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여러분께.
현재 ‘감리회소식’이 ‘자유게시판’처럼 사용되고 있습니다.
정치적 입장표명이나 감리회정책과 관계되지 않은 내용 등
‘감리회소식’과 거리가 먼 내용의 글은 ‘자유게시판’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26회: 사.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 I(3:14-17)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20-10-20 13:50
조회
195
그리스도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시는 편지는, 【14】[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로 시작된다.
[라오디게아](Λαοδικείᾳ)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가 당시에 여섯 곳이나 있었다. 여기의 라오디게아는 소아시아 서부 브루기아 지방의 주요한 성읍이었는데, 빌라델비아에서 동남쪽으로 약 72㎞, 에베소에서는 동쪽으로 약 160㎞ 떨어진 곳이자 리쿠스(Lycus) 계곡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 북쪽으로 약 10㎞ 떨어진 곳에 히에라볼리가 있고, 남쪽으로 약 14㎞ 떨어진 곳에 골로새가 있었다. 인접해 있는 이 도시들은 예로부터 자매 도시로 알려졌다(참조: 골 4:13, 16).
이 도시는 처음에는 수호신 제우스(Zeus: 올림푸스 산의 최고의 신으로 로마 신화의 Jupiter에 해당됨.)를 모시는 곳이라고 해서 디오스폴리스(Diospolis)라고 명명했으나, 후에 로아스(Rhoas)라고 불렀다.
수리아의 안티오쿠스 2세 테오스(Antiochus II Theos: 주전 261-246)가 건설하였고, 자신의 처인 라오디케(Laodice)의 이름을 따라 라오디게아라고 명명하였다. 안티오쿠스 3세(주전 242-189)는 많은 유대인(석방된 성인 7,500명)을 여기에 식민시켰다.
라오디게아는 빌라델비아와 마찬가지로 헬레니즘 문화의 보급을 지향(志向)했으며, 다른 헬레니즘 도시와 마찬가지로 신전, 극장, 열주가로(列柱街路)로 장식되어 있었다. 라오디게아는 주전 133년에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에게 해와 유브라데 강을 잇는 대 통상로를 끼고 있는 유리한 지리적 조건으로 상업 도시로서 번성하여 금융의 한 중심지가 되었다. 라오디게아에 금융 자산이 대단했다는 사실은 키케로[Cicero: 주전 106-43. 로마의 정치가이며 철학자]가 거액의 신용장을 이 도시에서 현금으로 바꾸었다는 사실에서 증명된다. 이 도시는 주후 60년의 대지진으로 파괴되었을 때에 로마 황제의 지원을 거절하고, 독력으로 재건했을 정도로 부유하였다. 또한, 라오디게아는 산업 중심지로서, 특히 직물 제조 판매로 유명하였다. 이 지역에서는 부드럽고 광택 있는 검은 염색이 불필요한 양모를 산출하는 양을 사육하며, 그 양모로 비싼 모직물을 짰다(3:18 참조).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성읍 서쪽 19㎞의 앗툿다(Attudda)에는 치료와 관련된 특별한 신인 멘 카루(Men Karou: 후에 아스클레피우스로 밝혀짐)의 아름다운 신전이 있었고, 거기에서 가까운 곳에 유명한 의학교가 있었다. 거기서 ‘브루기아 가루’로 알려진 눈과 귀의 영약을 제조하여 팔고 있었다(참조: 3:18). 신전 근처에는 모든 종류의 상품을 거래하는 시장이 있었다. 이 도시에서도 최고의 신인 제우스(Zeus)가 숭배되었다.
현재 터키의 성읍 데니즐리(Denizli)의 서쪽 부근에 있는 에스키 힛사르(Eski Hissar: ‘옛 성’)라 불리는 한 촌이 고지(古址)라고 한다.①
이 곳 교회는 바울이 설립한 것이 아니고, 그의 동역자들, 특히 에바브라에 의해 목양 사업이 행해졌다(골 4:13). 바울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편지를 보내어, 이것을 골로새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골로새 교회로 보낸 편지도 받아 보라고 권고하고 있다(골 4:16).
[교회](에클레시아스, ἐκκλησίας)와 [사자](앙겔로, ἀγγέλῳ)는 1:20의 주석을 보라.
[아멘이시오]의 [아멘]은 1:6의 주석을 보라.
[충성되고 ‘참된’(3:7의 “진실하사”의 주석을 보라.) 증인이시오]는 1:5의 주석을 보라.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ἡ ἀρχὴ τής κτίσεως τού θεού)는 ‘하나님의 맨 처음의 창조물’로 번역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창조의 근원 곧 창시자’로 번역할 수도 있다.
아리우스(Arius)는 이 표현과 골로새서 1:15의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를 근거로 하여, “홀로 아버지만이 진정한 신적 존재이며 아들은 피조자에 지나지 않는다.…아들은 존재하지 않은 때도 있었다.”②라고 주장하지만, 성경 어느 곳에서도 아들이 창조되었다고 하는 표현은 없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 참조: E. J. Banks, “Laodicea” in ISBE, Vol. III, p. 1836. A. Barnes, A. Johnson, A. Barnes, W. Hendriksen, W. Barclay, G. E. Ladd, H. Kraft, 黑崎幸吉, 이상근, 박윤선, 김철손, 요한계시록.
2) J. L. Neve, 기독교 교리사, 서남동 역(서울: 기독교서회, 1974), p. 187.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거의 모든 주석가들은 후자를 취한다.③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 즉 만물의 창시자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적합한 해석은 골로새서 1:15 이하의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④이다.
