 주의 명성을 들은 여러 나라가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가 이 백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에 인도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광야에서 죽였다 하리이다 이제 구하옵나니 이미 말씀하신 대로 주의 큰 권능을 나타내옵소서 이르시기를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허물을 사하시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구하옵나니 주의 인자의 광대하심을 따라 이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되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백성을 사하신 것 같이 사하시옵소서”(민 14:15-19).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소명에 투철한 목회자가 아니고서는 드릴 수 없는 기도였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모세의 기도를 어찌 들어주시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모세는 대중의 열망과 인기에 영합하려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대중을 이용하거나, 대중과 야합하여 자기 영달을 꾀하려 한 적도 없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끊이지 않는 원망, 모함, 비난, 배신,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그들을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기위해 자신의 생명을 걸었다. 모세가 아니었던들, 이스라엘 백성 중 그 누구도 가나안 땅에 입성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모세는 모든 면에서 아론과 비교되는, 소명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자신의 삶으로 보여 준 참된 목회자였다.

그대는 어느 유형의 목사인가? 아론형 목사인가, 모세형 목사인가?

우리는 신약성경 속에서도 모세처럼 일평생 주님의 부르심에 올곧게 응답한 참된 목회자를 만날 수 있다. 사도 바울이다. 주님을 부정하며 교회를 짓밟던 바울을 주님께서 부르신 까닭을 사도행전 9장 15절은 이렇게 밝혀주고 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이라면, 실은 세상 모든 사람들을 일컫는다. 바울은 주님께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특별히 선택하신 주님의 도구였다. 그러나 바울에게 주님을 증언하는 주님의 도구로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바울은 자기 배만 불리는 거짓 선지자들을 고발하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 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7).

바울에게 주님을 증언하는 것은 꽃길이 아니었다. 그 것은 눈물겨운 고난과 시련과 고통의 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주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소명을 다하기 위해 세 차례나 지중해 세계를 누비고 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세 번째 전도여행을 매듭지은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에베소의 장로들을 밀레도로 불렀다. 그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기기 위함이었다. 당시의 장로들은, 요즈음 말로 하면 교인들을 영적으로 보살피는 목사들이었다. 그들에게 바울은 이 세상 마지막 유언을 시작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2-24).

바울도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 일평생 대중의 열망과 인기에 영합하려 한 적이 없었다. 주님과 신자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영달을 꾀한 적도 없었다. 바울 역시 모세처럼 온갖 박해와 모함과 고난 속에서도 주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건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유언은 이렇게 이어진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행 20:29-30).

헬라어 원문에는 ‘이리’가 복수형으로 기록되어 있다. 바울이 언급한 ‘사나운 이리들’은 ‘거짓 교사들’, 요즈음 말로 짝퉁 목사들을 일컫는다.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자신의욕구나 야망을 충족시키는 거짓 교사들이 도처에 판을 치고 있었다. 바울이 떠난 뒤 바울의 빈자리를 그들이 꿰차고 자신들의 유익을 위하여 신자들을 미혹케 할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바울의 경고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지금 바울의 면전에서 그의 마지막 유언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모두 에베소의 장로들이다. 그들은 바울을 지금 처음으로 조우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에베소에서 바울에게 복음을 전수받았고, 바울에 의해 장로로 세움 받았다.

그들 모두가 바울에게 신앙 훈련받은 바울의 제자들인 셈이었다. 바로 그 제자들에게 스승 바울이 지금 마지막 유언을 남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그들에게 덕담을 남겨줌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내가 떠난 후, 여러분들이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는 주님의 신실한 종들이 될 줄 믿는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에게 덕담은커녕 도리어,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는 경고를 남겼다.

