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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21회: 라.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편지 I(2:18-20)

작성자
최세창
작성일
2020-09-25 16:19
조회
277
그리스도께서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시는 편지는, 【18】[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로 시작된다.
[두아디라](Θυατίροις) 성은 {소아시아의 서쪽이자 버가모의 동남쪽 60㎞ 헤르무스 강(R. Hermus: 터키 이름은 Gediz Chai)의 지류 리코스 강(R. Lycus: 터키 이름은 Gordes Chai)의 북방에 펼쳐져 있는 기름진 평야에 위치하며, 버가모와는 간선 도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고대의 루디아(Lydia) 지방의 성읍인데, 오늘날 터키의 성읍 아키사(Akhisar)이다. 신약성경에서는 바울의 전도를 받아들인 자주 장사 루디아의 거주지로 언급된 사도행전 16:14 외에 세 군데에 언급되었는데 모두 두아디라 교회에 관련되었다(1:11, 2:18, 24).
이 희랍풍의 성읍은 셀레우쿠스 1세(Seleucus I: 주전 312-280)가 설립하여 마게도냐의 졸병들을 식민시키고, 또 유대인도 식민시켰다. 주전 190년에 셀레우쿠스 왕조의 지배가 끝난 다음에, 버가모 왕국이 주전 133년까지 지배하였고, 그 후에 로마가 통치하였다.
두아디라는 중요한 통상로가 있었기 때문에 상공업 도시로 발달하게 되었다. 두아디라에서 출토된 비문에 의하면, 여기에는 여러 가지 동업 조합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구리 세공, 피혁 가공, 염색,ⓛ 양모 방적, 아마포 등 업자의 조합이 있었다. 이 땅은 소아시아에 있어서 어느 성읍보다도 일찍 동업 조합이 조직되어 발전되었다고 한다.}(행 16:14의 주석).
두아디라는 태양신인 아폴로(Apollo Tyrimnaios)의 도시로 유명했으며, 그 외에 아데미(Artemis: 달의 여신이자 처녀성과 수렵의 수호신으로 로마의 Diana에 해당됨)와 삼바다(Sambatha) 등의 신전이 있었다.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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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 M. Ramsay, op. cit., pp. 316-326. 특히, 자주색 염색천으로 유명했다. (in W. Hendriksen).
2) 참조: A. Johnson,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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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클레시아스, ἐκκλησίας)와 [사자](앙겔로, ἀγγέλῳ)는 1:20의 주석을 보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은 1:14-15의 주석을 보라.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ὁ υἱὸς τού θεού)이시라는 것은 {초대 교회에서 영화된 은유나, 죽을 운명인 인간이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적 기원”(A. Clarke) 또는 “예수님의 신성”(R. Earle)을 강조하는 것이다. 존슨(S. E. Johnson)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며, 또 가장 주목할 만한 사실은 모든 복음서들이 유대 문학과 대조적으로 메시아가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을 강조한다.”라고 하였다.}(막 1:1의 주석).
성부와 성자의 관계는, 성부와 성도의 관계에 비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헨리(M. Henry)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하고 유일한 아들로서 신적 본질을 공유하는 이시다. 이것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③라는 견해와 같으며, 또한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골 1:15)④과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히 1:3)⑤이라는 말과도 같은 의미이다.}(엡 1:3의 주석)라고 하였다.
결국 성부와 성자는 본질이나 속성에 있어서 동등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자는 피조물이 아니라 영원부터 아들로서 존재하신 하나님이시다.
{포시트(P. T. Forsyth)는 “하나님은 직접적으로는 그리스도만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은 독생자만 있으시고, 많은 자녀들은 유일한 아들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녀들이다.”라고 하였다.}(요일 1:2의 주석).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가라사대 【19】[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라고 칭찬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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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필자의 요한복음 1:1의 주석을 보라.
4) 필자의 골로새서 1:15의 주석을 보라.
5) 필자의 히브리서 1:3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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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은 에베소 교회가 칭찬 받은 내용 중 하나인 “행위”(2:2의 주석을 보라.)와 똑같은 말이다.
[사랑]은 아가펜(ἀγάπην)이며 인간에게서 비롯되는 자연적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는 하나님의 본질적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사랑의 본질 및 속성에 관한 구체적인 주석은 필자의 고린도전서 13장의 주석을 보라). 여기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와 관련된 인간의 사랑을 논해야 할 것이다.
요한일서 4:10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라고 사랑에 대해 간결하면서도 심오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⑥ 즉, 사랑이란 받을 자격이 없는 상대에게 상대의 요구대로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상대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공로나 선행의 대가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형벌이 마땅한 대가일 수밖에 없는 죄인들에게 화목제로 그 아들을 주신 것이 곧 사랑이다.