우주 만물의 창조자요 주관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15】[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라고 책망하셨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오이다, οἶδά)는 2:2의 주석을 보라.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세상에 속하거나 타협하여 적극적으로 교회를 반대하거나 핍박하지도 않고, 사랑이 핵심인 복음적 신앙을 위한 뜨거운 열정도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세상에 속했다고도 할 수 없고, 하나님께 속했다고도 할 수 없는 영적 회색분자들이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3) J. Wesley, H. Alford, A. Clarke, A. Barnes, A. Plummer, “Moffatt”(in R. H. Mounce), “Lightfoot”(in R. H. Charles), C. L. Morris, R. C. H. Lenski, W. Barclay, R. H. Mounce, P. E. Hughes, J. F. Walvoord, M. Rist, R. H. Charles, M. C. Tenney, A. Johnson, C. R. Erdman, G. E. Ladd, 黑崎幸吉, 이상근, 박윤선, 김철손, 요한계시록.
4) 필자의 골로새서 1:15-18의 주석을 보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김철손 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는 물질적 번영과 정신적 태만이 겹쳐서 신앙 태도가 아주 해이해졌다. 교인들은 대체로 영적 은혜에 대한 갈망과 욕구를 가지지 못했으며, 죄에 대한 심각성이나 회개에 대한 절박감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⑤라고 하였다.
존슨(A. Johnson)은 “라오디게아 북쪽 11㎞[약 10㎞]에 위치한 히에라볼리에는 유명한 온천이 있었는데, 이 온천은 라오디게아 남쪽에 위치한 유사한 온천과 함께 공급되는 물의 온도에 영향을 준 것 같다.…‘차다’는 것은 16㎞[약 14㎞] 조금 못 되는 골로새 지방의 냉수를 언급한 것이라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는 그리스도께서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둘 중 어느 한 상태가 되도 상관없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미지근한 상태를 질책하는 것인 동시에 열정적인 믿음으로 살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덥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16】[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라고 경고하셨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히에라볼리로부터 끌어온 온천수와 골로새로부터 수로를 통해 가져온 찬물을 공급받는 과정에서 물이 미지근하게 됨으로 식수로 사용하기에는 부적합하여 마시는 자마다 토하여 버렸다”(강병도 편). 그와 같이 영적으로 미지근한 신앙 상태에 빠져 있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그리스도께서 혐오하여 버리시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에 대해, 그리스도께서는 【17】[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라고 책망하셨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이 없는 부자라고 말한다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으로나 영적인 은사와 능력으로나 부족한 것이 없는 부자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물질적인 부요와 영적인 부요를 혼동하고 있었던 것 같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5) 김철손, 요한계시록.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물질적으로는 부유하나 영적으로는 빈곤한 라오디게아 교회는, 물질적으로는 빈곤하나 영적으로는 부요한 서머나 교회(2:9)와 대조적이다.
그런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는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라고 책망하셨다.
[곤고한 것]은 탈라이포로스(ταλαίπωρος)이며 ‘곤란’, ‘신고’, ‘압제’, ‘고통’, ‘비탄’, ‘참경’, ‘불행’ 등을 뜻한다. 이 낱말은 {괴로움을 당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Schlatter). “이 낱말은 비참한 것을 뜻하며, 모든 면에서 불행에 의해 타격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Bauer)}(롬 7:24의 주석).
[가련한 것]은 엘레에이노스(ἐλεεινὸς)이며 ‘불쌍한 것’, ‘가엾고 불쌍한 것’을 의미한다.
[가난한 것]은 물질적인 빈곤이 아니라 영적 빈곤을 의미한다.
[눈먼 것]은 육안이 먼 것이 아니라 영의 세계를 볼 영안이 먼 것을 의미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라오디게아에는 의학교가 있었고, 좋은 안약이 있었지만, 그 교인들은 영적 시력을 상실한 상태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신령한 것을 분별할 수 없었다.
[벌거벗은 것]은 영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로 옷입지(갈 3:27)⑥ 않았거나, 그로 인한 의나 순결이나 승리의 흰옷을 입지 않은 상태를 묘사한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라오디게아는 광택 있는 검은색 양모로 짠 값비싼 직물로 유명했지만, 그 교인들은 영적으로 벌거벗은 상태이었다.
이처럼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멸망 상태라 할 정도로 영적 지각이 마비된 매우 심각한 상태이었는데,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들이 그런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었다(마 13:13).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6) 필자의 갈라디아서 3:27의 주석을 보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출처: 최세창, 요한계시록(서울: 글벗사, 2005, 1판 1쇄), pp. 150-155.