우리말 ‘어그러지게 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디아스트랩호’는 ‘왜곡하다’, ‘비틀다’,라는 의미다. 그리고 ‘안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에이도’는 ‘(눈으로)보다’라는 뜻이다. 바울은 자신이 떠난 뒤에 에베소의 장로들 중에서도 주님의 말씀을 비틀고 왜곡하여,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을 자기 욕구 충족의 도구로 삼는 거짓목회자가 나올 것을 눈으로 보듯, 확연하게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자기 영달을 위해 하나님을 금송아지로 왜곡하며 이스라엘 백성을 호도했던 아론 형, 목회자가 에베소의 장로들 가운데서도 출연할 것을 바울이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바울은 3차 전도여행 중 에베소에서 삼년동안 복음을 전하면서 장로들을 세웠다. 이를테면 바울과 가장 오랫동안 지낸 장로라도 그 기간이 삼년을 초과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초대 대제사장인 아론이 하나님의 온갖 이적을 목격하고도 자기 영달을 위해 하나님을 금송아지로 왜곡했던 그 인간의 죄 성의 연장선상에서, 신앙 연륜도 영적 훈련도 일천한 에베소의 장로들 가운데서 자기 유익을 위해 신자들을 이용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아론형 목회자는 얼마든지 출현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 가능성과 위험성을 꿰뚫어 본 바울이 그렇게 엄히 경고한 것이다.

오늘날은 어떤가? 오늘날 각 교단에서 목사 후보생들을 배출하는 ‘신대 원’ 역시 삼년 과정이다. 그 삼년 과정은 질적으로나 영적으로, 이천 년 전 바울이 에베소의 장로들을 세운 삼 년 과정에 상응할 수 있을까? 양적인면 이외에는 그렇지 못하다면, 바울이 배출한 장로들 가운데 아론형 목회자가 출현한 비율보다 이 시대에 아론형 목사가 출현할 비율이 훨씬 더 높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자기 욕망의 충족을 위해 교인들을 수단 삼아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아론형 목사들이 오늘날 사방에서 판을 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귀결이 아니겠는가?

그대는 어느 쪽 인가? 아론형 목사인가? 모세형 목사인가?
다음은 바울이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써 보낸 편지 내용이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2:17).

이 짧은 구절을 이루고 있는 단어들 중에 중요하지 않은 단어가 하나도 없다. 주어는 ‘우리’이다. 바울을 포함하여 그의 동역자인 누가와 디모데 등이다. 바울은,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바울이 언급한 ‘수많은 사람들’은 누구며, 그들이 대체 무슨 짓을 하였기에 바울 일행은 그들처럼 하지 않았음을 강조하고 있는가? ‘수많은 사람들’은 당시 거짓 교사들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전도자, 혹은 說敎者를 의미했다. 요즈음 용어로 대부분의 목사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자들이었다.

우리말 ‘혼잡하게 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카펠류오’는 ‘행상’을 뜻하는 ‘카펠로스’에서 파생되었다. 이천년 전 어디서나 붙박이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은 불량상품을 취급할 수 없었다. 주된 고객이 주위의 주민들이므로 그들의 신뢰를 상실해서는 가게 운영이 불가능한 탓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행상들은 달랐다. 그들은 발길 따라 움직이는 떠돌이 상인들이었다. 한번 들른 마을을 언제 다시 찾아올지 자신도 알지 못했다. 오늘 자기에게 상품을 구입한 사람을 언제 또 만난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래서 이천 년 전 떠돌이 행상들은 가짜 혹은 불량 상품을 팔았다.

진짜 포도주에 물을 섞어 포도주의 양을 늘려 파는 식이었다. 포도주에 섞어서는 안 될 물을 고의로 부어 섞는 행위가 ‘카펠류오’, 즉 포도주를 ‘혼잡하게’ 하는 행위다. 물을 섞은 포도주는 더 이상 포도주가 아니다. 포도주에 물은 불순물인 까닭이다. 그런데도 떠돌이 행상들이 포도주에 불순물을 섞어 ‘혼잡하게’ 만드는 이유는 간단했다. 손쉽게 양을 늘려 더 많은 이익을 남기기 위함이었다. 바울이 보기에 당시 대부분의 목사들이 그와 같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거나 가르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대부분 인간의 그릇된 삶을 꾸짖는 내용인 까닭이다.