화목제로 주셨다는 말씀에서 우리는 참된 사랑이란 진리와 정의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고전 13:6)⑦과, 또한 사랑은 상대의 조건과는 상관없이 스스로 분출하는 본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 놀라운 사랑은 인간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은 하나님과 인간을, 더욱이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
인간이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대상을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에 부어져야만 하는 것이다(롬 5:5, 15:30).⑧ 그러한 의미에서 이런 사랑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것이다(딤전 1:5).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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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필자의 요한일서 4:10의 주석을 보라.
7) 필자의 고린도전서 13:6의 주석을 보라.
8) 필자의 로마서 5:5의 주석과 15:30의 주석을 보라.
9) 필자의 디모데전서 1:5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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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사람이 수행해야 할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막 12:28-34).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요(요일 5:3), 더 나아가 전 생명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실상 이웃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시금석이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일환인 것이다(요일 4:12, 20, 21, 5:2).
모든 사람은 그 자신이 느끼고 있든지 없든지 상관없이 영적인 면에나 정신적인 면, 또는 육체적인 면에나 물질적인 면에서 결핍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 그들의 결핍을 채워 줌으로써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사랑에 있어서 명심해야 할 것은 필요한 사람에게 줄 것이 있느냐 함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은사와 복을 받아야 할 이유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와 복을 주시는 목적이다.
사랑에 있어서 명심해야 할 또 한 가지 사실은 남을 사랑할 조건이 완벽하게 구비된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며, 또한 남을 사랑할 조건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가 오는 대로 현재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최대의 사랑이란 영생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하는 것이다(행 3:1-10).
하나님 또는 인간을 사랑할 때, 우리의 사랑의 행위를 자기 의나 공로로 생각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았고, 또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모든 소유와 지체 그리고 생명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사랑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은 자들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부터 실천되지 않으면 안 된다(참조: 갈 6:10).
사랑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요(마 22:40), 율법의 성취요(롬 13:8), 율법의 완성이요(롬 13:10), 최고한 법이요(약 2:8), 예수님의 새 계명(요 13:34)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믿음]은 2:13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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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김]은 디아코니안(διακονίαν)이며 ‘사도직’, ‘직무’, ‘봉사’, ‘봉사하는 일’, ‘종의 일’ 등을 의미한다.
[인내](휘포모넨, ὑπομονήν)는 1:9의 “참음”의 주석을 보라.
[아노니]는 2:2의 주석을 보라.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는 두아디라 교회가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와 달리,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 등의 행위에 있어서 나중이 처음보다 더 많다는 것이다. 이 말은 질적인 면에서 진보하고 향상된 것을 내포하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두아디라 교회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책망하신다. 【20】[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선지자](프로페틴, προφήτιν: 여선지자)에 대해 헨드릭슨(W. Hendriksen)이 어원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πρό(프로: ‘앞으로’, ‘밖으로’)와 φημί(페미: ‘말하기’)가 결합된 말이다.······그리고 선지자(예언자)가 앞을 향해, 또는 밖을 향해 말하거나 공공연히 선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마음이다. 그는 선포자이지, 반드시 예고자인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예언을 멸시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다.}(살전 5:20의 주석). 선지자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역할을 하는 자들이므로 그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들은 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신 18:19, 20).