필자의 사이트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 신약 주석(마~계, 1-15권)/ 설교집 28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다수의 논문들/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요한계시록.JPG

20201020_133207.jpg



첨부파일 : 요한계시록.JPG
첨부파일 : 20201020_133207.jpg
전체 4

  • 2020-10-20 22:50

    소개하신 다양한 견해와 더불어 깊이 있게 해설하신 내용에서 잘 배우고 있습니다.

    ☞ 계 3:14, 소아시아 일곱 교회가 모든 교회의 예표라고 할 때, 한국의 많은 교회는 라오디게아에 가까우나 전체가 일률적이지 않다고 봅니다.

    ☞ 15절, 이는 하나님과 재물, 하나님과 세상, 하나님과 사람 가운데 선택하지 못하는 신앙을 말한다. 한 발은 하나님께, 다른 발은 세상을 향하고 있습니다. 신앙을 지옥에 가지 않는 보험으로 여기고 주일 예배와 헌금생활을 하면서 스스로 위로합니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약 1: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약 4: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대상 12:33) 스불론 중에서 모든 무기를 가지고 전열을 갖추고 두 마음을 품지 아니하고 능히 진영에 나아가서 싸움을 잘하는 자가 오만 명이요 (시 12:2) 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 (호 10:2) 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뜨리시며 그 주상을 허시리라

    ☞ 16절, “토하여 버린다.”는 버림받고 추방된다는 의미이며, 이스라엘 땅이 그 거주민들을 토했을 때 2000년 동안 그들은 약속의 땅에 거하지 못하고 나라 없이 세계를 떠돌아 다녀야 했습니다. 이를 성경에서 찾아보면 (레18:28) 너희도 더럽히면 그 땅이 너희가 있기 전 주민을 토함 같이 너희를 토할까 하노라 (20:22) 너희는 나의 모든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여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거주하게 하는 땅이 너희를 토하지 아니하리라.

    ☞ 17절, 그 스스로는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 하므로 물질의 풍요에 만족하고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모르는 상태라고 하십니다. 이는 재물을 가치에 두고 성패를 스스로 판정하나 이는 육적인 것, 세상적인 것, 마귀적인 것에 해당합니다. 그들은 영적인 세계를 모릅니다.


    • 2020-10-21 14:00

      필자의 요한계시록 연재에 계속 관심을 보이시고, "소개하신 다양한 견해와 더불어 깊이 있게 해설하신 내용에서 잘 배우고 있습니다."라고 하셔서 감사합니다. 또, 관련하여 의견을 피력하셔서 감사합니다.


  • 2020-10-20 23:23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 요한게시록 (3:14-17)
    주신 말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2020-10-21 14:01

      필자의 요한계시록 연재를 잘 읽었다고 하셔서 감사합니다.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공지사항 관리자 2014.10.22 64161
공지사항 관리자 2010.12.29 62210
13787 함창석 2024.03.28 15
13786 최세창 2024.03.27 59
13785 홍일기 2024.03.25 101
13784 홍일기 2024.03.25 109
13783 최세창 2024.03.23 75
13782 최세창 2024.03.18 286
13781 엄재규 2024.03.18 307
13780 함창석 2024.03.11 381
13779 민관기 2024.03.01 417
13778 홍일기 2024.02.28 420
13777 함창석 2024.02.26 594
13776 홍일기 2024.02.23 399
13775 최세창 2024.02.22 354
13774 장병선 2024.02.21 721
13773 양계승 2024.02.21 832
13772 함창석 2024.02.20 317
13771 홍일기 2024.02.19 404
13770 홍일기 2024.02.18 393
13769 이현석 2024.02.15 514
13768 홍일기 2024.02.11 4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