그들은 대중을 손쉽게 끌어들이기 위해, 대중의 요구에 영합하기위해, 그리고 자신의 야망을 성취하기 위해, 마치 떠돌이 행상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온갖 불순물을 섞어 ‘혼잡하게’하였다. 요즈음 용어로 표현하면 소위 ‘출세 지상주의’, ‘번영 신학’, ‘기복 주의’, ‘적극적 사고방식’, ‘긍정의 힘’과 같은 불순물이었다. 인간이 불순물을 섞은 하나님의 말씀은 단연코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하지만 당시 목사들 대부분이 자신의 그릇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렇게 하였다. 그래서 바울이, 우리는 수많은 목사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물을 섞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한 적이 없다고 천명한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은 늘 時流를 따른다. 시류를 거스르는 것은, 시류를 따르는 다수로부터 불이익을 자초하는 일이다. 이천년 전 대부분의 목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물을 섞는 왜곡으로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시켰다. 그것이 당시의 시류였다. 그러나 바울은 그 시류를 따르지 않았다. 그로 인해 온갖 모함과 불이익도 당했다. 그래도 바울은 시류를 거스르는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어떻게 그런 삶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고린도 후서 2장 17절을 다시보자.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바울은 오직 ‘순전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헬라어 명사 ‘에일리크리네이아’는 ‘순수함과 온전함’이다. ‘순수함과 온전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려는 불순물을 방어하고 분쇄하는 최상의 방패이자 무기이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순수함과 온전함’을 항상 견지한 것은, 그 말씀이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것’ 이었기 때문이다. 로고스이신 ‘하나님께 받은’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 당신이셨다. 그래서 바울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바울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 수많은 도시를 돌아다니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 대상은 모두 사람들이었다. 만약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마다 그의 시선이 자기 앞에 운집한 사람들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면, 罪性을 지닌 인간인 바울역시 그들의 열망과 인기에 영합하거나, 그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야망을 성취하기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물을 섞어 얼마든지 ‘혼잡하게’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마다 자기 앞에 운집한 사람들을 보기이전에, 그곳에 임해 계신 하나님을 먼저 보았다. 자신이 전하려는 하나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기에, 바울은 그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말씀을 전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그 말씀에 자기 유익을 위해 불순물을 섞는 것은 바울에게는 상상조차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 그리스도셨다. 그래서 바울은 그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마다 어찌 자기부인(自己否認)이 선행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온갖 모함과 불이익을 당할지언정, 대부분의 목사들이 자기 야욕의 충족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물 섞기를 당연시하던 당시의 시류를 단호하게 배격한 것은, 그에게는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당연히 실행해야 할 영적 의무였다.

바울은 또 고린도후서 4장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은혜와 긍지를 설명하면서, 당시의 짝퉁 목사들과 상반된 자신의 자세를 다시 한 번 천명하였다.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고후4:2).

우리말 성경에는 바울이 본문에서 고린도후서 2장 17절의 내용, 즉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았다는 증언을 되풀이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 헬라어 원문에 의하면, 바울이 본문에서 사용한 동사는 고린도 후서 2장 17절의 ’카펠류오‘가 아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사용한 동사는 ‘돌로오’이다. 이 동사는 ’올무를 놓다‘, ‘미끼를 삼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즉 바울은,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야욕의 충족을 위한 미끼로 이용한 적이 없다고 밝힌 것이다. 이것은 당시 대부분의 목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야욕을 성취하기 위한 미끼로 이용하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하고 가르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동떨어진 그들의 삶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야욕의 충족을 위한 미끼로 사용해왔음을 스스로 입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단 한 번이라도 그렇게 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본문의 2장 17절의 관점으로 주석을 덧붙이자면, 바울은 이렇게 말한 셈이다.

“우리는 대부분의 목사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끄러운 일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교를 꾸민 적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자신의 야욕을 충족하기 위한 미끼로 이용한 적도 없습니다. 우리는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있는 그대로 전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의 양심 앞에나 우리 자신을 언제나 떳떳하게 내세울 수 있습니다.”

바울의 이 고백 역시 ‘하나님께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전하는 ‘순수함과 온전함’이 있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모세가 자신의 생을 걸기까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던 것 역시, 그 명령이 ‘하나님께 받은’ 명령이기에, 그 명령을 내리신 ‘하나님 앞에서’, 그 명령에 대한 ‘순수함과 온전함’을 견지한 까닭이다. 그 ‘순수함과 온전함’을 상실한 아론이 자기 영달을 위해 하나님을 금송아지로 왜곡하고, 이천 년 전 바울 당시 대부분의 목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야욕을 위한 미끼로 이용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대는 어떤가? ‘하나님께 받은’ 하나님 말씀의 ‘순수함과 온전함’을 견지하는 모세형 목사인가, ‘순수함과 온전함’을 벌써 상실한 아론형 목사인가?