신약 시대의 예언자(선지자)에 대해서 {렌스키(R. C. H. Lenski)는 “예언과 예언자는 이미 계시된 구원의 진리를 가장 적절하게 전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언자는 교사이기도 하며, 전도자요 목회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는 아가보와 빌립의 딸들(행 21:9-10)과 같은 예언자들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장차 오는 사건에 관한 여러 가지 계시를 전달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구약성경의 예언자는 물론, 신약성경의 사도들보다 하위에 위치한다. 그들의 기능은 부수적이며, 그들의 계시는 어쩌다 있었으며, 또한 그 숫자에 있어서도 소수에 불과하였다.”라고 설명하고 있다.}(엡 2:2의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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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는 단순히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기계적 존재가 아니라, 계시의 본질적 사명과 깊은 연관이 있는 인격적 존재이다. 이 점은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암 3:7)라고 하신 말씀과,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신 18:18. 참조: 삼하 23:2)라고 하신 말씀 등에서 분명해진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전할 예언자를 일시적이며 기계적인 도구로 취급하시지 않고, 먼저 그를 불러 인격적 만남을 통해 사명자로 세우시고, 그의 개성과 재능과 언행으로 말씀을 전하게 하셨다.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에 대해 (1) 빌립보에서 바울의 복음 설교를 듣고 기독교로 개종(행 6:14-15)하기 전에 두아디라에서 이세벨의 영향을 받고, 그녀의 수하 노릇을 한 자주 장사 루디아라는 설,⑩ (2) 이세벨과 발음이 비슷하다는 점을 들어 바벨론의 신 시빌레(Sybylle)라고 하는 설(Schrer),⑪ (3) 이 도시의 삼바타(Sambatha) 신전의 주인공인 무녀(巫女, 여자 점쟁이) 삼바테(Sambathe)라는 설,⑫ (4) 알렉산드리아 사본의 본문에 “네 아내 이세벨”이라고 된 점을 들어 두아디라 교회의 어떤 감독이나 지도자(목사)의 아내라는 설(J. Wesley, “Zahn”,⑬ H. Alford), (5) 이세벨로서 대표되는 정신 또는 주의라는 설(黑崎幸吉), (6) 상징적 이름으로 이세벨과 같은 성격이나 행동을 한 어떤 여인이나 집단이라는 설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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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in M. Henry, 이상근, 김철손, 요한계시록.
11) in 박윤선, 이상근.
12) in W. Barclay, 김철손, 요한계시록.
13) in 박윤선, 이상근.
14) H. Alford, “Vincent”(in 이상근), A. Barnes, R. H. Charles, W. Barclay, C. R. Erdman, H. Kraft, J. F. Walvoord, G. E. Ladd, 박윤선, 이상근. 비교: A. Johnson은 이 여자와 그녀를 따르는 자들(2:22)을 구별한 점을 들어 교회 안의 집단은 아니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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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설과 (2)설은 그렇게 혼동할 이유가 없고, (3)설은 뒷받침할 만한 근거가 없고, (4)설은 그 사본의 가치가 떨어지는데다가 그렇게 해석할 근거가 없고, (5)설은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라고 했으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 대다수 학자들의 견해인 (6)설을 취해야 할 것이다.
두아디라 교회는,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드러낸 에베소 교회(2:2)와 달리,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잘못된 관용심으로 [용납]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가짜 선지자인 여자 이세벨의 성격과 행실은 실제 인물인 이세벨을 미루어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두로의 공주였던 이세벨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아합 왕과 결혼한 왕후로서 본국인 두로에서 바알 종교를 도입하였다. 바알 종교의 광신자인 이세벨은 온 이스라엘을 유혹하여 여호와 신앙으로부터 이교인 바알 종교로 타락시켰다. 이 생산신인 바알 숭배는 자연스럽게 음행으로 연결되었다(참조: 민 25:1-5).
또한, 이세벨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방해했고(왕상 16:31, 18:4, 19, 21:25, 왕하 9:30), 예언자들을 죽였으며(왕상 18:4, 13, 왕하 9:7), 엘리야를 박해했는데(왕상 19:2), 결국 내시에 의해 창 밖으로 던져져서 비참하게 죽었고, 엘리야의 예언대로 그 두개골과 손발을 제외한 시신은 개들의 먹이가 되고 말았다(왕하 9:32-37).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는 특히, 두아디라 교회의 특수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두아디라는 여러 가지 동업 조합이 조직되어 발전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동업 조합들은 우상 숭배와 관련되어 있었다. 각 조합마다 수호신인 우상들을 갖고 있었으므로, 당시의 사회 상황에서는 출세하려면 조합에 가입해야 했고, 조합 회원이 되려면 수호신인 우상들을 숭배하도록 되어 있었다. 조합 회원은 조합에서 갖는 제사 의식에 참례하여야 했으며, 그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물들을 우상이 내린 선물로 여겨 먹어야 했다. 그리고 식사가 끝나면 이내 즐거운 행사인 문란한 음행이 벌어지는데, 핍박과 웃음거리의 대상이 되지 않으려면 그 자리에서 퇴장해서는 안 되었다”(W. Hendriksen).
두아디라 교인들은 조합에 가입하지 않거나 조합에서 탈퇴하면 사회적 지위는 물론, 직장을 잃게 되고, 조롱과 핍박을 받게 되고, 조합에 충실하면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 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와 같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두아디라 교인들을,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이 가르쳐 꾀어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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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세창, 요한계시록(서울: 글벗사, 2005, 1판 1쇄), pp. 123-130.