빛이요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는 반드시 어둠의 반발이 있기 마련이다. 모세를 비롯하여 성경에 등장하는 말씀의 증인들이 세상의 모함과 박해와 시련에 직면해야 했던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비윤리적이고 부도덕한 언행 탓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고 살아낸다는 이유로 어떤 형태로든 모함과 박해와 시련을 당해본적이 있는가? 한 번도 없었다면 그것은 그대가 모세형 목사가아니라. 그대의 영달을 위해 금송아지를 하나님이라 우기는 아론형 목사로 살아왔기 때문인 것은 아닌가?

선지자 예레미야가 이렇게 탄식하지 않았던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8-9).

예레미야는 위대한 선지자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그를 이스라엘 백성이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는 예레미야를 이스라엘 백성은 날마다 치욕과 모욕으로 조롱하였다. 예레미야는 그럴 바에야 차라리 침묵하기로 작정하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의 마음은 마치 불붙는 것처럼 답답하여 견딜 재간이 없었다. 예레미야에게는 하나님 말씀의 선포가 초래하는 육체적 고통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침묵이 수반하는 영적 고통이 더 컸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려는 자신의 안일을 부인하고, 자기 생명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는 영적 의무를 다했다. 그러나 당시의 선지자 무리는, 예레미야가 예언한 예루살렘 멸망 직전까지도 대중이 원하는 거짓 평화와 번영을 외쳤다. 자기 생명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한 예레미야가 모세형 목사였다면, 대중의 요구에 영합하여 거짓 평화와 번영을 약속한 선지자 무리는 모두 아론형 목사들이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모세형 목사와 아론형 목사는, 출애굽기에서 시작하여 구약 선지자 시대를 거쳐 신약의 바울 시대까지 계속 이어졌다.

절대다수의 목사는 늘 아론형 이었다. 그렇다면 그 어느 때보다 황금만능의 시대인 오늘날에야 두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대는 그대의 영달을 위해 하나님을 금송아지라 우기며 교인들을 이용하는 아론형 목사인가, 교인들의 오해와 모함을 살망정 금송아지를 박살내고 교인들을 꾸짖어서라도 언약의 땅으로 인도하는 모세형 목사인가? 결코 잊지 말라. 수많은 교인들이 자신의 영달을 꾀하는 아론 형 목사들의 현란한 說敎에 현혹당해도,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절대로 속지 않으신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의 예언하는 선지자들에게 경고하여 예언하되 자기 마음대로 예언하는 자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어리석은 선지자에게 화가 있을 진저 이스라엘아 너희 선지자들은 황무지에 있는 여우같으니라 너희 선지자들이 성 무너진 곳에 올라가지도 아니하였으며 이스라엘 족속을 위하여 여호와의 날에 전쟁에서 견디게 하려고 성벽을 수축하지도 아니 하였느니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하는 자들이 허탄한 것과 거짓된 점괘를 보며 사람들에게 그 말이 확실히 이루어지기를 바라게 하거니와 그들은 여호와가 보낸 자가 아니라

너희가 말하기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하여도 내가 말한 것이 아닌즉 어찌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된 점괘를 말 한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너희가 허탄한 것을 말하며 거짓된 것을 보았은즉 내가 너희를 치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13:1-8). (이재철목사, “목사 그리고 목사직”,P51-84인용).

글을 마치며...
여러해 전, 교단까지 소문난 분쟁지방의 감리사에게 염려의 전화를 한 적이 있다. 그 지방에 성경 연구에 탁월한 분들이 셋이나 되는데 잘 안 되는 거요? 그의 대답이. “목사님, 우리지방은 그분들 때문에 더 복잡 합니다.” 한동안 그 대답이 생각 속에 맴돌았다...



전체 5

  • 2021-02-23 19:24

    오목사님께,
    긴글을 올리신 그 심정을 반에 반에 반에 반에 반에 반에 반에 반에 반에 반에 반에 반에 반에 반에 반에 반에 반에 반에 반 만이라도 감리회원들이 공감한다면...... 아론은 대중들을 바라보는 정치인이었고, 모세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선지자였습니다. 아론처럼 군중들의 평판, 환호성, 박수소리, 불평에 따라 반응하는 것은 정치인들의 특징입니다.


  • 2021-02-24 07:21

    장로님!
    A4용지 12장의 장문의 글을 일명 독수리 타법으로
    긴 시간을 기도하며 정리하여 올린 것은...

    본문 내용처럼 그가 누구든 자신의 영혼의 때를 위 하여는, 우선 말씀대로
    自己否認이 전제 된 후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셨습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어떤 대상에 대한 아픔과 감정까지도...

    이것이 그리스도의 시선을 의식하는 이들의 기본 신앙이 아닐까요?
    관심 감사드리며 제 글은 아니지만 다시 한 번 깊이 숙고 해 주십시오.
    주님 안에 보다나은 성장을 위하여 기도드렸습니다.


    • 2021-02-24 09:12

      목사님께서 다시 살펴보라고 하시고, 평소에 강조하신 자기성찰과 위에 自己否認에 대하여 생각하건데, 긴 글을 읽고 이를 소화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서 압박과 부담이 됩니다.

      출31:1~7에서 ‘아론’ 같은 타락한 종교 지도자의 행태는 ❶ 사람의 말을 듣고 ❷ 새로운 신을 만들고 ☞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하고, 몰몬교, 이슬람교 등과 같은 이단신을 새로 만듭니다. ❸ 금을 모으고 ❹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들고 ☞ 조각과 주상으로 도배한 종교들이 많이 있습니다. ❺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 송아지가 신이 될 수 없으며 ❻ 제단을 만들고, ☞ 유럽과 중남미에선 한 성당 안에 제단이 여러개 있다 ❼ 여호와의 절일 ☞ 절기를 제 멋대로 만듭니다. ❽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 종교적 예배도 합니다. ❾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 축제.. 이런 일들을 보시고 하나님은 이를 「부패」라고 정의하십니다. (7절) ☞ ‘부패’는 요샛말로 “썩었다.” 혹은 "맛이 갔다."로 바꿀 수 있습니다.

      출애굽에서 백성들은 끊임없이 불평을 했습니다. 마실 물, 음식.. 성경에는 10가지 불평들의 순서와 내용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모세는 40년 왕궁과 40년 미디안 광야에서 지도자가 되는 특수 훈련을 받았지만 이런 환경을 견디기 너무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소문난 분쟁이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저는 개인적으로 지지하지 않지만, 칼뱅주의 TULIP에서 T는 'Total Depravity 전적 타락'을 차용하는데. 다 썩으면 자정 능력 자체를 잃고 한 축을 형성해 아무도 해결하지 않게 됩니다. 모세의 자리에 '아론'이 앉아 있거나, 다 아론이거나 혹은 아론이 다수이면......


  • 2021-02-24 10:32

    장로님!
    거대한 다이아몬드의 原石을 소유함은 행운이고 축복입니다.
    그러나 탁월한 寶石細工師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그저 돌(石)일 뿐.

    장로님께서도 스펙은 남다르신데, 좋으신 영적 대가를 찾고 만나십시오.
    생의 보람과 敎會, 주변의 많은 이들을 부요케 하시기를 기도드리겠습니다.
    자신에게 恩賜를 허락하신분의 섭리를 발견하십시오.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 샬 롬 -


  • 2021-02-24 14:32

    모세는 영적 지도자로서 목사의 본으로 봄이 타당하다 생각을 합니다.
    반면 아론은 영적 협력자로서 목사가 아닌 장로나 권사 정도로 봄이 타당하다 생각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영적 지도자와 협력자를 함께 한 인물이니 목사라 할 수도 있고 장로, 권사 기타의 직분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생각을 합니다. 신약의 시대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그때 그때마다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사역이 달라진다고 생각을 합니다.
    영적 지도자가 필요한 때는 영적 지도자로서 사역을 감당하고 영적 협력자가 필요하다면 영적 협력자로서 그 사역을 감당하며 그리스도의 몸 된 성전을 섬기는 한 지체의 사역에 최선을 다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감화 감동 하심이 있기를 구하는 은혜의 시기인 것입니다.

    여기 감게를 보십시요.
    장로만도 못한 목사가 부지기 수이며 목사보다 더 나아 보이는 장로님들이 몇몇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목사라 하여 모세형 목사라 할 것이 아니며, 장로라 하여 무조건 아론형 목사(?)라 할 수는 없는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저는 모세형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모세의 형은 아론 입니다. 그런데 아직 어리석어서 아론의 형은 누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오재영 목사님은 스스로 어느 형 목사에 해당한다 판단을 하시는지요? 궁금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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