필자의 사이트 newrema.com(T. 426-3051)의 저서: 신약 주석(마~계, 1-15권)/ 설교집 28권/ Salvation Before Jesus Came/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 난해 성구 사전 I, II권/ 바울의 인간 이해/ 바울의 열세 서신/ 다수의 논문들/ 우린 신유의 도구/ 눈솔 인터넷 선교/ 영성의 나눔 1, 2, 3, 4권/ 영성을 위한 한 쪽/ 눈솔 예화집 I, II. (편저)/ 웃기는 이야기(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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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4

  • 2020-09-25 22:16

    계시록의 소아시아 일곱교회에 대하여 일정한 형식을 가지고 각각 1. 교회이름, 2. 교회의 그리스도, 3. 칭찬과 위로, 4. 책망, 5교훈과 경고, 6. 약속 등이 순서대로 기술되어 있기에 같이 비교하는 것도 좋은 공부 재료가 된다고 보며,

    두아디라 교회에서는;
    1. 교회이름: (18a)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2. 교회의 그리스도: (18b)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3. 칭찬과 위로: (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4. 책망: (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이세벨은 구약에서 등장하나 여기에 다시 등장합니다. 영적 세계와 작동하는 원리는 창세부터 계시록까지 변하지 않는 거로 사료됩니다.


    • 2020-09-25 22:32

      필자의 요한계시록 연재에 계속 깊은 관심을 보이시고, 관련하여 의견을 피력하셔서 감사합니다. 피력하시는 글을 자세히 읽고 있습니다.


      • 2020-09-26 08:05

        올리신 글을 통해 많은 내용을 배우고 또 다양한 여러가지 견해를 보게 됩니다. 목사님과 같이 성경을 알고 가르치는 목회자가 있다는게 감리회의 복입니다. 만일 성경의 교리들과 다른 설교를 들어야 하는 성도들이 있다면, 광야 길에서 마실 물과 먹을 것을 찾는 영적 갈급함 가운데, 스스로 성경을 읽고 성령께서 인도하심으로 깨우치길 기도합니다.


        • 2020-09-26 08:59

          과찬이나 감사합니다. 필자의 글(요한계시록 연재)을 통해 많은 내용을 배우시고, 또 다양한 여러 견해를 보게 되신다고 하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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